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가 / 청랑
가르며 다가오는 불빛들. 텁텁하고 건조한 차 안에 반짝 등불 하나 켜진다. 전주곡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노래가 아스라한 옛 기억을 불러들였다.
봄 햇살에 볼그레해진 토요일 오후. 친구와 덕수궁 연못가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발에 연못은 윤슬로 눈이 부셨다. 봄은 겨울을 넘어와 내 앞에 와 있었지만, 반짝반짝 빛나고 싶은 나의 청춘은 마냥 시들하기만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등 뒤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 것은. 두 남자가 우리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례했다며 스케치한 그림을 건네주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를 보러 왔다가 벚꽃잎 난분분한 연못과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만 그리게 되었다나. 이게 다 남자들의 수작이려니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현재 화가로 활동 중이라 했다. 각자 화실을 운영한다며 머리카락 곱슬곱슬한 친구가 너스레를 떨었다.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는 시종일관 조용했다. 그에게선 가을과 겨울 그 어디쯤 머무르고 있을 쓸쓸함과 고독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쏠리게 된 걸까.
그는 토요일이면 나를 만나러 왔다. 내 직장은 덕수궁 근처였고 토요일엔 오전만 근무했다. 그는 덕수궁 옆 음악다방에서 나를 기다렸다. 트렌치코트와 부드러운 머릿결이 잘 어울리는 남자. 바람 불면 머리카락에서 촤르르~~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우리는 사랑 꽃 번지는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은행잎 쌓인 정동길을 걸었다. 길가에 늘어선 올망졸망한 카페를 거쳐 이따리아노 레스토랑 앞을 지날 땐 맛있는 함박스테이크가 생각났다. 경향신문사를 끼고 광화문 네거리까지 걷다 보면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선약이 있었지만,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저녁때 청년부 주최로 크리스마스 행사가 있었다. 서로 직장이 가까운 남자 교우와 교회에 함께 가기로 했었다. 그 친구라면 그가 합석해도 이해해줄 거 같았다.
우리 일행은 비엔나커피로 유명한 찻집에 들어갔다. 남자 둘은 악수와 통성명을 나누었다. 그러나 몇 마디 주고받은 뒤엔 어색한 침묵만이 세 사람 사이를 돌았다. 끼어든 건 그였는데 졸지에 불청객이 되어버린 친구. 교우와 일어서는데 그가 ‘가지 말라.’며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그는 옆집 오빠처럼 더없이 편안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날 세 사람이 합석한 후 그의 눈빛이 여느 날과 다르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찻집을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명동 거리는 화려한 불빛과 흥겨운 음악으로 넘실거렸다. 그가 갑자기 생각난 듯 그의 화실에 들려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궁금했던 화실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화실 안은 어수선했다. 펼쳐 놓은 이젤 위엔 완성되지 못한 그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여고 시절 미술부에서 활동하던 때가 생각났다. 3년 동안 그림에 대한 열망을 차곡차곡 쌓아갔던 내가 아니었던가. 화구畫具박스와 이젤을 챙겨 사생대회에 나가면 꿈이 곧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접어 두었던 꿈을 미완성 그림 위에 펼쳐 놓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화가라는 것이 뿌듯했다.
그의 화실을 나와 함께 서울역 방향으로 걸었다. 그때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양평에서 크리스마스 이벤트행사를 한다면서 즐거운 추억을 남길 거라 했다. 낯모르는 사람들과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자는데 뜻을 같이했다.
한 시간 달려 도착한 곳엔 이미 수십 명의 사람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기타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모인 사람 대부분은 연인 사이인 듯 보였고 분위기는 점점 다홍빛으로 타올랐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이벤트는 끝이 났고 출발했던 곳으로 사람들을 태워다 주었다.
동이 트려면 이른 시간, 사람들이 빠져나간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황량한 도심엔 종이와 비닐봉지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공연이 끝난 뒤 찾아오는 허탈함과 공허감이 밀려들었다. 멋을 내 차려입었던 옷은 구지레했고 낯빛은 핼쑥했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설어 그와 빨리 헤어지고 싶었지만, 버스가 다니려면 아직 멀었다. 몸을 녹이러 들어간 찻집에서 그의 어깨를 빌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느 날 퇴근 무렵 회사 동료가 찾아왔다. 광화문 극장 앞에서 나를 봤다면서. 지난 토요일 그와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 앞에서 줄을 섰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그녀가 다니는 화실 선생님이라며 어떤 사이냐며 머뭇머뭇 물었다. 글쎄, 우린 어떤 사이일까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그녀의 말을 전해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약혼녀가 있었는데 왜 나를 만난 걸까. 그래서 그토록 침묵을 지켰던 걸까. 그가 더없이 비겁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왜 그를 좋아했을까. 내가 그토록 열망했던 화가여서. 손부터 잡으려고 덤벼드는 또래에 비해 매너가 좋아서. 까불고 투정 부려도 오빠처럼 보기 좋은 웃음으로 다 받아주어서. 그 흔한 ‘좋아한다, 사랑한다’라는 표현은 없었어도 시나브로 그의 존재가 내 속으로 스며들었나 보다. 뒤죽박죽 온갖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어쨌든, 예견된 운명처럼 작별인사도 못 한 채 허망하게 인연은 끝나버렸다.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이문세 노래 <광화문 연가> 일부-
지나가는 건 물이나 바람이나 세월뿐만이 아니다. 그와의 인연을 돌이켜보면 사람도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광화문 연가’ 노래가 들려오거나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길을 걸으면 빛바랜 추억이 날개를 달고 내 안으로 몰려든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녁노을처럼 저 혼자 그리움으로 번져가는 나의 광화문 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