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 철학자들, 로저 베이컨,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브 오컴
14.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스콜라 철학자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은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자들보다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켰다. 두 수도회의 경쟁이 치열하여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은 성 토마스의 권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철학자 가운데 로저 베이컨,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브 오컴이 중요하다.
로저 베이컨은 수학과 과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만물 박사였다. 베이컨은 이단이나 마법과 관련된 의혹으로 끊임없이 말썽을 빚었다. 잉글랜드의 로마 교황청 특사 기 드 풀크는 교황을 위해 베이컨에게 철학책을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세 권의 책 『대저작』, 『소저작』, 『제3저작』을 썼다. 1271년 그는 『철학 연구 개설』이라는 책으로 성직자들의 무지를 맹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그는 14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백과사전적으로 지식을 소유했으나 체계성은 없었다. 당대 철학자들과 달리 실험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으며 무지개 이론으로 실험의 중요한 가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지리에 관한 좋은 글을 남겼는데 콜럼버스는 베이컨의 지리 관련 저작에 영향을 받았다. 베이컨은 훌륭한 수학자로서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원론』 6권과 9권을 인용하고 아랍의 자료를 추적하여 원근법도 다루었다.
둔스 스코투스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아퀴나스의 논쟁을 이어갔다. 그는 옥스퍼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자가 되었고 파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성 토마스에 맞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지지했는데 파리대학이 이에 동의하는 입장을 표했고 결국 가톨릭교회 전체가 동의했다.
둔스 스코투스는 온건한 실재론자였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었으며 펠라기우스 사상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존재가 본질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고 주로 증거, 곧 증명 절차를 밟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물에 흥미를 느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자는 대부분 아퀴나스보다 둔스 스코투스를 추종했다. ‘개별화의 원리’는 스콜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윌리엄 오브 오컴은 성 토마스 이후 가장 중요한 스콜라 철학자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파리대학으로 가서 처음에 둔스 스코투스의 제자가 되어 공부했으나 나중에 그의 경쟁자로 성장했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교황 요한네스 22세가 벌인 청빈 논쟁에 연루되었다. 교황은 영성 수련자들을 박해했는데 그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총회장인 미켈레 디 체세나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모든 스콜라 철학자들 가운데 오컴은 루터가 좋아한 유일한 철학자였다.
오컴의 순수 철학을 다룬 책은 무디의 『오컴의 논리학』이다. 오컴은 스콜라 철학을 와해시킨 인물, 데카르트의 선구자나 칸트의 선구자, 근대 철학자 가운데 특정한 주석가가 좋아하는 철학자라면 누구든 그 철학자의 선구자로 평가되었다.
15세기의 유명론자들은 오컴을 자신들이 속한 학파의 창시자로 우러러보았다. 그는 스코투스의 추종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오해했으며 이러한 오해의 일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에서 기인하고, 일부는 아비세나에서 비롯되지만 일부는 더 이른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관해 포르피리오스가 쓴 논문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컴에게 논리학은 자연 철학을 위한 도구였다. 형이상학에서 독립할 수 있는 학문 분야라 여겼다. 논리학은 추론적 과학에 대한 분석인데 과학은 사물과 관련이 있지만, 논리학은 관련이 없다. 사물은 모두 개체이지만 명사 가운데 보편자도 있다. 논리학은 보편자를 다루지만 과학은 보편자에 대해 논하지 않고 보편개념을 사용한다. 논리학은 명사나 개념에 관심이 있는데 그것을 물리 상태로서 다루지 않고 의미를 지닌 것으로 다룬다.
오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추종자들이 우선 이해할 수 없는 사물과 지성이 없는 인간을 가정하고서 지식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무한한 신의 빛을 추가함으로써 오류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의 의견은 아퀴나스와 같지만,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아퀴나스는 근본적으로 신학자였던 반면 오컴은 논리학에 관한 한 세속 철학자였다. 학문 연구에 있어서 오컴은 개체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연구자, 행성 이론을 탐구했던 직속 후계자 니콜 오렘에게 자신감과 확신을 주었다. 오렘은 어느 정도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선구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지동설과 천동설을 모두 제안했으며 각 이론이 당시 알려진 사실을 모두 설명해 줄 것이기 때문에 두 이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방법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윌리엄 오브 오컴 이후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는 더 나오지 않았다.
