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이상론, 의견과지식, 동굴의 비유

15. 이상론

 

플라톤의 철학은 현실과 현상의 구별에 의존하는데 파르메니데스가 처음 제안했다. 플라톤의 이상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철학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어원에 따라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철학자는 탐구심이 강한 사람이 지식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통속적 호기심만으로 철학자가 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철학자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고친다. 철학자는 ‘진리에 대한 통찰’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진리를 통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새로 연출된 비극과 새로 전시된 미술품을 꼭 관람하고 새로 나온 음악을 꼭 감상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사람은 아름다운 사물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철학자가 아닌데 철학자는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저 아름다운 사물만 사랑하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지만, 절대적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사람은 완전히 깨어 있다. 전자는 의견을 가질 뿐이지만 후자는 지식을 가진다.

의견은 오감에 나타난 세계에 대한 것이고 지식은 영원한 초감각적 세계에 대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의견은 아름다운 특수 사물에 관여하지만, 지식은 아름다움 자체에 관여한다.

이상론의 형이상학적 부분에 따르면 ‘고양이’라는 낱말은 어떤 이상적 고양이 바로 그 고양이를 의미하며, 신이 창조한 유일한 고양이다. 특수 고양이들은 고양이 자체의 본성에 참여하지만 더하든 덜하든 불완전하게 관여한다. 바로 이러한 불완전함 때문에 특수 고양이가 여럿 존재하게 된다. 그 고양이는 현실이지만 특수 고양이들은 현상일 뿐이다.

플라톤은 여러 개체가 공통된 이름을 가질 때는 언제나 공통된 ‘이상’이나 ‘형상’도 가진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침대는 여럿이지만 침대의 이상이나 형상은 하나만 존재한다. 거울에 비친 침대의 모습이 현상일 뿐 현실이 아니듯 다양한 특수 침대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특수 침대들은 신이 만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침대, 바로 그 이상의 복사물들일 뿐이다. 신이 만든 하나의 침대에 대해서는 지식을 얻지만, 목수가 만든 여러 침대에 대해서는 의견을 가질 따름이다.

다음은 동굴의 비유이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앞만 보도록 사슬에 묶인 채 뒤쪽에서 모닥불이 비쳐 앞에 가로놓인 벽에 그림자가 생기는 동굴 속에 갇힌 죄수에 비유된다. 죄수들과 벽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보는 사물은 전부 뒤에 놓인 물체가 모닥불의 불빛을 받아 벽에 비친 그림자다. 죄수는 어쩔 수 없이 그림자를 현실로 여기기 때문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든 물체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마침내 몇 사람이 드디어 동굴에서 벗어나 햇빛 속으로 나가게 된다. 동굴에서 벗어난 사람은 난생 처음 실물을 보고서 이제까지 그림자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이 수호자에 적합한 부류의 철학자라면 이전에 함께 지낸 동료 죄수를 만나러 동굴로 되돌아가서 진실을 깨우치고 동굴 밖으로 나오도록 알려 주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죄수를 설득할 때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데 햇빛으로 나오면서 죄수보다 그림자를 능숙하게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전보다 더 바보처럼 보이는 탓이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일종의 통찰, 곧 ‘진리를 통찰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명료한 지성의 통찰과 혼란스러운 감각 지각상의 차이를 시각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시각은 눈과 물체뿐만 아니라 빛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감각과 다르다. 우리는 태양이 비치면 물체를 더 또렷하게 본다. 이상계는 물체들이 햇빛이 드러날 때 보게 되는 세상인 반면 일시적 사물의 세계는 어둑해서 물체를 혼동하게 되는 세상이다. 눈은 영혼에 비유되고 태양은 빛의 근원으로서 진리나 선에 비유된다.

플라톤 철학에서 선이 누리는 지위는 독특하다. 플라톤은 학문과 진리는 선과 비슷하지만, 선의 지위가 더 높다고 말한다. “선은 본질이 아니지만, 존엄과 권능의 측면에서 본질을 훨씬 능가한다.” 선을 통찰함으로써 변증법은 수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들을 제거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현상과 대립되는 현실이 완결적으로 완벽하게 선하다는 가정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선을 지각하는 것은 현실을 지각하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수호자의 운명을 타고난 철학자는 동굴로 돌아가 진리의 태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살아야 한다. 만일 신이 자신의 창조를 바로 잡고자 한다면 스스로 철학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를 믿는 플라톤주의자는 육화를 바로 그렇게 해석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파이돈, 영혼불멸설

16. 플라톤의 영혼불멸설

 

파이돈의 이름을 따서 지은 대화편은 몇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 생애의 마지막 순간, 바로 독배를 마시기 직전부터 독배를 마신 다음 의식을 잃은 순간까지 나눈 대화를 묘사한다. 여기서 가장 지혜롭고 선하며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플라톤의 이상적 인간형이 등장한다. 플라톤이 묘사한 죽음 직전의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측면에서 고대나 근대에나 위대하다고 평가했다.

