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이 피어나다 / 현경미
내가 잘못 본 건가. 눈이 동그래진다. 전시관 중앙에는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구기고 밟으며 짓이겨 애써 천에 주름을 낸다. 전시관에 작품으로 걸리기까지 그 시작이 바로 이 작업이라니 낯설다.
언제부턴가 이마 눈가 입가 어디랄 것도 없이 떡하니 주름이 자리를 잡는다. 중요해서 긋는 밑줄도 그렇다고 뜻 없는 낙서도 아닌 것 같다. 얼굴을 찌푸려야 할 만큼 고심이 많았다는 표시인 양 썩 달갑지 않다. 어떻게 지우나, 어디를 펴야만 하나, 볼 때마다 신경이 쓰일 뿐이다.
무슨 연유로 주름은 나와 함께 살게 된 걸까. 뭔가에 집중할 때 미간을 찌푸리는 습관이 나에게 있나 보다. 언제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 줄 하나가 이마를 가로지른다. 양 입가에는 전에 없던 괄호가 생겨 덧붙여 설명해 주기는커녕 웃는지 우는지 표정을 모호하게 만든다. 주름도 오랜 시간 함께한 나의 일부라는 생각에 들여다볼수록 묘한 맘이 인다. 어떤 습관이 더해졌겠지 싶다가도 내면이 걸어간 발자취 같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주름과 주름 사이에는 갈래갈래 길이 많고도 많다. 좁고도 어두컴컴한 길, 막다른 길, 울퉁불퉁한 길, 헉헉 숨이 차오르게 만들던 길도 있다. 길 위에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갈 길을 몰라 멈춰 서기도 한다. 당황스럽고 두려움에 휩싸일 때도 있다.
한없이 작아지고 쪼그라들게도 된다. 잘 다려진 옷 주름처럼 간격이 일정하고 차르르 떨어져 내려 모양새가 나면 얼마나 좋을까. 이도 저도 아니어서 모른 채 뒤돌아서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다. 그런데도 매몰차게 내동댕이치지 못하고 꾸깃꾸깃 구겨진 채 길을 간다.
주름이라 여긴 것들 사이에 어김없이 존재하는 구김이다. 생각해 보니 반듯하게 펴진 날보다 구겨진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주름과 구김은 아주 같지도 않지만 영 다르지도 않아 보인다. 주름이 그나마 조금 밝은 쪽을 향하고 있다면 구김은 조금 어두운 느낌을 준다. 오늘 작품들을 대하고 보니 구김도 예술 작품이 되는구나 싶다. 밟힘과 짓이김, 또한 이전과 다르게 독특한 무늬로 되살아나 마음을 사로잡는다.
‘플리츠 플리즈’라는 브랜드는 주름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여성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위상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이는 안다. 마치 아코디언을 펼치고 접는 느낌이랄까. 그만이 가지는 독특한 주름의 향기가 있다.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에는 형편이 다르다. 주름으로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았던 때에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주름진 천이 색으로 물들여지자, 작품이 되는 영상 장면이 지나간다. 천에 가해지는 무게나 방향에 따라 생김새와 결도 제각각 다르다. 고스란히 받아들여 제 몸에 아로새긴다. 주름을 구김으로만 여기지 않은 작가를 만났기에 각양 다른 작품이 되어 전시관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작품 하나하나마다 당당하다. 반듯한 천에 그려진 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거칠다가도 부드럽고 흩어지는가 하면 또 모여든다. 주름도 구김도 어느새 무늬가 되고 리듬이 되어 작품 앞에 선 이들을 새로운 미美의 세계로 이끈다.
저마다 사연들을 한 움큼쯤 가슴에 담았을 테다. 사노라면 잘 다려진 옷처럼 멋있는 날만 있을까. 구겨지고 밟히며 짓이김을 당해야 하는 날이 어찌 없을까. 예기치 않은 일들은 고뇌에 차게 만든다. 구김살 혹은 주름살이 자신의 일부가 된 어느 날과 맞닥뜨리게도 된다. 그런 순간들을 견디며 지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라도 박수받아 마땅한 일 같다. 전시관 주름 앞에 선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또한 작품 같아 귀하게 여겨진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작품마다 다른 주름이 제각각 다른 삶으로 다가온다.
되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아버지가 떠나신 지 스무 해가 훌쩍 지났다. 세월 속에 가물거린다 해도 깊고도 굵었던 주름만은 아직도 기억 속에서 선명하다. 하나하나 말로 다 하지 않아도 주름에 새겨진 이야기들이 백 마디 말을 보잘것없게 만들었다. 웃음과 눈물 그리고 한숨, 온갖 희로애락이 오랜 시간을 견디며 주름을 빚었다. 그러고 보면 주름은 한 사람 한 사람 삶이 깃들어 있는 자취이자 성실을 다했다는 증표 같다. 어떤 주름 앞에서는 한없이 숙연해지는 게 그 이유인가 싶다.
지금은 주름을 지우고 펴는 시대인가 보다. 언젠가 미간에 골이 깊은 주름을 반듯하게 펴고 온 동료의 한마디가 생각난다. “평생 만들어 놓은 주름을 몇 초 만에 펴더라.” 어딘가 모르게 씁쓸함이 묻어나는 투였다. 농담인 듯 진담인 듯 툭 던지며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미간이나 이마에 주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배우를 대할 때였다. 펴고 안 펴고는 개인의 취향일 것이다. 처지나 형편으로 봐서는 없애고도 남을 법도 한데 얼굴 곳곳에 새겨져 있는 주름이 오히려 내면을 묵직하게 만들어 한층 더 멋져 보였던 기억이 주름만큼이나 선명하다.
한참을 주름과 함께하다 보니 애잔함이 변하여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구겨져도 밟혀도 짓이김을 당하여도 오늘 전시관 작품들처럼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끌어안고 주름져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이리라.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들이 돌연 특별해서 긋는 밑줄 같고 발자취들에 대한 기록이며 덧붙여 강조하는 괄호가 아닌가 생각된다.
작품으로 내걸린 주름 앞에서 주름잡던 한 시절이 되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일까. 옆에서 누군가 소곤소곤하더니 낮게 웃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눈가 주름들이 조명등 아래서 꽃처럼 피어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