보니파키우스, 그레고리우스 11세, 위클리프
15. 교황권의 쇠락
가톨릭교는 14세기에 붕괴하기 시작했는데 철학보다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계가 더 깊었다. 비잔틴 제국은 라틴족에게 정복당했다. 이때 비잔틴 제국의 국교는 그리스 종교가 아닌 가톨릭교였다. 1261년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교황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고 1438년에 교황은 동로마 교회와 페라라에서 연합을 선포했는데도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지 못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부유한 상인 계급의 출현과 속인 계급의 지식 증대였다. 두 가지 현상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기 시작해 16세기 중엽까지 서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이탈리아에서 더 앞서 나갔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아나니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에 있을 당시 교황을 대신하여 반란을 일으킨 봉신들에 맞서 헨리 3세를 지지하다가 런던탑에 갇힌 적이 있었으나 에드워드 1세가 되는 왕의 아들이 1267년에 구출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이미 강력한 프랑스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고 보니파키우스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프랑스계 추기경들이 반대했다. 보니파키우스와 프랑스 왕 사이에 다툼이 격화되면서 필리프 왕은 총 공의회에서 폐위시킬 목적으로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교황은 죽었다.
추기경들은 1305년에 보르도의 대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하고 클레멘스 5세라고 불렀다. 그는 가스코뉴 사람으로서 교회 내에서 프랑스계 파벌을 시종일관 대변했다.
당시 주교들은 교황에게 완전히 복종했다. 실제로 교황이 임명하는 주교의 비율도 점점 높아졌다. 여러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꼭 같이 복종했지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여전히 확고한 독립 정신을 지켰다.
교황의 지배에 맞선 반발은 지역에 따라 갖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때로는 군국주의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일어났고, 때로는 교황 궁정의 타락과 세속화에 대한 청교도적 두려움과 결합하여 나타났다. 로마 내부의 반발은 의고주의 경향의 민주정치와 결합하면서 일어났다. 클레멘스 6세 때 로마는 비범한 지도자 콜라 디 리엔치의 영도 아래 교황이 부재 하는 동안 자유를 누렸다, 로마는 교황뿐만 아니라 지방 귀족에게도 시달렸는데 지방 귀족은 10세기에 동란을 일으켜 교황권의 위상을 떨어뜨린 다음에도 계속 소동을 일으켰다.
교황청이 전체 가톨릭교회의 수장 자리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려면 스스로 프랑스에 예속된 처지에서 벗어나 로마로 귀환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우르바누스 5세는 1367년에 로마로 갔다. 그러나 그는 너무 복잡한 이탈리아의 정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기 직전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왔다. 다음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전임교황보다 더 단호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격렬한 교황 반대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로마로 돌아가 프랑스계 추기경과 대립함으로써 사태 수습을 위해 교황의 권한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가 죽고 나자 추기경단 내에서 프랑스계 파벌과 로마계 파벌의 갈등이 심해져 화해할 수 없었다.
이로써 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되었고 분열은 약 40년간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아비뇽의 교황을 승인했고 프랑스의 적대국은 로마의 교황을 승인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적국이고,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적국이었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는 아비뇽의 교황을 승인했다. 각 교황은 자기 파벌에 속한 주교들 가운데 추기경을 뽑았고 어느 쪽이든 교황이 죽고 나면 추기경은 신속하게 다른 교황을 선출했다.
위클리프의 삶과 교리는 14세기에 교황권의 권위가 얼마나 약했는지 보여준다. 그는 초기 스콜라 철학자들과 달리 수도회 소속의 수도자나 탁발 수도자가 아니라 교구 사제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평판이 아주 좋았으며 1372년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의 배일리얼 칼리지 교양학부 학생감을 지내기도 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출신의 중요한 스콜라 철학자들 가운데 마지막 인물이었다. 철학자로서 그는 진보주의 성향은 아니었다. 위클리프는 왕은 신의 대리자이므로 주교들은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일어나자 그는 이전보다 더 나아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낙인찍고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를 받아들임으로써 이후 모든 교황은 배교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후일 콘스탄츠 공의회는 위클리프를 단죄하고 유골을 파내 불태우게 했다. 위클리프의 추종자들도 박해를 받은 후 사라졌다.
