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페리클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낙시고라스
7. 아테네의 문화
아테네가 펼쳐나간 위대한 여정은 두 차례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시작된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에게 대항하여 거둔 승리와 연합한 그리스 함대가 아테네의 주도 아래 다리우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에게 대항하여 거둔 승리로 아테네는 무소불위의 특전을 누리게 되었다. 그 후 부강한 나라가 되었으며 페리클레스의 영도 아래 번영을 누렸다.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선거권에 힘입어 기원전 430년 실각할 때까지 30년 동안 아테네를 지배했다. 페리클레스 시대는 아테네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웠다.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해 싸웠던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비극의 막을 열었다. 『페르시아인』이란 비극은 크세르크세스의 패배를 다루고 있다. 소포클레스가 바로 그 뒤를 잇고 에우리피데스가 다시 뒤를 이었다.
아테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점령당하면서 아크로폴리스의 신전들이 화재로 파괴되었지만, 페리클레스는 신전들을 재건하는데 헌신했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옛터로 남아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깊은 인상을 주는 다른 신전들은 바로 페리클레스에 의해 복원되었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이었으나 아테네에서 살았으며 아테네 제국에 고무되어 아테네의 관점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서술했다.
기원전 430년경 아테네의 규모가 가장 컸을 때 노예를 포함한 인구가 약 23만 명으로 추산된다.
아테네는 위대한 두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름을 남김으로써 철학에 기여했다, 소크라테스는 청년 시절과 장년 시절 후반기를 페리클레스의 통치 아래서 보냈다. 논쟁술을 배우고 싶은 젊은이들은 소피스트들을 찾아다녔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귀족 가문 출신인 데다 전쟁과 민주정치가 상류층의 부와 안전을 깨뜨리기 이전 시대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황금시대를 출현시킨 힘의 균형은 위태로웠고 안팎으로 위협을 받았다. 안에서는 민주정치가 밖에서는 스파르타가 노렸다. 역사가 시작된 초기의 아티카는 자급자족하는 작은 농업지역이었다. 아티카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들처럼 호메로스 시대에는 군주제였으나 정권은 귀족계급의 수중에 있었고 귀족은 지방의 농부들과 도시의 장인을 억압했다. 페리클레스 생애 말년, 귀족들의 세력과 스파르타와의 갈등으로 인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지고 아테네는 완패했다.
정치체제가 붕괴에도 아테네의 특권은 유지되어 천 년간 철학의 중심지였다. 알렉산드리아가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아테네를 능가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활약으로 철학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했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는 다른 학파보다 오래 살아남아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도 200년간 이교 사상이 허용되었다. 기원후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편협한 종교적 신앙심 때문에 아카데메이아를 폐쇄하고 나서 암흑시대는 불시에 유럽 전역에 들이닥쳤다.
8. 아낙시고라스
아낙시고라스는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에 필적하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철학자다. 그는 이오니아인으로서 이오니아의 과학과 철학 전통을 이어받았다. 아테네인에게 처음 철학을 소개한 인물이자 물리적 변화의 제일 원인이 정신이라고 제안한 첫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기원전 500년경 이오니아의 클라조메나이에서 태어났지만 대략 기원전 462년부터 432년까지 30년간 아테네에서 살았다.
아낙시고라스는 만물은 무한하게 나뉠 수 있으며 물질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네 원소의 일부를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사물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원소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만물은 얼마간의 불을 포함하지만 불 원소의 양이 더 많은 경우에만 불이라고 부른다. 그는 엠페도클레스처럼 진공의 존재를 부정하며 클렙시드라나 부풀어 오른 가죽 부대 속에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공기가 들어있다고 말한다.
그는 선대철학자들과 달리 정신이 생물의 일부로 들어가 죽은 물질과 구별시켜 주는 실체라 생각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정신은 모든 운동의 근원이다. 정신은 한결같아서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겉으로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해 보이지만 인간이 손을 사용하기에 생긴 결과다.
