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 석지연

버스를 타는 일은 무모한 짓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운전대에 앉은 낯선 이에게 목숨을 맡기는 것도 모자라 요금함에 돈까지 넣어야 한다니 말이다. 일산에 사는 나는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이 버스를 타는 일인데, 통학을 포함해 모든 만남이 서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차는커녕 운전면허도 없다.

지하철은 멀리멀리 돌아서 간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 겁먹은 얼굴로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내가 속한 작은 세계다. 그 안에서 나는 어딘가로 향하고, 기다리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부딪친다. 때로 불안한 삶에 실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게 와닿듯 나에겐 버스를 타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버스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아주 많다. 가장 최근의 이야기를 들자면, 맨 뒷좌석 중앙에 앉아 있던 내가 슈퍼맨 자세로 앞좌석까지 날아간 일이다. 차도에서 별안간 시동이 꺼지면서 내가 탄 버스가 급정거를 했다. 동시에 승객들의 몸이 와락 앞으로 쏠렸는데, 붙잡을 손잡이가 없던 나는 순식간에 좌석 위에서 버스 바닥을 향해 다이빙했다(그것도 오직 나만) 부끄럽고 창피했던 나머지 나는 엎어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혼자서 매우 자연스러운 척하며 목적지 아닌 정류장에 내려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두 무릎이 아파왔다. 집으로 돌아와 바지를 벗어보니 무릎에 커다랗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천연덕스럽게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한 기사 아저씨가 얼마나 얄밉던지, 다시 생각해 보니 하도 억울해서 한밤중 라면을 먹다 말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억울하다 못해 가슴이 미어졌다.

손쓸 틈 없이 바닥에 엎어진 나처럼 우리는 우리의 무방비한 마음을 한순간 슬픔에 내어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타인은 슬픔에 걸려 넘어진 우리에게 '안녕히'란 안부를 전할 뿐이다. 위로라는 손을 내밀어 일으켜줄 순 있지만 멍울을 아물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슬픔을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안전벨트를 안 맨 사람의 잘못이라며 내 등짝을 때렸다. 그 이후 나는 며칠 동안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안녕히'란 말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버스에서 '안녕히'는 아름답고 잔인하게 쓰이는 말이다. 버스라는 공간이 인연을 만듦과 동시에 인연을 끊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 만난 이와 곧 헤어질 연인처럼 어깨를 맞대고 앉아 말없이 창밖 풍경을 본다. 언젠가 내가 그를 먼저 떠나거나 그가 나를 두고 떠난다. 우연히 우리는 생의 한순간을 함께 보낸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단지 우연의 일치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 우리는 더 깊게 해석하고 감응한다. 나는 이따금 2년 전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아이를 떠올린다. 유난히 반짝이던 눈망울에 이끌려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서울대 병원에 간다고 했다. 그러곤 "누나, 위암에 걸리고 나서 위가 나빠지기만 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슬픔보다 기묘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때 나는 지인의 병문안을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의미의 안녕을 묻기 위해 한곳에서 만났다. 아이와 다정하게 손을 흔들며 나눈 안녕이 나에겐 얼마나 아프게 품어졌는지.

그럼에도 나는 자주 버스 안에서 기를 쓰고 살아가는 나를 발견한다. 쉴 새 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이 세계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손잡이를 붙잡고 두 다리로 열심히 버틴다. 요란한 엔진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내달리는 속도에 못 이겨 휘청거리기도 한다. 무릎에 피멍 들었다고 질질 짜면서도 나는 아침마다 버스에 오른다. 이 불안함으로부터 도망치면 우연히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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