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순수이성 비판, 염세주의

24.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칸트, 헤겔과 달리 철저한 학구파가 아니었지만, 대학의 학술 전통 밖으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를 싫어한 반면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를 좋아했다. 광범위하게 문화를 흡수한 쇼펜하우어는 윤리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유독 국가주의에서 자유로웠던 만큼 자기 나라 독일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저술가들의 사상에도 정통했다. 그에게 의지는 형이상학적으로 근본이지만 윤리적으로 악이다. 이것은 염세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다.

그의 부모는 단치히의 유명한 상인 가문 출신이었는데 쇼펜하우어도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볼테르 추종자여서 영국을 자유와 지성의 나라로 동경했다. 단치히의 대다수 지도층 서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유도시의 독립을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극도로 반감을 품었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과 합병했을 때 분개한 나머지 적지 않은 금전 손실을 감수하면서 함부르크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와 1793년부터 1797년까지 살았다.

쇼펜하우어는 함부르크에서 이미 낭만주의자, 특히 티크, 노발리스, 호프만에게 영향을 받아 그리스 전통을 찬양하고 그리스도교의 히브리 문화적 요소를 나쁘게 평가하는 지적 성향을 몸에 익혔다. 또 다른 낭만주의자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영향으로 인도철학을 찬양하는 태도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성년이 되던 해, 괴팅겐대학교에 입학해 배우면서 칸트를 숭배했다. 2년 후에 베를린대학교로 가서 과학을 연구했으며 피히테의 강의를 수강했으나 경멸감만 가졌다.

그는 1848년의 혁명을 증오했으며 심령술과 마법을 믿었다. 그의 연구실에는 칸트의 흉상과 부처의 청동상이 있었고 일상생활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제외하면 칸트를 철저하게 모방하려고 애썼다.

쇼펜하우어는 1818년 주요 작품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판했다. 그의 체계는 칸트의 체계를 각색한 것이지만 피히테나 헤겔이 강조했던 것과 아주 다른 『순수이성 비판』의 양상을 강조한다. 그들은 사물 자체를 제거함에 따라 인식을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사물 자체를 존속시키면서 사물 자체를 의지와 동일시했다. 그는 나의 몸으로서 지각에 나타난 것이 현실적으로 의지라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중요한 두 가지는 염세주의와 의지가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학설이다. 그의 염세주의 사상은 모든 악이 설명되어 사라질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지 않고도 인간이 철학에 몰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쇼펜하우어는 최초로 의지의 학설을 순수한 형태로 공표했다. 이로써 일관성의 결여와 피상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은 역사 발전의 한 단계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

25. 니체

 

니체는 대학교수였지만 전통에 얽매여 학문에만 몰두한 철학자가 아니라 문학적 성향이 강했다. 윤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며 예리한 역사비평가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니체의 생애는 단순하다. 그는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단히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대학에 다닐 때 이미 뛰어난 고전 연구자이자 문헌학 연구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학위를 받기 전 1869년에 바젤대학의 문헌학 교수직을 제의받고 수락했다. 하지만 병으로 1879년 은퇴했다.

이후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요양하다가 1888년에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는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되어 찬양하다가 다투기도 했다. 니체는 바그너를 비난하다 못해 그가 유대인이라고 고발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니체의 사상은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타난 바그너의 견해와 흡사했다.

니체의 초인은 그리스어를 안다는 사실을 빼면 지크프리트와 유사하다. 니체는 낭만주의자를 비판했다. 니체의 사고방식은 그리스의 헬레니즘 전통에 속했지만, 오르페우스교의 신비적 요소는 포함하지 않는다. 그는 피타고라스를 빼고 대체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칭송했는데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더욱 친근감을 표현했다. 소크라테스를 서민이라 칭하면서 민주주의와 도덕이라는 편견으로 아테네의 귀족층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비난한다. 니체는 칸트를 낮춰 평가하며 ‘루소의 작품에 등장하는 도덕적 광신자’라고 비웃는다.

니체는 본질적으로 책을 좋아했으며 당대를 지배한 정치, 윤리적 경향에 의식적으로 반대한 철학자였다. 그는 여성을 경멸했고 그리스도교를 비판했다. 그는 유사 예언서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지금까지 여자들과 우정을 나누기 힘들며 여자들은 아직도 고양이나 새나 잘해야 암소와 같은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이유는 ‘노예 도덕’을 조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논증과 프랑스혁명에 앞장선 계몽철학자들의 논증을 대조해 보면 아주 흥미롭다. 계몽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참이 아니고 그리스도교가 신의 의지에 복종하라고 가르치는 반면, 자신을 존중하는 인간은 더 높은 권능 앞에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그리스도 교회는 전제 군주와 동맹을 맺어서 민주주의의 적을 도와 자유를 부정하고 이어서 가난한 자의 고혈을 짜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형이상학적 진리에 관심이 없으므로 사실상 종교는 모두 거짓이라고 확신한 니체는 모든 종교를 전적으로 사회에 미치는 효과로 판단한다. 니체가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비난한 까닭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제러미 벤담, 공리주의, 제임스 밀, 존 스튜어트 밀

26. 공리주의

 

‘철학적 공리주의자들’의 지도자로 누구나 인정한 제러미 벤담은 사람들이 급진주의 운동의 수장으로 기대할 전형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1748년에 태어났고 1808년까지 급진주의자가 아니었다. 벤담의 주의 관심사는 법률 이론이었고 엘베시우스와 베카리아를 제일 중요한 선배로 인정했다.