15세기에 여러 가지 다른 원인이 교황 제도의 쇠퇴에 작용하면서 정치와 문화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근대과학,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크, 헤겔, 스피노자, 칸트
제3권 근현대 철학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까지
일반적 특징
서양철학사에서 근대적 사고방식의 특징은 교회의 권위가 낮아졌다는 것과 과학의 권위가 높아진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근대 문화는 성직자 계급보다 속인 계급의 삶과 관계가 더 깊다. 문화를 조정하는 정부 권력 기구가 교회를 대체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국가 권력은 처음에 왕의 수중에 있다가 고대 그리스의 경우처럼 왕정이 쇠퇴하고 점차 민주제나 참주제가 등장한다.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 이후 현대적 민주주의가 정치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사회주의는 1917년 최초로 정권을 획득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에서 과학의 역할은 미미했다. 과학이 최초로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담은 서적의 출간이었다. 이론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실용과학은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로 처음부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15세기에 이탈리아의 무정부 상태를 배경으로 마키아벨리의 학설이 출현했다. 동시에 정신의 족쇄를 벗어던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예술과 문학의 놀라운 천재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사회는 불안정했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이탈리아가 스페인에 정복당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은 둘 다 종지부를 찍었다.
근대철학은 대체로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로 기울었다. 주관주의적 경향은 스피노자의 경우에 두드러지지 않지만, 라이프니츠의 창 없는 단자들에 다시 등장한다. 객관적 기질의 로크는 탐탁잖게 생각하면서도 주관주의적 학설에 빠져들었다. 버클리는 물질을 없앤 다음 오직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완전한 주관주의에서 벗어나지만, 후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비논리적 견해라고 평했다. 흄에서 경험주의 철학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고 수용할 수도 없는 회의주의의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다. 칸트와 피히테는 학설뿐 아니라 기질에서도 주관주의적 특징을 나타냈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영향으로 주관주의에서 자신을 구제했다. 루소와 낭만주의 인식론에서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주관성을 확장하여 논리적 흐름에 따라 바쿠닌의 사상처럼 완전한 무정부주의에 이르러 종말을 맞았다.
르네상스,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교황령, 나폴리
2.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다음에 이탈리아는 대체로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1494년 프랑스 왕인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유력한 다섯 도시가 있었다. 밀라노와 베네치아. 피렌체, 교황령, 나폴리였다. 밀라노는 비스콘티 가문이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 가문의 권력은 금권에서 비롯되었다. 밀라노는 1535년에 황체 카를 5세의 치하로 합병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탈리아의 정세와 다소 동떨어져 초기 몇 세기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베네치아는 야만족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었으며 처음부터 자진해서 동로마 황제에게 예속되었다.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뒤 무역이 호전되기는 했지만 1509년 캉브레 동맹, 바로 강대국들의 연합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베네치아는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튀르크인의 세력 증대와 희망봉 항로의 발견으로 베네치아는 황폐해졌는데 폐허로 변하는 과정은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의 독립을 빼앗는 날까지 지난하게 이어졌다.
베네치아의 외교 활동은 극도의 차별성을 갖추어 빈틈이 없었으며 베네치아 외교관의 보고서는 견식이 높은 데다 사태를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다. 랑케 이후 베네치아의 외교 보고서는 역사가가 다루는 사건에 대한 자료와 지식을 제공하는 믿을만한 사료로 활용되었다.
