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손도장 / 유동희
바람 한 줄기 스치는가 싶더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가지를 펼친 소나무의 붓놀림인가. 아니면 만물을 다스리는 바람의 솜씨인가. 서서히 색을 채워가는 하늘가로 하루라는 시간의 그림자도 함께 스러진다. 노을은 밝음과 어둠을 양쪽에 거느리고 마지막 열정을 태우는 중이다. 동시에 어떤 시절의 이야기들이 불꽃처럼 피어난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나는 어릴 적, 친구들과 방죽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찰랑대던 바닷물이 어디론가 사라지면 바다에도 길이 생겼다. 그 길을 걷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우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노을은 걸핏하면 세상을 자신의 색으로 바꿔버렸다. 날마다 같은 색깔이 없었다. 어느 여름날은 우물 안에도 빛이 담겼다.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두레박으로 붉은 물을 퍼 올려 발갛게 익은 얼굴을 씻었다. 찰랑찰랑한 노을을 담은 두레박에 비친 내 얼굴도 발그레했다. 어릴 적 기억은 모두 노을이 배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 시간을 건너와 나는 지금 도시의 아파트 테라스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그런데 마치 엄마와 고향집 마루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엄마의 왼팔은 자유롭지 못하다. 어릴 적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한쪽 팔을 온전히 쓸 수 없어서다. 왼쪽 어깨 뒤쪽에 움푹 파인 흔적이 있는데 그게 원인이라 짐작할 뿐이다. 어깨에 난 흉터는 자식들을 일찌감치 철들게 했다.
우리 형제들은 무슨 일 앞에서든 엄마의 기분을 먼저 생각했다. 공부에 열을 올린 것도 엄마가 상장을 좋아해서였다. 아버지는 일본 해군으로 징집되어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힘든 일을 하지 못하셨다. 엄마 대신 아버지가 자식을 길렀고, 엄마는 아버지 대신 농사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육아와 집안일을 잘하셨고, 엄마는 농사일을 불평하지 않았다. 엄마는 무엇이든 억척스레 해냈지만, 왼쪽 팔이 올라가지 않아 머리를 혼자 감지 못했다. 엄마 머리를 감겨주는 일은 아버지가 하셨다. 내가 열 살 무렵부터 엄마 머리를 감겨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했다. 엄마의 머리카락은 유난히 검고 윤기가 흘렀다. 긴 머리카락을 조막만 한 손으로 조물조물하면 “아이고 내 강아지 손끝도 야무지네.”라며 좋아하셨다. 바닷가 마을에도 개화의 열풍이 불었다. 어느 장날, 뽀글뽀글 파마한 엄마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내 강아지, 인자 엄마 머리 감기기 쉽겄제.”라며 활짝 웃었다.
중학교 졸업반이 되자 친구들은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다며 들떠 있었다. 나도 도시로 가고 싶었지만, 나마저 도시로 진학하면 엄마 머리는 누가 감겨줄까 싶어 도시에 있는 학교로 진학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비장한 각오로 엄마가 일하고 있는 산비탈 밭으로 갔다. 옆집 식이처럼 도시로 진학하겠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헉헉대며 올라가는데 비릿한 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응원군처럼 든든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웬걸, 그날따라 나를 반긴 건 구슬픈 노랫소리였다. 콩밭에 도착하기도 전에 엄마는 보이지 않고 고랑마다 노랫가락이 흘러 다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전학 간 남동생을 걱정하며 부르는 노래였다. 엄마의 자작곡은 내 입을 봉해버렸다. 물이 담긴 주전자를 엄마 앞에 두고 밭 한가운데 있는 널찍한 바위 쪽으로 내달렸다. 노래는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다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얀 콩꽃들은 귀를 크게 열었다. 그들도 우리 형제처럼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같았다.
긴 여름 해가 바다 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마침내 풍덩 빠질 즈음에야 엄마는 호미질을 멈췄다. 우리는 좁은 밭길을 걸었다. 그때 세상에는 엄마와 나 둘뿐인 듯 고적함이 찾아들었고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균형을 잡기 위함인지 엄마는 멀쩡한 오른팔을 유난히 휘적대며 내려갔다. 바다는 서풍까지 보내 날 응원해 주었건만, 하고 싶은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기울어진 엄마의 왼쪽 어깨가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었다.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들이 내게서 빠져나와 바다로 달음박질치더니 미련 없이 빠져버렸다. 그날 해거름 노을은 아버지의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인주보다 더 붉었다. 고등학교 원서에 찍을 아버지의 도장 대신 나는 가장 붉은 노을이 물든 하늘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손도장을 찍었다. 엄마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후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머리를 감아주는 일은 계속되었다. 그때는 엄마의 왼쪽 팔이 앞길을 막는 훼방꾼이라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 삶의 이정표가 되어준 것은 엄마의 성하지 않은 왼쪽 팔이었다.
어제는 엄마의 아흔다섯 살 생신날이었다. 미역국과 즐겨 드시던 팥죽을 준비하여 요양원으로 갔다. 다른 자식은 몰라보는데 나는 용케 알아본다. 아주 오래전, 자신 때문에 도시로 진학하지 못하게 한 일이 엄마는 아직도 미안한가 보다.
언젠가 엄마가 먼 길을 떠나는 순간이 온다면, 그 때가 해 질 무렵이면 좋겠다. 내가 엄지손가락으로 노을 손도장을 찍던 그날처럼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든 순간이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