벤담의 철학은 두 가지 원리에 근거하는데, 하나는 ‘연합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최대 행복 원리’다. 1749년에 하틀리는 관념 연합 원리를 역설했다. 하틀리 이전에도 관념들의 연합이 일어난다는 점이 인정되었지만 로크는 관념들의 연합을 사소한 오류의 원천으로 여겼을 따름이다. 벤담은 하틀리를 추종하여 관념 연합 원리를 심리학의 기본 원리로 삼았다. 그는 관념과 언어의 연합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관념과 관념의 연합도 인정한다. 요컨대 벤담의 학설은 더 현대적인 파블로프의 실험에 근거한 ‘조건반사’ 이론 같은 주장이다. 한 가지 차이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가 생리적으로 일어나는 반면 관념들의 연합은 순수하게 심리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파블로프의 실험 결과는 행동주의자의 경우처럼 유물론적 설명이 가능하지만, 관념들의 연합은 오히려 심리학이 생리학과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벤담은 선이란 쾌락이거나 행복이고 악은 고통이라고 주장했는데, 쾌락과 행복을 동의어로 사용했다. 공리주의라고 부르는 이러한 학설에 새로운 점은 아무것도 없다.

공리주의는 일찍이 1725년에 허치슨이 주창한 학설이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프리스틀리의 학설이라고 하지만 정작 프리스틀리는 공리주의를 특별히 주장하지 않았다. 사실 공리주의는 로크의 사상에 들어 있다. 벤담의 장점은 공리주의 학설이 아니라 다양한 실천 문제에 왕성하게 적용한 데 있다.

선은 일반적 행복일 뿐만 아니라 개인이 각자 언제나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추구한다고 벤담은 주장한다. 벤담의 주장에 따르면 민법은 생존, 부, 안전, 평등을 폭표로 한다. 벤담의 이상은 에피쿠로스와 마찬가지로 자유가 아니라 안전이었다.

벤담이 점차 급진주의로 기운 원천은 두 가지다. 하나는 쾌락과 고통의 계산에서 연역적으로 추론되는 평등의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을 그가 이해한 이성의 중재에 맡기려는 불굴의 결심이다. 평등을 찬미하는 벤담은 일찍이 재산분할에 반대했다. 나중에 군주제와 세습 귀족정치에 반대하고 여성의 투표권까지 인정하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벤담은 제임스 밀의 영향으로 실용 정치에 가담했다. 제임스 밀은 벤담처럼 쾌락이 유일한 선이고 고통은 유일한 악이라고 보았다. 제임스 밀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은 1806년에 태어났으며 1873년 죽을 때까지 벤담주의 학설의 과격한 면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19세기 중반 내내 벤담주의자들이 영국의 법 제정과 정책에 미친 영향력은 정서적인 면에 전혀 호소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두드러졌다.

 

벤담은 일반적 행복이 최고선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다양한 논증을 내놓았다.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은 과도기 학파로서 역할을 다했다. 그들의 철학 체계는 한층 중요한 학설, 다시 말해 진화론과 사회주의가 출현하도록 자극한 원인이 되었다.

 

카를 마르크스, 유물론, 공산당 선언, 헤겔 변증법

27.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1818년에 성 암브로시우스의 출생지인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트리어는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독일 어느 지역보다 세계시민주의적 사고방식이 지배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랍비였지만, 마르크스가 어렸을 때 부모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마르크스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귀족의 딸과 결혼하여 일생 서로 헌신하며 살았다. 대학에서는 그때까지 유행하던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헤겔의 관념론에 반발한 포이어바흐가 제시한 유물론의 영향도 받았다. 신문기고가로서 활동했으나 그가 편집에 참여한 『라인 신문』은 논조가 과격하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발행이 금지되었다.

이후 1843년에 사회주의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고, 멘체스터의 면방직 공장 지배인이던 엥겔스를 만났다. 엥겔스를 통해 마르크스는 영국의 노동 사정과 경제 상황을 알게 되면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과 독일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평범한 사람과 달리 국제적 교양을 갖추었다. 그는 서유럽에 대해 민족적 편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동유럽 슬라브족에 대해서는 경멸조로 말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혁명과 독일혁명에 가담했으나 혁명이 실패하면서 1849년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벤담이나 제임스 밀과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으며 언제나 과학적으로 연구하겠다는 의향을 나타냈다. 그의 경제학은 원동력만 변화시킨 영국 고전 경제학의 산물이다. 그는 청년기인 1848년에 쓴 『공산당 선언』에서 밀턴이 살았던 17세기에 자유주의가 그랬듯, 신혁명 운동에 적합한 불같은 열정을 드러냈다.

