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저 / 도은 김은숙

시간의 발효를 거치면 기억은 팽팽해진다. 그러다 불쑥, 팽창한 기억이 삶을 흔들 때가 있다. 오늘, 프라이팬에 생선전을 부치려던 순간이 그랬다. 뒤집을 마땅한 젓가락을 찾던 중 싱크대 서랍 어딘가에 둔 길쭉한 물건에 생각이 미쳤다. 익숙한 서랍 아래 칸, 안쪽에서 나는 오래된 시간을 더듬듯 그걸 발견했다.

젓가락을 꺼내려던 순간, 내 눈은 무언가에 붙들렸다. 구석 한편에 놓인 낡은 비단보자기였다. ‘이게 뭘까’ 생각하기도 전, 손끝에 전해진 차가운 감촉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매끄러운 비단을 조심스레 풀어헤치자 주름 가득한 한지가 나왔다. 한지 속에는 은수저 한 벌이 들어있었다.

본래의 은빛은 사라지고 이제는 푸르스름한 밤색으로 물든 형상이었다. 비단은 여전히 반짝이는데, 수저는 세월 속에 자신을 통째로 내어준 듯 퇴색해 있었다. 잠시 멍한 채, 한 사람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몇 해 전, 두꺼운 책 속에서 아버지가 사준 만년필을 찾았을 때의 감동처럼 수저는 나를 당신에게로 이끌었다.

그날, 백화점을 서너 바퀴 돌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생일 선물로 무엇이 좋을지 고민하던 그때, 맑은 색의 은수저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밥맛을 잃어버린 아버지께 입에 맞을 건강식을 사려던 길이었는데, 나는 그만 은수저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늘 가까이 두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점이 마음을 움직였다. 투병 중이었기에 건강을 염원하는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화려한 무늬의 수저들 사이에서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소박한 모양을 골랐다. 수저를 전해 받을 때 느꼈던 떨림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다. 아버지가 기뻐하실 모습을 상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버지는 평소 손때 묻은 낡은 숟가락만을 고집했다. 병원에 계실 때도 당신이 쓰던 숟가락과 젓가락, 컵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당신 삶 자체가 그랬다. 소박하고 검소했으며,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께 은수저 한 벌쯤의 호사를 안겨드리고 싶었다. 부디 완쾌해서 새로운 날들을 시작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그렇게 축복을 노래하며 가족과 함께 웃을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생신 며칠 전, 아버지는 예고 없이 삶의 끈을 놓아버렸다. 축복의 기도는 회한과 후회로 얼룩졌다. 아버지가 은수저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작은 소망은 봉인된 채 영원히 묻혔다. 후회한들 당신이 돌아올 리 없었다.

생신을 기다리며 포장한 선물은 식탁 위에서 소리 없는 애도의 언어가 되었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돌아온 날, 수저를 일부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넣었다.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치워야 견딜 수 있는 날들이었다. 발에 밟히던 눈물이 조금씩 줄어들고,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은수저는 서서히 잊혔다.

수저를 손에 들고 “오랜 시간을 잘도 견뎠구나”라는 말을 건네려다 이내 멈칫한다. 목울대가 싸해졌기 때문이다. 한낱 물건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감이 가슴을 쳤다. 당신을 향한, 오래 묵은 언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가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손잡이 부분을 만진다. 묵직한 무게가 손에 전해진다. 내 짐을 편히 내려놓곤 했던 당신의 넓은 어깨를 떠올렸다. 장녀라는 이유만으로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기에, 내 삶에 파란이 일 때마다 믿고 기댄 든든한 어깨였다.

작아진 아버지의 어깨를 안아드리며 직접 식사를 도와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수저는 당신의 체온을 느껴보지 못한 채 유물처럼 남았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수저 위에 어른거린다. 삶이란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가. 소중한 건 늘 늦게 알아차리니 말이다. 투병 중인 환자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음에도, 나는 당신을 굳게 믿었다. 생신까지는,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물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내게 그런 분이었다.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었다. 갑자기 병이 찾아왔을 때조차 약한 소리를 내비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믿음의 날들을 오롯이 살아냈다.

당신을 보내드린 뒤에도, 해 질 녘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투박하고 정겨운 발걸음 소리를 환상처럼 듣곤 했다. 아버지는 낡은 시계추처럼 언제나 한자리에서 묵묵히 세상을 마주했다. 그리고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말을 앞세우지 않고 행동으로 삶을 보여준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깊고 따뜻한 바다 같았다.

어렸을 적, 입이 짧아 밥을 탐스럽게 먹지 않던 나를 끝까지 먹게 한 분도 아버지였다. 나는 밥상머리에서 곧잘 졸았고 밥알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에는 깊은 사랑이 가득했다. 내가 숟가락을 떨어뜨릴 때마다 빙긋 웃고는, 밥을 푹 뜬 숟가락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 손길은 투박했지만,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때의 아버지 손등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한다.

이제 은수저는 조금은 담담해진 나를 향해, 그동안 애썼다고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어머니마저 떠나보낸 뒤, 나는 이따금 예고 없이 두 분의 흔적을 마주한다. 아버지와 졸업식장에서 찍은 사진을 본 날도, 어머니의 오래된 가방을 찾은 날도, 그 물건들은 독립적인 사물이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시공간을 초월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닿지 못한 사랑의 언어였고, 미처 다 거두지 못한 깊은 정이었다.

전을 부치다 말고 나는 광택제와 천 조각을 꺼낸다. 검은 녹이 벗겨지자 어둠의 막이 걷히고 수저는 비로소 숨을 쉬는 듯하다. 한동안은 나에게 후회를 안겨준 물건이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유물이다. 수저를 닦는 건 아버지를 애도하는 행위다.

내 손에도 따뜻한 온기가 맴돈다. 어느새 당신의 온기를 닮아간다. 마음은 시간이 갈라놓은 거리를 건너와 눈앞에 선다. 이제, 나는 알 것 같다. 평범하다고 여겼던 저녁의 틈새와 당신의 무심한 손길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깊은 사랑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사라진다는 건 현상일 뿐,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이 없어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보이지 않던 것들도, 어느 순간 불쑥 도드라지며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있다. 침묵 속에서 시간을 견디고 다시 내게 돌아온 은수저, 그 은빛 위에는 당신의 손길과 무심하게 지나간 시간의 잔향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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