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자가 존재를 보다 / 맹난자

한밤중, 누웠다가 일어나 앉기를 서너 차례. 아예 일어나 앉고 말았다.

 

전류가 흐르듯 손가락이 타는 듯이 아픈데 진통제도 듣지 않는 다. 그나마 일어나 앉으면 조금은 덜하기 때문이다. 이 증세는 여자, 노인, 당뇨병 환자에게 많다고 한다는데 나는 이 경우에 모두 해당된다. 울퉁불퉁한 길을 오래 달려온 수레가 망가진 탓이다. 파거破車는 불행不行, 이제 수레를 버릴 때가 온 것 아닌가.

 

망가진 뇌를 의식하며 “신경만으로 살고 있다”고 외친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처럼 예리한 통증으로 나는 현존을 자각한다. 아무래도 두려운 건 코마 상태다. 하필 오른손이라서 밥을 먹기도 글을 쓰기도 어렵다. 어떤 인연에 의해 가합假合된 이 존재가, 한시적限時的인 이 존재가 결국은 없어질 것이면서도 한밤중에 깨어나 지금 여기 유니크하게 존재하고 있다. 사위는 고요한데 널따란 거실의 창문을 통해 흐르는 달빛이 위로하듯 건너와 나를 감싼다.

 

기후 탓일까, 금년에는 꽃들도 서둘러 피고 진다. 형상形相 있는 것은 참으로 영원할 수 없다. 눈앞에 분분히 날리는 꽃잎을 보자니 료오칸(良寬) 선사의 시구가 문득 떠올랐다.

“떨어지는 벚꽃, 남아있는 벚꽃도 떨어질 벚꽃”

현존現存의 자각, 이 시구가 현존재를 일깨우며 무상無常법문으 로 다가온다. 현존재는 종말에 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종말에 이르는 존재 즉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설파한 하이데거가 떠오른다. 그는 노자 《도덕경》을 번역하면서 주관과 객관이 무너진 세계, 분별 이전의 세계를 파악하며 의식이 끊어지면서 에고가 무너질 때 드러나는 것을 ‘존재 사건’이라고 불렀다. 존재자(생멸·현상)가 아니라 ‘존재’ 자체 (實有·본질)에 주목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자고 한다.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존재하라. 그리고 동시에 비존재의 조건을 알라”고 한다. 비존재의 조건을 알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 유有와 무無, 현상과 본질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작용은 있으나 형체가 없는 도道. 그게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본질〔体〕은 현상〔用〕과 다르지 않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寂滅’ 1)임을 안다.

 

불가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2) 을 깨달은 경지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죽은 것은 육신이지 본질적 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아적 존재인 이 몸에 ‘나’는 없고. 나의 주재主宰도 없다. 그런데 무엇이 삼경三更에 벌떡 일어나 푸른 달빛과 마주하고 있는가. 존재가 존재자를 보는 것일까.

 

창백한 푸른 달빛보다 더 차가운 파란색 조명 안에 칼 차고 앉은 춘향의 옥사 풍경이 스쳐간다. 처형이 집행되기 전날, 좁은 독방에 갇힌 뫼르소(《이방인》의 주인공)가 떠오른다. 그는 창문으로 흘러드는 별빛 찬란한 밤하늘과 고요, 저 무관심한 자연과의 합일에 스스로 행복감 에 젖는다고 작가 카뮈는 쓰고 있다. 찾아온 사제를 쫓아버리고, 희망조차 버린 뫼르소의 마음에는 그 어떤 것도 머물지 않으리라.

 

무념無念, 그리고 지금처럼 주위를 에워싸는 텅 빈 고요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그의 무심無心에 나 또한 용해되고 만다. 죽음에 대한 아무런 원망도 없다. 마음을 일으키는 어떤 경계도, 대상도 없다. 적막 속의 충일充溢, 한 존재자가 앉아있을 뿐.

 

몸이 겪는 아픔을 데리고 시린 달빛 속에 우두커니 앉은 그 사람은 이제 비존재非存在로의 환원還元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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