『파이돈』은 이교도 철학자나 자유 사상을 표방한 철학자들을 위한 이야기다.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침착함은 영혼 불멸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파이돈』은 순교자 한 사람의 죽음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리스도교에 스며든 많은 학설을 설명하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초기 대화편 『크리톤』에 친구와 제자 몇 사람이 소크라테스를 테살리아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아테네 당국도 소크라테스가 탈출했다면 반겼을 터라 계획은 거의 성공할뻔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탈출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정당한 법 절차에 따라 판결을 받았으므로 형벌을 피하려고 저지르는 불법 행동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파이돈』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사슬을 풀고 친구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 정신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대로 죽음을 환영할 테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까닭은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대화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도 비탄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지혜롭고 선한 다른 신들에게로 가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현상이라고 여겼다.

철학과 과학 대중의 생각 속에 흔히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의 구별은 종교에서 유래하고 영혼과 육체를 구별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르페우스교도는 자신을 땅과 빛나는 하늘의 자식이라고 선언한다. 육체는 땅에서 오고 영혼은 하늘에서 온다는 말이다. 플라톤은 앞에서 말한 오르페우스교의 이론을 철학 언어로 표현하려 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돌린 종교의 지성적 측면에서 육체는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방해되며 시각과 청각은 정확한 증거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죽어가면서 보여 준 용기는 현상계에 속한다. 우리가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만 이러한 모든 것에 관해 알지만 참된 철학자는 시각과 청각을 무시한다. 참된 철학자는 선의 이상에 도달했기 때문에 선한 것이 현실적이라는 걸 인식하게 되어 있고 따라서 이상계가 곧 현실계라고 추론할 수 있다.

경험주의자에게 육체는 우리가 외부의 현실계와 접촉하는 통로이지만 플라톤에게 육체는 이중으로 악해서 망원경을 통하듯 희미하게 보이도록 사물을 왜곡하는 매체인 동시에 지식 추구와 진리 통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정욕의 근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상론에 대한 설명으로 “이상이 실존하고 다른 사물은 이상에 참여함으로써 이름을 이끌어낸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영혼의 운명을 이렇게 묘사한다. 착한 영혼은 천국에 가고 나쁜 영혼은 지옥에 가며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영혼은 연옥에 간다는 것이다.

『파이돈』의 끝부분은 소크라테스의 최후와 작별을 묘사한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으니 갚아 주겠나?” 사람들은 병이 들었다가 나으면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곤 했는데 소크라테스는 목숨이 위태로운 발작성 열병에서 회복된 적이 있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님은 당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지혜롭고 정의로우며 최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결론짓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여러 세대에 걸쳐 후대 철학자들에게 추앙받는 모범이다. 그는 속세에서 추구하는 성공에 관심이 없었으며 임종의 순간에도 평온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기지를 발휘하여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더 염려했다. 하지만 그에게 아주 심각한 결함도 몇 가지 있다. 그는 논증을 펼칠 때 부정직하고 궤변을 부리며 사심 없는 지식 탐구가 아니라 사적 사고로 자신이 동의할 만한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지성을 쓴다. 점잔 빼고 겉으로만 감동을 주는 나쁜 성직자의 전형이 떠오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보여준 용기는 신들의 회합에 합류하여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리라고 믿지 않았더라면 더욱 비범해 보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선대 철학자들과 달리 사고가 과학적이지 않고 우주가 자신의 윤리적 기준과 일치한다고 증명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것은 진리를 배반하는 태도이며 철학자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한 인간으로서 성인들의 성찬에 참석하도록 허락받았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로서 학자들이 가는 연옥에 오래 머물러야 마땅하다.

 

플라톤, 티마이오스, 4원소

17. 플라톤의 우주론

 

플라톤의 우주론이 등장하는 『티마이오스』는 키케로가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중세 서유럽에 알려진 유일한 대화편이다. 『티마이오스』에는 소크라테스가 초기 대화편에서 차지한 지위를 피타고라스가 이어받으며 수가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라는 견해를 어느 정도까지 포함한 피타고라스학파의 학설이 주로 채용된다.

