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익어간다 / 김윤재
깊은 맛은 어머니 따뜻한 손길에서 나온다. 아무렇게나 뿌리는 것 같아도 한 포기 절이는 소금 양이 정확하고, 대충 넣는 것 같아도 양념 양이 딱 맞는다. 그래서 결혼 생활 32년차가 되었어도 김장하는 날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김장을 담그는 일은 몸이 고된 일이다. 불효일지 모르지만 나는 깊은맛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고된 일에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다. 내가 담근 김치는 아직도 얕은 맛이다.
과수원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늦은 밥상에는 꼭 자반고등어가 올라갔다. 아궁이 불씨에 구운 노릇노릇한 고등어는 한 토막이었다. 고등어는 밥상 한가운데가 아닌 아버지 밥그릇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였다. 아버지만이 드셔야 한다는 어머니 무언의 말씀이셨다. 아버지가 고등어접시를 형제들 앞에 밀어 놓아도 누구 하나 덥석 집어들지 않았다. 고등어 두어 토막 상에 더 올리지 못할 만큼 궁상스런 살림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법이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진지를 다 드시고 나면 자반고등어는 앙상한 가시를 드러냈다. 상을 물리며 자식 보기에 좀 그러하셨는지 “고등어 그 놈 참 얕은 맛이 나네.” 하셨다. 얕은 맛은 이렇게 맛있게 먹었지만 조금은 민망해지는 맛이다.
깊은 맛은 배부르게 먹고 나서도 부담스럽지 않고 죄스럽지 않는 맛이다. 손가락으로 집어 다른 이의 입에 넣어주고 그 손으로 내 입에 넣어먹는 편안한 맛이다. 얕은 맛이 간사한 혀가 느끼는 맛이라면 깊은 맛은 마음과 마음이 느끼는 맛이다. 자신의 인생을 온통 가족에게 저당잡힌 것도 부족해 선이자까지 물어주며 살아온 사람이 만들어낸다.
그 사람의 마음은 속이 꽉 찬 배추처럼 결이 많다. 결 속에 웬만한 일은 넣어두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아파도 신음하지 않고 기뻐도 겅중거리지 않는다. 서러워도 대거리하지 않고 억울해도 변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다. 살면서 김치가 짠지가 되고 그릇이 그륵이 되는 과정을 겪으며 터득한 사랑인 것이다.
그 손은 참으로 따뜻하다. 배탈이 나 차가워진 배를 쓰다듬으면 통증이 사라지고 무더운 여름 손부채질을 하면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스르르 잠들게 한다. 인생의 거친 문제, 간지러운 문제, 끈적거리는 문제도 그 손길에 맡기면 모두 생명으로 재탄생된다.
따뜻한 체온을 받은 생명은 받지 않은 생명보다 성장이 빠르다고 한다. 더 활발하고, 사물에 대한 반응이 빠르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고 하니 오늘도 나는 그 따뜻한 은혜로 사는 것이다.
올해도 86세 어머니의 11월 달력은 바쁘다. ○○일 큰아들네를 시작으로 큰딸, 마을회관, 이모네, 교회를 거쳐 우리 집으로 오실 계획이다. 김장을 해야 한다는 걱정이 어머니를 보면 말끔히 사라진다. 다 잘될 것 같고 맛이 있을 것 같고 실수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어머니와 함께 담근 김치는 넉넉하게 해도 늘 부족하다. 김장독에서 익기도 전에 주고 싶은 사람들 얼굴이 김치 속에서 웃는다.
김장은 이렇게 마음을 부르게 한다. 이상기온으로 배추 값이 올랐지만 값에 비해 배추만큼 푸짐한 것이 없다. 조금 넉넉하게 담가 놓으면 마음이 따습다. 보들레르의 시詩가 아무리 훌륭해도 소월의 시詩 구절만큼 실감 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김치 한 조각 먹지 않으면 개운하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결 삭은 김치만 있으면 겨우내 반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김치전, 김치찜, 김치만두, 김치볶음밥, 김치피자, 김치국수, 김치계란말이, 김치찌개, 김치깁밥 등등.
특히 잘 익은 김치를 넣어 조린 돼지등뼈의 깊은 맛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이다. 배추김치 서너 쪽에 돼지등뼈, 마늘생강, 매실청, 들기름을 듬뿍 넣어 압력솥에 찜을 할 때 뿜어져 나오는 냄새는 나를 수천 킬로 떨어져 나온 곳으로 데려다 준다. 넓은 들판 옹달샘이 있는 고향으로,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던 복사꽃 꽃비 내리던 과수원으로…….
코끝으로 들어온 냄새가 적당한 온기로 익혀 다시 밖으로 나갈 때 내 마음은 어떤 기쁨에 녹아내리기도 하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소설책에 눈을 박고 있었던 부끄러운 기억으로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지금 글을 쓰며 그 냄새를 생각하는 동안 내 감각은 지뢰처럼 기억을 폭발시키고 있다. 수많은 감성들이 뇌관을 통해 튀어 오르고 있다. 강하게, 약하게, 점점 여리게.
나는 아직 어머니 깊은 손맛을 흉내 내고 싶지 않다. 김장을 마치고 어머니와 목욕탕에 가는 일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김장은 내게 아름다운 정서고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겨울은 인생처럼 익어갈 것이다. 사각사각사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