피렌체는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앞선 도시로 르네상스 운동의 중요한 원천이자 본거지였다. 13세기, 피렌체는 갈등을 빚는 세 계급이 존재했다. 귀족 계급, 부유한 상인 계급, 평민 계급이었다. 귀족 계급은 황제파, 다른 두 계급은 교황파였다. 황제파는 정치적으로 패배했고 14세기 동안 평민 계급은 부유한 상인보다 나은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 세 계급 간의 갈등은 안정된 민주주의로 이행되지 않고 그리스인이 ‘참주 정치’라 불렀을 만한 정치 형태로 차츰 타락했다. 피렌체 최후의 통치자가 된 메디치 가문은 민주주의 편의 정치적 실권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에서 발군의 업적을 남긴 첫 인물이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주교가 된 로렌초의 아들은 1513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레오 10세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토스카나 대공이라는 칭호 아래서 1737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피렌체는 당대 아탈리아의 다른 지역처럼 빈곤해져 더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르네상스기 인문주의를 지지한 최초의 교황, 니콜라우스 5세는 학식이 풍부한 학자들에게 대가를 일절 바라지 않고 교황청 안에 연구실까지 내주었다. 그들 가운데 로렌초 발라는 에피쿠로스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가 위조라고 밝힌 인물로서 불가타 성서의 문체를 조롱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이단으로 고발했는데도 로마 교황의 서기관이 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으로서 살기보다 자신과 가족의 부를 축적하고 지위를 높이는 데 일생을 바쳤다. 뒤를 이은 율리우스 2세는 경건한 신앙심의 측면에서 비범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전임 교황보다 추문은 훨씬 적었다. 레오 10세의 치하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르네상스가 교황들이 펼친 가톨릭교도답지 않은 정책이 빚어낸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495년 이후 프랑스의 세 왕이 나폴리를 정복하려 공을 들였다. 결국, 아라곤의 페르디난도가 나폴리를 차지했다. 샤를 8세, 루이 12세, 푸랑수아 1세 같은 왕들이 모두 법적 근거는 충분하지 않지만 밀라노와 나폴리에 대한 소유건을 주장한 끝에 모두 이탈리아를 침략해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하지만 모두 스페인에 패했다.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자 프랑스에 우호적이며 반종교개혁의 장애 요인이었던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카를 5세는 1527년에 대규모 개신교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이로써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운동도 종말을 맞았다.
르네상스는 대중의 지지를 얻은 운동은 아니었다. 소수 학자와 예술가들이 참여한 운동으로서 자유 사상을 지지한 후원자들 특히 메디치 가문과 인문주의에 경도된 교황이 장려한 지적 흐름에 속했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는 14세기에 살았으나 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르네상스기에 속한 인물이다.
도덕의 영역 바깥에서 보면 르네상스 운동은 여러 면에서 탁월한 장점이 있다. 건축과 회화, 시 분야에서 명성을 유지했는데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같은 위대한 인물을 배출했다. 르네상스 운동은 교육받은 지식인을 중세 문화의 편협성에서 해방시켰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메디치 가문
3. 마키아벨리
르네상스기 정치철학 분야에서 명성을 누린 사람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출신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였다. 그가 20대였을 때 사보나롤라가 피렌체를 통치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호의를 얻으려는 희망으로 『군주론』을 로렌초 2세에게 바쳤다. 『군주론』은 공국들이 어떻게 정권을 쟁취하고 유지하며 잃었는지를 역사와 당대에 일어난 사건들에서 찾아내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종교가 국가 안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결속과 유대감의 형성에 필요해서다. 마키아벨리가 당대 교회를 비판한 핵심은 둘로 압축된다. 하나는 교회가 악행으로 종교적 신앙을 훼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권이 거시서 비롯된 정책과 맞물려 이탈리아의 통일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군주론』은 이탈리아를 야만족의 악취 나는 지배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메디치 가문에 요구하는 웅변적 호소로 끝난다. 『군주론』은 통치자의 행동에 대해 기존 도덕을 명백히 거부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와 관련된 어떤 논증이든 결코 그리스도교나 성경에 근거해 풀어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세의 저술가들은 합법적 권력이라는 개념을 마음에 품었는데 합법적 권력은 교황과 황제의 권력이나 거기서 도출된 권력이다. 북부 유럽의 저술가들은 로크 같은 최근에 속한 저술가조차 에덴동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데 거기서 일어난 일에서 어떤 종류의 권력이 ‘합법적’이라는 증명을 도출해도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권력론이 11, 12, 13세기에 걸쳐 교회 권력을 증대시키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성공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