4원소인 불, 공기, 물, 흙은 제각기 겉보기에 따라 수로 나타내며 연비례 관계를 맺는다. 불과 공기의 비는 공기와 물의 비와 같고 물과 흙의 비와 같다. 신은 세계를 창조할 때 4원소를 모두 사용했으므로 세계는 완벽하게 만들어져 나이를 먹지도 병들지도 않는다. 비례관계에 따라 조화를 이룬 세계는 우애 정신으로 결속되므로 신이 아니고서는 조화로운 비례를 깨지 못한다. 신은 먼저 영혼을 만들고 나서 육체를 만들었다. 영혼은 나뉘지 않으면서 변하지 않는 부분과 나뉘는데 변하는 부분이 혼합된 존재이며 제3의 본질로서 중간에서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시간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낮도 없었고 밤도 없었다 우리는 영원한 본질에 대해 있었다거나 있을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있다고만 말해야 맞다. 이것은 ‘움직이는 영원한 모상’에 대해 있었다거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는 뜻이다.

시간과 천체는 동시에 실존하게 되었다. 조물주가 태양을 만들어서 생명을 셈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누구나 생각하듯 낮과 밤의 연속이 없었더라면 수를 생각해 내지 못했으리라. 낮과 밤, 달과 해를 보면서 수에 대한 지식을 창안했으며 우리에게 시간 개념이 생겨났다. 여기에서 철학이 유래했다. 철학은 우리 시력의 덕택으로 얻은 크나큰 혜택이다.

티마이오스는 조물주가 별마다 영혼을 하나씩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영혼은 감각하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할 줄 안다. 영혼은 감각 같은 성향을 극복한다면 올바르게 살지만 극복하지 못한다면 바르게 살지 못한다.

흙, 공기, 물, 불은 제일 원리가 아니고 기본 요소도 아니다. 4원소는 심지어 음절이나 최초 합성물도 아니다. 불은 이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 말하자면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실체의 상태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지성이 파악한 본질은 이름일 뿐인가? 답은 정신이 참된 의견과 같으냐 아니냐에 달렸다. 만일 정신이 참된 의견과 같지 않다면 지식은 본질에 대한 지식임이 분명하므로 본질은 단지 이름뿐이다. 그런데 정신과 참된 의견이 확실하게 차이를 나타내는 까닭은 전자가 신의 명령으로 주입되는 반면에 후자는 설득으로 주입되기 때문이다. 또 전자는 참된 근거를 동반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모든 인간이 참된 의견을 공유하지만, 정신은 신들의 속성이며 극소수 인간만 지니는 속성이다.

티마이오스의 주장에 따르면 물질계를 구성하는 참된 요소는 흙, 공기, 물, 불이 아니라 두 가지 직각삼각형인데 하나는 정사각형의 절반인 직각삼각형이고, 다른 하나는 이등변삼각형의 절반인 직각삼각형이다. 위에서 말한 두 종류의 삼각형은 가장 아름다운 형상이므로 신은 삼각형의 형상을 이용해 물질을 빚었다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두 삼각형으로 다섯 가지 정다면체 가운데 네 가지 정다면체를 구성하는 일이 가능하며 4원소 각각을 구성하는 각 원소도 정다면체다. 흙을 구성하는 원소는 정육면체이고 불을 구성하는 원소는 정사면체이며 공기를 구성하는 원소는 정팔면체이고 물을 구성하는 원소는 정이십면체다.

플라톤은 정이십면체에 대해 “신이 우주의 본을 뜰 때 다섯 번째 조합을 사용했다”라고 말한다. 플라톤의 말은 모호한데 우주가 정이십면체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우주가 구형이라고 한다. 오각형은 언제나 마력을 지닌 형상으로 널리 알려졌고 겉보기에 이러한 견해는 오각형을 ‘건강’이라고 부르며 종교 단체의 회원을 알아보는 상징으로 사용했던 피타고라스학파에서 기인한다.

티마이오스는 인간의 영혼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죽지 않는 영혼이고, 다른 하나는 죽는 영혼이다. 죽지 않는 영혼은 조물주가 창조했고 죽는 영혼은 신들이 창조했다. 죽지 않는 영혼은 머리에 있고 죽는 영혼은 가슴에 있다.

플라톤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설명은 분명히 믿었으며 창조된 세계가 영원한 원형의 모상이라는 견해도 믿었다. 세계 속에 필연과 목적이 혼합되어 있다는 믿음은 철학이 생겨나기 오래전부터 그리스인이 실제로 공유한 일반적 믿음이다. 플라톤은 일반적 믿음을 수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을 괴롭힌 악의 문제를 회피했다.

