사과, 매혹적인 오브제 아 / 정희승
과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맛있는 사과라도 그 씨앗을 심어 같은 품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자신의 눈부신 혈통과 이름을 물려주려 해도, 자식인 씨앗들이 한결같이 그걸 거부하므로, 사과의 씨방은 보통 다섯 개의 작은방들로 나뉘어 있는데, 각 방마다 한 개의 씨앗이 들어 있다. 모두 한 배에 속한 것이지만, 대를 이를 후손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니 무슨 족보가 필요하겠는가. 이 배은망덕한 자식을 앞에 앉혀 놓고 우생학이 어떻고 삼강오륜이 어떻게 훈계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맛과 빛깔과 향에 아무리 감동했다손 치더라도, 그걸 손자의 손에 쥐여주겠다고 씨앗을 땅에 묻는 소동만은 일으키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다. 괘씸하게도 조막만 하고, 볼품없고, 질겁할 만큼 시디신 돌산과가 열릴 테니까, 한마디로 체면과 스타일을 구기는 할아버지가 되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과일이 그렇듯, 사과 역시 야생으로 환원하려는 성향이 워낙 강해, 씨앗으로 품종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디. 씨앗은 고요한 씨방 속에서 저마다 자신만의 세상을 꿈꾼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과의 고전적인 품종 대부분은, 조상의 눈부신 혈통에 의존하지 않고, 수많은 야생사과 가운데서 불현듯 솟아오른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난 격이라고나 할까? 저 유명한 딜리셔스 품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어느 날 실로 우연히, 낙원의 기억을 간직한 씨앗 하나가 결국 한 과수원의 밭둑에서 싹을 틔운다. 이곳이야말로 낙원을 건설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라는 듯, 당연히 처음에는 주인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다. 일하는 데 거치적거리고 성가셔서 주인은 몇 번이나 가지를 쳐내버린다. 그럼에도 계속 자라나자 낙천적이고 너그러운 그는 이 가련한 사과나무를 그대로 내버려둔다. 이 나무는 이런 주인의 온정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에게 이제까지 먹어본 적이 없는 최상의 과일로 응분의 보답을 한다. 일을 하다가 목이 말라 이 나무에서 사과를 하나 따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무심코 한입 베어 문 그는, 딸꾹질을 멈추게 할 만큼 놀라운 맛에 숨을 멈춘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에 머금은 사과를 아삭아삭 깨물면서 신중하게 맛을 헤아린다. 혀를 흥건하게 적시는 달콤한 과즙과 매혹적인 향, 그리고 산뜻한 식감, 그제야 경직된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면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다.
다 먹고 나서도 눈을 감은 채, 여운이 남아 있는 달보드레한 입술을 감빨며 꿈꾸는 표정을 짓는다. 단물이 혀끝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뒤늦게 생각난 듯,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햐, 세상에 이렇게도 달콤하고 향기로운 사과가 있나니, 이건 인류가 이토록 열망해왔던 바로 그 열매야, 신의 키스를 받은 열매라고! 그날, 황홀한 백일몽에 도취한 이 아담의 후손을 설레는 가슴을 안고 밤잠을 설친다. 사과 하나로 폴 세잔은 파리를 정복했고, 뉴턴은 만유인력법칙을 발견했는데, 자신이라고 어찌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지 못하겠는가. 그는 세상을 낙원으로 바꿀 원대한 꿈을 꾸며 밤새 전전반측한다. 그의 꿈은 과연 실현되었을까? 역사가 분명히 말해주는 교훈은, 이런 몽상가에 의해서 큰 전환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 딜리셔스는 신품종 경연 대회에 출품되어 최우수 등급을 받는다. 그리고 곧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종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딜리셔스가 세계로 퍼져나갔을까? 식물학적 특성상 씨앗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건 접붙이기 방식을 통해서다. 접붙이기란 대지에 뿌리를 내린 대목의 둥치를 잘라낸 다음, 그 자리에 재배하고자 하는 접을 붙여주는, 품종개량과 번식을 위한 방법을 말한다. 여기서 우린 인위적으로 붙여주는 접이 대목의 절단면, 그러니까 야생성의 죽음을 딛고 성장한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접으로 붙인 딜리셔스 역시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허공에서만 번성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미국의 한 과수원 밭둑에서 우연히 싹을 틔운 한 그루의 사과나무는 스스로 창조한 신화의 중심에 선다. 즉,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원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나무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보존을 위해 옮겨 심는 과정에서 부주의로 고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원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이 딜리셔스 사례에서, 자연과 문화 사이의 구전 원형을 본다. 그래 어쩌면 진리는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발견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눈 밝은 이라면 대목을 자연, 무의식, 혼돈, 악으로, 접을 문화, 의식, 질서(법), 선으로, 절단면을 거세나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 나오는 '죽은 아버지'로 그 상징성을 읽을 것이다. 라캉의 후예라면 대목은 상상계로, 접은 상징계로, 절단면은 이 둘을 이어주는 (진면목이 죽음, 절대 허구, 무라는 불가능성인) 실재계로 읽을 가능성이 높다. 실재계는 상상계(음)도 아니고 상징계(양)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음이면서 양이다. 실재계는 음양을 순환하게 하고 욕망을 지속시키는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실재계에는 해골을 남근으로, 그러니까 문명, 언어, 법으로 바꾸어주는 승화의 기능이 있다. 사실, 모든 문화는 이 죽음이라는 실재 위에 건립된 것이다. 현대의 빛나는 기술문명은 자연을 파괴하여 얻은 원재료를 가공하여 이룩한 게 아닌가. 문화나 문명도 파괴, 곧 죽음 위에서 꽃을 피운다. 이 역시 신기루와 같다.
그렇다면 달콤한 사과는 무엇을 상징할까? 그것은 죽음을 지연시키는 삶의 목적, 곧 환상이 투사된 욕망의 새상 -오브제(프티) 아-를 표상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 숭고한 대상도 오직 허공에서만 번성하므로 덧없는 산물이다. 아무것도 아닌 무가 찬란하게 빛나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 우리는 목표물인 사과를 손에 쥐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는 곧 또 다른 사과를 욕망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삶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덧없음'은 '무상성'과는 전혀 다른 의미 층위를 갖는다. 무상성과 달리 살아낸 다음에야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므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고, 행복의 의미를 부단히 물으면서, 역경을 헤쳐온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덧없음이다. 그것은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덧없음은 삶의 이면이며 삶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삶을 사랑한 자는 덧없음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절망에 빠질 때마다 사과를 품고서 꿈을 꾸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