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거리 / 최지안

나와 대상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 거리는 원래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 여부에 따라 값을 달리하는 것이어서 측정할 수도 기본값을 매기기도 어려운 그야말로 지극히 가변적인 속성을 지녔다. 주체는 언제나 나 자신이지만 상대의 값에 영향을 받는 미지수이므로 고무줄처럼 언제 어느 때 줄어들지, 혹은 늘어날지 모른다. 즉 거리는 예측불허다.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질 수도, 혹은 더 두꺼워지기도 한다. 혹 간절하다고 해도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거리라면 지켜야 한다. 사람과의 사이에 존재하기도 하며 동물과의 사이에도 존재한다.

무늬를 만난 것은 8월의 아침이었다. 뒷마당에서 얇은 금속성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새끼 고양이였다. 하얀 바탕에 갈색과 회색 검정색 얼룩이 들어간 새끼 고양이는 눈 밑으로 눈물자국이 길게 나 있고 몸은 뼈가 앙상했다. 어쩌라는 것인지 날 보고 울었다. 나는 한참 쳐다보다가 어미 고양이가 돌아올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인터넷에 보니 어미가 급하면 새끼를 숨겨놓기도 했다가 다시 찾아간다고 했다.

점심에 다시 가니 병꽃나무 아래에서 자고 있었다. 힘이 없어서인지 도망도 가지 않았다. 아랫집 고양이 키우는 집 아주머니에게 얘기했더니 사료와 통조림 캔을 들고나왔다. 먹이를 주자 고양이는 관심을 보였지만 많이 먹지는 못했다. 조금 먹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픈 것 같았다. 다음날도 고양이는 뒷마당 화단 그늘에서 종일 잤다.

그다음 날 아침 수영장 청소를 하는데 고양이는 ‘야옹’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먹이를 주었는데 이번에는 많이 먹었다. 전날보다 눈빛도 또렷해지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렇다고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거리를 두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녁에도 먹이를 주었는데 잘 먹었다.

고양이는 약 15 센티미터의 몸길이에 얼굴은 작았다. 하얀색 바탕에 귀가 엷은 갈색이고 등과 다리 쪽에 동전만 한 동그란 얼룩이 있는데 회색과 검정이 들어간 얼룩무늬였다. 몸에 4가지의 색을 지닌 보기 드문 무늬였다. 어미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버려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 녀석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혼자 내 집으로 기어들어 왔는지 어미가 데려다 놓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일은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어미가 버렸을까. 아랫집 아주머니는 이런 무늬를 가진 고양이가 근방에는 없다고 했다. 나도 주변에서 마주치는 고양이의 털 색깔을 유심히 쳐다봤지만 이런 하얀 바탕에 얼룩이는 없었다. 턱시도, 혹은 검은색이거나 회색과 검정의 고등어 무늬가 대부분이었다. 아랫동네에 노란색 고양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곳과의 거리는 좀 멀었다. 나는 녀석에게 무늬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무늬는 내 집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내 집 여기저기를 자기 집처럼 나다녔다. 회랑에서 놀거나 뒷마당 석축 빈틈에서 잠을 잤다. 아침저녁 하루 두 번, 뒷마당에 와서 야옹거리며 내가 밥을 주기를 기다렸다.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고양이에게 밥 주는 사람이 되었다. 이 작은 고양이가 빨리 성묘가 되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기를 고대하며 생선도 사다가 구워 먹이고 달걀 프라이도 해 먹였다. 식사가 끝나면 녀석은 세수를 했고 블루베리 화분 위로 올라가 놀거나 메뚜기를 보며 장난질을 쳤다. 그러나 내게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나와는 늘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었다.

이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녀석에게 정을 주는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밥을 준다는 거드름을 피우지 않아 좋았다. 나는 단지 새끼 고양이의 생존을 도왔을 뿐이다. 이런 내 마음을 저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인지 고양이의 야생성인지 우린 둘 다 1미터의 간격을 지켰다.

상대와의 거리는 처음 상대를 만날 때 설정한다. 새로운 만남은 늘 조심성과 관찰로 시작되고 우리는 상대와의 사이에 거리라는 어떤 덩어리를 던져둠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 거리는 변화한다. 상대와 가까이 지내도 되는지 일정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나름대로 계산하며 거리를 없애기도 하고 거리를 더 늘이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서 ‘미학적 거리’라는 말을 쓴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깝지도 않은 사이다. 이렇게 상대와의 사이에 필요한 예의를 우리는 ‘아름다운 거리’라고 약속을 한 모양이다. 친절을 베풀되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 사생활이 침해받는 상황은 피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친분으로 결속을 다지던 맹세는 ‘오지랖’이나 ‘주제넘는’ 일이거나 ‘과잉 간섭’으로 해석될 수 있으니 이쯤에서 더는 다가가지 말자는 것이다. 요컨대 이 ‘미학적 거리’는 상대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며 내 세계를 보장받는 꽤 세련된 방어 수단이다.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지 않아서 책임감도 없는 조금은 비겁하고 편리한 거리다.

나와 무늬와의 관계가 그러했다. 무늬와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는 1미터가 넘었지만 점점 1미터 이내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거리가 아주 줄어들지는 않았다. 놀면서도 나의 동작을 살피며 거리를 두었다. 비록 내게서 먹이를 받아먹지만 야생 고양이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무늬와 밥을 준다는 권리를 내세울 생각이 없는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둠으로써 관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 뽀얗고 부드러운 솜털을 가진 녀석에게 빠져들지 않겠다는 내 나름의 방어였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얼마 후면 이사를 가야 해서 누군가를 책임질 형편도 못되었다.

무늬는 갈수록 예뻐지고 활기찼다. 털에서 윤기가 흐르고 움직임도 빨라졌다. 무늬가 예뻐질수록 이사 날짜는 다가왔다. 내 맘대로 무늬를 데려가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그대로 두고 가는 것이 무늬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집 아주머니에게 무늬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늬에게 줄 통조림과 간식을 산 날이었다. 아침에 사료만 준 것이 미안해서 읍으로 나가서 사가지고 왔다. 맛있는 것을 맛보게 할 생각에 저녁이 되길 기다렸지만 무늬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커다란 줄무늬고양이들만 집 주변에 얼씬거릴 뿐이었다. 그즈음 다른 고양이들이 뒷마당에 들락거리며 무늬를 위협하던데 그들에게 밀려난 것일까. 놀러 나갔다가 어딘가에서 죽었을까. 예뻐서 누가 데려갔을까. 꿈을 꾼 것 같았다. 무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휴대폰에 남긴 사진과 영상이 아니라면 꿈을 꾼 것이 틀림없었다. 블루베리 화분 위에 올라가서 장난치던 무늬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거리가 없어야 했을까. 미학적 거리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거리였을까. 간절했지만 거리를 좁히지 않은 어떤 인연도 그래서 닿지 못했던 것일까. 한동안 환청을 듣곤 했다.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인가 하면 새소리였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거리는 그렇게 무늬의 생사를 모르는 채로 끝이 났다.

무늬에게 밥만 준 것이 아니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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