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단상] 붉은 위험 속, 층과 층 사이에서

2026-05-29 (금) 12:00:00 이희숙 아동문학가
알람이 울린다. 큰 사이렌 소리에 이어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진다.

“주민 여러분, 화재 경보입니다! 비상계단을 이용해 대피해 주십시오.”

한국을 한 달 동안 방문하며 숙소를 정하는데 여러 상황을 고려했다. 우선순위가 남편이 투석 받기에 편리한 곳이어야 했다. 예약한 신장내과 투석센터와 같은 건물 위층에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투석센터는 2층, 숙소는 8층이었다. 추운 날씨이지만 엘리베이터만 타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내려가니 간소하고 시간까지 단축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듯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믿고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시내 골목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줄어들고 저녁 공기는 조용하게 흘렀다. 그 고요함 속에서 우리 가족은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틈을 비집고 요란한 소리가 들어오며 평온을 깨뜨렸다. 화재 경보음이었다. 이어서 울려 퍼진 대피 방송은 상황을 단숨에 아수라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외투 하나만 급히 걸쳤다. 가방을 집어 들고나니 여권이 든 다른 가방이 떠올랐다. 다시 침실로 들어가 가방을 뒤져야 했다. 딸도 옆에서 서둘러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엄마, 무얼 가지고 나가야지?” 짧은 질문 안에는 불안이 함께 담겨 있었다. 딸은 노트북을 배낭에 넣었다. 각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품에 안고 문을 나섰다.

계단 앞에 서자 숨이 탁 막혔다. 남편부터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거동이 불편한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가 서로를 놓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한 채 한 계단, 또 한 계단.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마음은 더디게 느껴졌다. 경보음은 아직 머리 위에서 울리고 있는데, 우리의 발걸음은 여전히 계단 위에 있었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처럼 길었다. 내려갈수록 불안은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당연하게 여기던 하루의 안전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1층 대피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낯선 얼굴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급히 내려온 흔적을 몸에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제야 이웃에 대한 물음표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고, 한참 후에야 우리 모습이 보였다. 양말 신을 겨를 없이 슬리퍼만 걸친 탓에 맨발이 차갑게 느껴졌다. 딸이 민첩하게 편의점에서 양말을 사 왔다. 더불어 들고 온 과자 봉지에 ‘오 마이 갓 (gat)’이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닌가.

한 중년 여인은 담요로 무언가를 꼭 감싸 안고 있었다. 반려견이었다. 다른 물건보다 소중히 선택받은 작은 몸이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 위급한 순간, 그 사람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그 품에 안긴 개가 대신 말해 주는 듯했다.

위기의 순간은 사람의 민낯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마음을 또렷하게 보여 주었다. 누군가는 개를 안고, 누군가는 질문을 던지며, 누군가는 말없이 서 있었다.

소란은 허무하게 끝났다. 알람의 오작동이라는 한마디로 긴 밤의 긴장은 풀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숨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사람들은 하나둘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붉은 위험 속, 층과 층 사이에서 읊던 간절함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오늘도 안전하게!

<이희숙 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