 

티마이오스의 천체 이야기는 고대와 중세 사상에 미친 영향이 크기에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 만물의 척도, 지식과 지각

18. 플라톤의 지식과 지각

 

“어떤 것을 안 사람은 자신이 안 그 사물을 지각하는 것이고 현재 제가 보기에 지식은 지각 말고 다른 것이 아닌 듯합니다.” 테아이테토스가 제안한 지식에 대한 정의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견해를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프로타고라스의 학설과 동일시한다. 주어진 어떤 사물이든 “그것은 나에게는 나에게 나타난 대로 존재하고, 너에게는 너에게 나타난 대로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각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고, 존재하는 지식으로서 틀릴 수 없을 테지”라고 소크라테스는 덧붙인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학설에 모든 것이 언제나 변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학설을 추가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학설은 바로 “우리가 ‘존재한다’라고 기꺼이 말하는 사물은 모두 현실적으로 생성하는 과정 속에 있다.”라는 주장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학설이 감각의 대상에 대해 참이지만 현실적 지식의 대상에 대해서는 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각의 대상에 적용될 뿐이더라도 헤라클레이토스의 학설에 지식이 지각이라는 정의를 추가하면 지식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에 대한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지각은 대상과 감각 기관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결과로 여겨지며 헤라클레이토스의 학설에 따르면 지각 대상과 감각 기관은 늘 변하고 변화 속에서 지각 표상 역시 변한다. 소크라테스는 건강할 때 포도주 맛이 달콤하지만, 병이 났을 때 시큼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지각하는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가 지각 표상에 변화를 일으킨 원인이다.

사람이 제각기 만물의 척도라면 누구든 다른 사람만큼 지혜롭다는 논증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대신해 아주 흥미로운 답변을 추천한다. 어떤 판단이 다른 판단보다 더 참될 수 없지만, 더 나은 결과를 낸다는 의미로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실용주의를 시사한다.

지식과 지각을 동일하게 보는 견해에 맞선 플라톤의 논증은 이렇다. 그는 우리가 눈이나 귀와 함께 지각하지 않고 눈과 귀를 통해 지각한다고 지적하며 이어서 우리가 획득한 어떤 지식은 감각 기관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는 소리와 색이 닮지 않았다는 점을 알지만 어떤 감각 기관도 소리와 색을 둘 다는 지각하지 못한다. 실존과 비실존, 유사성과 비 유사성, 동일성과 차이성, 단일성과 수 일반을 파악하는 특수 기관은 없다. 마찬가지로 명예와 불명예 선과 악을 파악하는 특수 기관도 없다. “정신은 자신을 도구로 삼아 어떤 사물을 관조하고 육체가 갖춘 능력을 통해 다른 사물을 관조한다.” 우리는 촉각으로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지각하지만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실존하고 반대되는 성질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바로 정신이다. 정신만 실존에 이를 수 있고 우리는 실존에 이르지 못하면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각을 통하는 것만으로는 사물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감각만으로는 사물이 실존한다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인상들이 아니라 반성 속에 있으면 지각은 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각은 실존을 파악할 때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해서 진리를 파악할 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만물 유전설은 플라톤이 풍자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누가 플라톤이 말한 극단적 형식으로 주장했다고 가정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우리가 보는 색이 계속 변한다고 가정해 보자. ‘붉다’라는 말은 붉은색의 여러 색조에 적용되며 내가 “나는 붉은 색을 본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말하는 동안 걸린 시간 내내 진술이 참이 아니게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플라톤은 계속되는 변화과정에 지각과 비지각, 인식과 비인식 같은 논리적 대립항이 작용함으로써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항은 변하는 과정을 적합하게 기술하지 못한다.

말의 의미는 바뀐다. 예컨대 ‘이상’이란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상당한 기간의 교육 과정을 거쳐야만 이 말에 플라톤이 부여한 의미와 같은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말이 겪는 의미의 변화는 말이 기술하는 변화 자체보다 더 느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말의 의미변화가 전혀 일어나서는 안 될 필요까지는 없다. 아마 이러한 주장은 논리학과 수학에서 사용하는 추상적인 말에 적용되지 않을 테지만, 이러한 추상어는 명제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적용될 따름이다. 여기서 논리학과 수학이 독특한 학문 분야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아 다른 지식을 지나칠 정도로 수학과 비슷하게 만들어 버렸다. 플라톤은 다른 위대한 철학자들처럼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지만, 그렇더라도 실수는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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