아낙시고라스는 과학 분야에서 공적을 남겼다. 그는 최초로 달이 반사광으로 빛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일식을 정확히 예측하는 이론을 세웠으며 달이 태양보다 아래쪽에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아낙시고라스는 아낙시메네스학파라고 전해지며 확실히 이오니아의 합리주의 전통과 과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원자론,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목적인
9. 원자론자들
원자론의 창시자는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두 사람이었다. 레우키포스는 기원전 440년경에 활약했다고 전해지며 밀레토스 출신으로서 역시 밀레토스에서 연상되는 합리적 과학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데모크리토스는 레우키포스보다 훨씬 명확하게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지식을 얻으려 남방과 동방의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했다.
두 사람은 만물이 원자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무한한 공간에는 위도 아래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영혼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운동을 바람이 없을 때 햇빛 속에 떠다니는 티끌의 운동에 비유했다. 원자론자들은 엄격한 결정론자로서 모든 일은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어떤 일이든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명백하게 부인했다.
원자론자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목적이나 ‘목적인(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동의 네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 목적이 있음으로써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므로 목적을 운동의 원인으로 보았다) 같은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
발생할 어떤 일의 ‘목적인’은 그 일이 발생시킬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다. 제빵사는 왜 빵을 굽는가? 사람들이 배가 고플 테니까. 철로는 왜 놓을까?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니까. 이러한 경우에 일어나는 사건은 그러한 사건이 이바지하는 목적으로 설명된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관해 “왜?”라고 질문할 때 둘 가운데 하나를 의미할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어떤 목적에 이바지했는가”를 뜻하거나 “이전에 주어진 어떤 조건이 이 사건을 야기했는가?”를 뜻한다.
앞 질문에 대한 답은 목적론적 설명, 혹은 목적인에 의한 설명이고, 나중 질문에 대한 답은 기계론적 설명이다. 기계론적 설명이 과학적 지식의 진보를 주도한 반면에 목적론적 설명은 그러지 못했다. 원자론자들은 기계론적 설명을 했고 기계론적 설명을 시도했다.
데모크리토스는 각 원자에는 공간이 없기에 관통되지도 분할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칼로 사과를 자를 때 사과에는 칼이 관통할 공간이 있어야 한다. 만일 사과에 공간이 없다면 사과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해서 물리적으로 분할되지 않을 것이다. 원자는 제각기 내부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서 사실상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라고 할 수 있다.
원자들이 유일하게 하는 건 운동하다가 서로 부딪치는 일이며 때로는 우연히 맞물릴 수 있는 모양이 되어 결합하기도 한다. 원자들의 모양은 여럿인데 불은 구형의 작은 원자들로 이루어지며 영혼도 그렇다. 원자들은 충돌하면서 소용돌이 운동을 하고 여기에서 물체들이 생겨나고 최후에는 세계가 형성된다.
사유도 일종의 운동이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것에 운동을 일으킬 수 있다. 지각과 사유는 신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지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감각의 지각과 지성의 지각이다. 지성의 지각은 지각되는 사물에 의존할 뿐이지만 감각의 지각은 감각에도 의존하므로 속기 쉽다. 데모크리토스는 로크처럼 따뜻함, 맛, 빛깔 같은 성질은 물체가 실제로 갖지 않고 우리의 감각기관에서 비롯되는 반면에 무게, 밀도, 굳기 같은 성질은 물체가 실제로 갖는다고 주장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철저한 유물론자였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모은 종교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낙사고라스가 운동의 근원으로 제시한 정신에 반대하는 논증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유쾌함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며 온화한 마음가짐과 지적 활동을 목표에 이르는 최선의 수단으로 여겼다. 그는 폭력과 정념이나 열정이 관련되면 모두 혐오했다. 특히 성욕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성적인 쾌락이 의식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우정의 가치는 인정했으나 여성을 혐오했으며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철학에 반대가 된다는 이유로 호감을 갖지 않았다.
