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에서 가던 길을 멈춘다 / 전점석
반 생명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둘러싸인 성공과 좌절뿐인 도시에서 에너지협동조합, 근대 문화유산 보전,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해 바쁘게 글을 쓰고 있다가 후배 덕분에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마음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창녕에 있는 우포늪으로 왔다. TV와 인터넷 없는 외딴곳에서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신문도 일주일 치를 몰아서 본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뉴스를 보지 않으니까 성질도 곤두서지 않아서 좋다. 물론 처음에는 답답했으나 대신 관광버스 타고 잠깐 왔다가 가시는 분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놀라움이 있었다.
우포에서 제일 처음 놀란 것은 캄캄함이었다. 어디가 어딘지를 알 수 없는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을 때도 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도 좋다. 숙소인 장재마을의 고요 펜션으로 가는 길이 산길이어서 집도 없고, 가로등도 없다. 흔히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같은’이 필요 없다. 그냥 ‘칠흑’이다. 젊은 시절,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서 방황하던 캄캄한 세상과 같다. 친구들은 무섭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전깃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늘을 본다는 게 너무 기쁘다. 늪 가에 살면서 느끼는 두 번째 놀라움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초록 봄’이다. 이런 봄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온몸으로 느끼는 연두와 초록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 고목에서 움트는 새싹들의 맑은소리가 들린다. 어린 새싹이 돋아날 때의 연한 연두색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구원해줄 것 같다. 연두가 사철나무의 초록과 어울리는 광경도 신비롭거니와 하루하루 조금씩 초록으로 바뀌다가 봄비가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진해지는 모습은 정말 찬란하다. 누군가가 한꺼번에 덧칠을 하는 모양이다. 세 번째로 놀라운 것은 물안개다. 새벽에 안개가 뒤덮인 마을을 출발할 때부터 마음이 설레인다. 비 오는 날이면 더 좋다. 안개 짙은 우포늪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를 감싸고 있는 안개를 몸으로 느끼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곳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바로 살아있는 안개가 간지러운 바람을 타고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장면은 기온이 도와줘야 볼 수 있다. 그냥 자욱한 것만 봐도 몽환적인데 넓은 수면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보면 비로소 늪이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느낄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같은 동작의 매스게임을 하듯이 모든 안개가 같은 춤을 추면서 피어오르는 광경은 환상적이다.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늪가의 갈대는 자욱한 새벽안개를 더욱 신비롭게 한다. 운이 좋은 날에는 안개 속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를 볼 수도 있다. 대대로 혹은 평생을 생업으로 붕어, 잉어를 잡는 분이다. 어떤 분은 필요한 만큼만 잡는다. 공연히 많이 잡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항상 늪에 있기 때문이다. 우포에서 꼭 만나야 할 네 번째 장면은 낮에 홀로 하염없이 늪에 서 있는 백로, 동료들과 먹이활동을 하느라고 바쁜 왜가리다. 한참을 보다 보면 자기들끼리 장난도 치고 먹이를 빼앗기도 한다, 저녁 무렵에는 먹이활동에 나서는 고라니와 포유류를 만날 수도 있다. 침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라니와 눈맞춤을 해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서는 야생동물의 발자국이나 분변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야생 생물들은 약육강식하기도 하지만 상호협력하기도 한다. 깃털만 남기는 포식자도 있지만 다른 새의 알도 품어주는 기특한 새도 있다. 탁란이다.
그렇게 푸른 하늘과 맑은 물, 그리고 아무런 긴장과 갈등 없이 새와 물고기만을 보고 한동안 살았다. 늪에 빠진 생활을 하다 보니 부수려는 사람도 없고, 막아야 할 일도 없고, 착한 생명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숨 막히는 경쟁도 없는 줄 알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하기만 한 늪은 그저 하늘을 비춰주기만 하길래 그게 ‘고요’라고 생각했다.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남 곳곳에 개발의 공포에 외롭게 시달리고 있는 늪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에 작성한 「습지목록」에는 있는데 실제 가보면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꽤 있다. 공장과 택지조성을 위한 매립이다. 늪 안에서 일어나는 경쟁도 가당치 않다. 갈대군락과 사초군락이 서로 영역싸움을 치열하게 하고 있고, 멸종위기종인 따오기와 수리부엉이가 서로 돕기는커녕 일방적으로 폭행을 행사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였다. 따지고 보면 지구상에 긴장과 갈등이 없는 곳이 없겠지만 그나마 늪에서는 조용함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멋진 석양에 넋을 잃기도 한다. 200년 되었다는 팽나무 옆에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바로 멍때리는 시간이다. 안개가 자욱한 날, 사지마을로 들어가는 70여 미터 고갯길에 줄줄이 이어져 있는 수십 개의 거미줄을 보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