얹힌 얼굴 /김희숙

얼굴은 존재의 증거다. 꽃에는 꽃마다의 낯빛이 있고, 동물은 특유의 꼴로 구별된다. 산과 들도 그들만의 생김새를 가졌다. 인파 중에서도 가까운 이의 실루엣은 도드라져 보이고, 자주 쓰는 물건은 무심결에도 집어 든다. 사람은 얼굴로 인연을 잇는다. 다가서면 얼굴이 마음에 담긴다. 대하는 시간이 늘수록 초면에서 구면으로 낯이 익어간다. 하지만 이별은 얼굴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사람 사이에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보다 슬픈 것은 상대의 기억에서 잊히는 것이라 했다.

돌 얼굴상이 바위 끝에 얹혔다. 돌탑을 쌓듯 포개 두었다. 눈길은 하늘을 향했고 햇살은 비스듬히 비춘다. 뒤통수가 편평한 돌판이다. 복잡한 감정을 숨긴 듯 밋밋하다. 그러나 앞면은 굵은 선들이 들고나며 온화함을 풍긴다. 눈썹은 눈비에 깎여 희미하고 코와 입술은 세월에 닳아 꺼져 있다. 검버섯 같은 이끼가 뒤덮여 본래의 색을 상상하기 어렵다. 받치는 바위는 성한 곳이 드물다. 지축이라도 흔들린다면 금세 무너져 내릴 듯이 금이 갔다. 균열 진 틈으로 파고드는 냉기를 품는다. 고라니나 멧돼지가 힐끗거리며 지나다니고, 억새와 청미래덩굴이 활개치는 외진 곳이다.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가파른 산비탈이 가로막아 먼발치서 건너다본다.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은 설매리석조불두상이다.

얼굴상과 바위는 한몸처럼 보이나 개별적이다. 서로를 묶어주는 끈도 없고, 맞물려 끼워두지도 않았다. 세찬 비바람이라도 분다면 얹힌 얼굴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위태롭다. 숨탄것들은 뼈와 뼈를 근육으로 잇고 살로 감싼 후 핏줄을 통과시켜 삶을 영위한다. 특히 머리와 몸통을 연결한 목 관절은 작은 충격에도 생명의 숨길이 끊어지고 되돌리기 어려워진다. 한번 어둠길로 꺾어 들면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빛의 세계와는 무작정 단절이다. 바위 끝에 얼굴상을 얹은 이는 마디마디를 엮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연약하고 헐거운지를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돌에 새겨진 자취들이 빛을 따라 은근하게 드러났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부처님상에 여러 얼굴이 겹친다. 시골집 벽걸이 사진을 지키던 할아버지의 근엄한 표정이 나타났다가,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찍으러 곁에 섰던 아버지의 굳은 얼굴빛도 스친다. 돌 얼굴에 어떤 이의 슬픔이 깃들어 있는 걸까. 마치 받치는 바위가 제단이고 얼굴상은 초상화처럼 보인다. 얼마 전, 장례식장 냉기 속에서 내려다보던 친구의 영정사진도 얹힌다.

그의 아내는 검은색 띠 두른 사각 틀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책임감이 강한 그는 항상 동료들이 나서기 전에 현장을 살피는 습관이 있었다. 사고가 나던 날에도 직원들이 작업 준비하며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앞서 둘러보러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살기 위해 갔던 일터가 죽음의 장”이 되었다. 50대 남자 A씨. 신문 기사에서는 그를 이렇게 지칭했다. 구체적이고 사실적 존재였던 그는 실체가 뚜렷하지 않으며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무명인으로 바뀌었다. 산업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뉴스는 개인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다. 40대 남자 작업자나 30대 여성 근로자 등으로 부르며 숫자로 기록한다. 그도 수많은 남자 A씨나 여자 B씨처럼 성과 이름이 지워졌다.

사진에 갇힌 그와 제단 앞에 선 사람들 가운데에 경계가 지어졌다. 국화꽃으로 둘러싸였을 뿐, 같은 자리에 함께 있는데도 꽃 울타리는 감히 넘을 수 없도록 높았다. 그는 평소처럼 눈가에 웃음기를 머금었으나 말 한마디 없이 오는 이들을 맞았다. 언제나 먼저 내밀던 손도 보이지 않았다. 50대 남자 A씨는 가족의 아침저녁을 지키는 가장이었고, 매일 밤 운동장을 같이 뛰던 이에게 절친이었으며, 가끔 술잔을 기울이던 후배들이 따르고 존경하는 선배였다. 조문객들은 절을 하고 돌아서며 옆 사람을 외면했다. 하릴없이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괜스레 바닥을 살피고 손을 매만지거나 헛기침하며 겉옷을 단단히 여몄다. 각자의 상실을 내비치지 않으려는 몸짓이었으리. 그 순간에 제단에 얹힌 얼굴을 저마다의 가슴으로 옮겼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애도의 방식은 제각각이다. 작가는 맺힌 응어리를 글로 풀어내고 화가는 아른거리는 이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작곡가는 부재의 침묵을 가락에 실어 연기처럼 날려 보낸다. 석공은 끌과 정을 든다. 천 년 전, 보고픈 이의 잔영이 눈앞에서 맴돌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면 어딘가에 얼굴 하나 새기고 싶은 마음이 일었을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떠난 이가 이 땅에서 살다 갔음을 알리며, 차츰 희미해져 가는 존재에 대한 기억을 붙잡아두고 싶었을 게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 제단화에 교황이나 추기경 심지어 본인의 얼굴을 그려 넣었듯이, 겉으로는 부처상을 팠으나 손끝에선 가슴에 얹혀 있던 얼굴을 끄집어내었겠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이를 추모하는 데는 바위에 전신을 새기거나 전후좌우에서 볼 수 있는 큼지막한 형상까지는 필요가 없다. 손으로 만지고 두 팔로 껴안을 수 있는 얼굴상이면 족하다.

갑자기 찾아온 고별에 당황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며 몸부림치다가도 삶은 눈물을 닦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를 알던 사람들도 그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수시로 잊는다. 그러다 문득, 어디선가 들린 단어 하나에 눈가가 촉촉해지고, 익숙한 냄새에 여며두었던 마음이 허물어지고 만다. 파릇한 상추가 밥상에 오른 날, 유난히 상추쌈을 좋아했던 얼굴이 떠올라 목울대 안쪽이 욱신거린다.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면 어울려 왁자하게 떠들던 추억이 불려 나와 소주잔을 흔든다.

오늘도 ‘건설 현장 붕괴 사고로 작업자 4명이 매몰됐으며 이 가운데 3명은 숨졌고 나머지 1명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누군가는 자식을 앞세웠고 미망인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킨 아들딸이 생겼는데도 노동자들의 참담한 죽음이 이름 한 줄 없이 세상 귀퉁이로 사라진다. 삶을 위해 일하러 간 곳에서 종종 떨어지고 끼이고 부딪히고 물체에 맞고 깔리고 뒤집혀 생사를 가른다. 집을 나선 식구들이 제때 돌아와 밥상에 마주 앉을 수 있을지를 염려해야 하는 하루하루다.

석공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돌 얼굴이 건재하는 한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친구의 눈빛은 멈추었으되 나를 향했었다. 석조불두상의 시선은 무심하되 자애롭다. 두 얼굴은 다른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어딘가 닮았다. 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이의 얼굴을 가슴에 얹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요, 붙잡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두 얼굴 앞에서 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함박웃음 짓던 얼굴을 보내고 닳아가는 얼굴상을 내 안으로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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