마르크스는 자칭 유물론자였지만 18세기 프랑스의 기계적 유물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헤겔 철학의 영향으로 형성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전통적 유물론과 달랐으며 오늘날 도구주의라 불리는 사상에 더 가까웠다.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은 헤겔과 영국 고전 경제학이 뒤섞여 형성된다. 그의 변증법은 법칙의 불가피성을 제외하면 앞서 말한 헤겔 변증법의 특성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 추진력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역사 철학을 헤겔의 변증법에 제시된 틀에 맞추었지만 사실상 그는 한 종류의 삼자 관계에만 관심을 가졌다. 지주가 대표하는 봉건제, 산업 사회의 고용주가 대표하는 자본제, 임금 노동자가 대표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관계였다. 헤겔은 국가를 변증법적 운동의 매개체라고 생각했지만 마르크스는 계급으로 대체했다. 그는 언제나 사회주의 체제를 선호하거나 임금 노동자의 편을 들기 위해 윤리적이거나 인도주의적 근거를 모두 부인했다.

마르크스가 명성을 얻게 된 내력은 독특했다. 그의 조국에서는 사회민주당의 정강이 마르크스 학설에서 영감을 얻어 작성되고 사회만주당은 꾸준히 성장하여 1912년 보틍 선거에서 총 득표의 3분의 1을 확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회민주당이 한동안 집권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는 사회민주당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의 열렬한 추종자들이 정권을 잡았다. 서유럽에서 일어난 대규모 노동자 계급 운동은 마르크스의 신조를 따르지 않았다. 영국 노동당은 때때로 마르크스 진영으로 기우는 것 같았지만 경험주의 색채를 띤 사회주의를 고수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영국과 미국 양국의 수많은 지식인에게 끼친 영향은 컸다.

 

베르그송, 므두셀라에게 돌아가라, 폭력론, 시간과 자유의지

28. 베르그송

 

앙리 베르그송은 금세기를 선도한 프랑스 철학자다. 그는 윌리엄 제임스와 화이트헤드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프랑스 사상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노동조합 지상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폭력론』의 저자인 소렐은 명확한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혁명적 노동 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베르그송의 비합리주의를 이용했다. 하지만 소렐은 노동조합 지상주의를 포기하고 왕정주의자가 되어 군주제 복고 운동을 펼쳤다. 베르그송 철학의 주된 효과는 보수주의 운동으로 나타나서 비시에서 정점에 달한 운동과도 쉽게 어울렸다. 베르그송의 비합리주의는 정치와 무관한 영역, 예컨대 버나스 쇼에게서 더 큰 호감을 얻었으며, 그의 『므두셀라에게 돌아가라』는 순수하게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사상을 구현한 작품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대부분 이전과 달리 이원론 체계에 속한다. 그에게 세계는 공통점이 없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한편에는 생명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성이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스스로 운동하지 못하는 사물이 있다.

지성과 본능의 구별은 베르그송 철학의 근본인데 많은 부분이 일종의 샌드퍼드와 머턴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본능은 착한 놈이고 지성은 나쁜 놈이라는 식이다. 최고 상태에 이른 본능을 직관이라 부른다.

지성이 공간과 관계하듯 본능이나 직관은 시간과 관계한다. 베르그송 철학의 두드러진 특색 가운데 하나는 대부분의 저술가들과 달리 시간과 공간을 전혀 다르게 본다는 점이다. 공간의 특징은 흐름의 분할에서 유래하며 현실적으로 환상에 지나지 않고, 어떤 지점까지 실천적으로 유용하지만 이론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길로 이끈다. 반대로 시간은 생명이나 정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특징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수학적 시간은 현실적으로 공간 형식으로 표현된 시간이고 생명의 본질에 속하는 시간은 지속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지속은 근본 개념으로서 초기 저작 『시간과 자유의지』에 이미 등장한다.

베르그송의 지속 이론은 기억 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속 이론에 따르면 기억된 사물은 기억 속에 살아남기 때문에 현재의 사물과 상호 침투한다.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는 서로 상대의 외부에 있지 않고, 의식의 통일 속에 혼합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행동이 존재를 구성하지만, 수학적 시간은 단지 수동적 대상으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무다. 또 과거는 더는 활동하지 않는 존재이고, 현재는 활동하는 존재다.

상상력이 넘치는 베르그송의 세계관은 시적 영작으로 평가되며 대체로 증명될 가능성도 반증될 가능성도 없다. 생명을 셰익스피어는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하고, 셸리는 형형색색의 유리로 꾸민 둥근 천장과 같다고 말하며 베르그송은 포탄이 터지면서 파편이 다시 포탄이 되어 파열되는 모양에 비유한다.

 

베르그송이 세계에 실현되기를 소망한 선은 활동을 위한 활동이다. 그가 ‘꿈꾸기’라고 부른 모든 순수한 관조에 경의를 표하지 않고 정적이고 플라톤적이며 수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지성적인 것이라고 선언한다. 활동이 성취해야 할 목적에 대한 예견을 욕구하는 사람들은 예견된 목적이 전혀 새롭지 않은데 욕구도 기억처럼 욕구의 대상과 동실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활동 속에서 운명적으로 맹목적 본능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