데모크리토스는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고대 후기와 중세 사상을 타락시킨 특이한 결점을 보이지 않는 마지막 철학자다.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
10. 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이전의 위대한 개념 체계들은 기원전 5세기 후반 회의주의 운동에 직면했는데 이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한 인물이 바로 소피스트들의 수장 격인 프로타고라스다. ‘소피스트’란 말은 원래 나쁜 의미를 포함하지 않고 ‘교수’나 ‘교사’라는 말과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였다. 소피스트는 실생활에 유용한 지식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며 수업료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소피스트들은 사유재산을 소유한 사람이나 사유재산을 소유한 부모를 둔 사람들만 가르쳤다.
노예와 여자를 배제한 점에서 심각한 한계를 지녔으나 아테네 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체제보다도 더욱 민주적인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배심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행정관리는 추첨으로 선출되었으며 짧은 기간 직무를 이행했다.
아테네 역사에서 페리클레스 시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영국 역사에서 빅토리아 왕조 시대가 차지하는 비중과 유사하다. 아테네는 부유했고 잦은 전쟁으로 곤란을 겪지 않을 만큼 강했을 뿐만 아니라 귀족 계급이 다스리는 민주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프로타고라스는 기원전 500년경에 데모크리토스가 출생한 도시 압데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두 번 아테네를 방문했으며 두 번째 방문 시기가 기원전 432년보다 더 늦지는 않았다. 그는 기원전 444년에서 443년 사이에 그리스 남부의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인 투리에서 법전을 편찬했다.
그는 『신들에 관하여』라는 저술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습이 어떤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신들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얻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기 때문인데 신에 관한 주제는 모호하고 인생은 짧다.”
그는 주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 곧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한다는 척도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척도다”라는 학설로 주목받는다. 이것은 사람이 제각기 만물의 척도며 사람들의 의견이 다를 때 한 사람이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게 만드는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로타고라스의 학설은 본질적으로 회의주의이고 감각의 ‘속기 쉬운 성질’에 근거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성년기 삶을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를 두루 돌며 일종의 종신 강의 여행을 하며 보냈는데 실생활에 필요한 능력을 기르고 수준 놓은 정신 훈련을 받고 싶어 하는 자라면 누구든 수업료를 받고 가르쳤다.
기원전 5세기 동안 소피스트들이 변화를 일으키는데 어떤 역할을 했든 아테네인들은 무너져가는 정통 신앙을 우둔하고 잔혹하게 방어하려는 노력과 갈등을 빚으면서 청교도처럼 단순한 사람들에게 약삭빠르고 잔혹한 냉소주의자들로 변신했다.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맞서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을 이끌어 승리를 거두고 기원전 490년에는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다.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는 404년에 스파르타에 패배하고 399년에 소크라테스에게 선고된 사형을 집행한다.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 측면에서 더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으나 문화적 측면에서 확실한 최고 지위를 누리며 군림했다. 아테네의 문화적 지위는 그리스도교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유지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 역사 가운데 어떤 점은 플라톤이나 이후 전개된 모든 그리스 사상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최고 영예는 아테네인들에게 돌아갔는데 아테네가 마라톤 전투에서 당당히 승리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동안 아테네에는 비범한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 많았다. 위대한 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모두 기원전 5세기에 활동했다. 아이스킬로스는 마라톤 전투에 참가해 싸웠으며 살라미스 해전을 목도했다. 소포클레스는 여전히 정통 종교를 존중했으나 에우리피데스는 프로타고라스와 당대 자유 사상의 영향을 받아 신화를 회의적 시각으로 다루며 타도하고자 했다.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 철학자들을 싸잡아 풍자했으나 자신이 풍자한 사람들의 무리에 속한 인물이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를 소크라테스와 아주 친한 사이로 묘사했다.
기원전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지고 기원전 429년에 페리클레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테네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