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시간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260305/1603925
                                                                                                                         이희숙
 
 
지리산 기슭에서 뿌옇게 변하던 하늘은 말없이 눈을 뿌려주었다. 함박눈이다! 점점 굵어지는 눈송이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아 들며 잠시 어른의 시간을 내려놓고, 순진했던 어린 날로 돌아갔다. 얼마 만인가? 멀리 떠나 살다 다시 밟은 고국에서 맞는 눈송이다.


조용히 내려오는 눈은 오래된 기억의 문을 열어 주었다. 처음 밟은 곳이지만 낯설지 안았다. 눈송이 속에 그리움이 피어났다. 흰 숨결처럼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어린 시절 마당에서 뛰놀던 발자국과 둥그렇게 굴려 나뭇가지로 팔을 만들던 눈사람을 기억나게 했다. 난로 곁에서 손을 비비며 나누던 웃음을 하나씩 불러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눈이 감싸는 온기를 느꼈다. 싸늘한 땅을 덮어 상처를 감추고, 거친 일상의 모서리를 둥글게 감싸는 듯했다.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은 어느 사이 산과 대지를 덮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바꾸었다.

하얀 세상은 타국으로부터 내가 비로소 돌아왔음을 알게 했다. 시간은 잠시 멈춰 순백의 침묵 속에 나를 내려놓았다. 날 쉬게 했다. 함박눈은 말없이 속삭였다. 여기는 네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고. 하얀 눈송이가 겹쳐 앉으며 마음은 오래 잊고 지냈던 고향의 온도를 되찾았다.

조카 결혼식 날에도 눈이 내렸다. 마치 축복하는 하늘의 손길로 여겨졌다. 곱게 차려 입은 한복 위로 눈송이는 살포시 앉았다. 축하객들의 통행에 지장이 될 거라는 염려가 들었지만, 나는 그저 마음껏 기뻐했다.

서울을 떠나는 날, 하늘은 하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눈이 내리자 시민들의 발걸음은 분주해졌다. 지하철을 이용하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공항까지 가려면 교통체증이 심할 테니 미리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내 눈은 쌓이는 눈 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하얀 세상을 마음에 담고 싶었으니까. 얼어붙은 풍경을 넘어 포근한 위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매서운 겨울 한복판에서, 차가운 공기와 달리 마음만은 온기로 가득 차 있다.

<이희숙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