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서양철학사』 / 지은이-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

- 서론

철학적 개념 체계는 두 가지 요소에서 생겨난다. 하나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종교와 윤리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넓은 의미의 ‘과학적 탐구’다.

철학은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 측면을 포함한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 명확한 지식은 무엇이든 과학에 속하는 반면, 명확한 지식을 초월한 교리는 모두 신학에 속한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 이 무인지대가 바로 철학의 세계다.

 

- 제1권 고대철학

♠ 제1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탈레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철학과 과학은 원래 분리되지 않은 채로 기원전 6세기 초에 동시에 탄생했다.

문자기술은 기원전 4000년경 이집트에서 발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소포타미아에도 등장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달한 초기 문명의 연원은 나일강,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이며 강을 중심으로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량도 늘어났다.

이집트 신학과 바빌로니아 신학의 차이는 컸다. 이집트인은 죽음 문제에 몰두했다. 피라미드는 기원전 4000년 말부터 3000년 초까지 여러 왕의 주도 아래 건설되었다.

바빌로니아의 발전 과정은 이집트보다 훨씬 고전성을 드러냈다. 최초의 지배종족은 셈족이 아니라 수메르족인데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수메르족은 설형문자를 발명했으며 셈족은 수메르를 정복하면서 설형문자도 물려받았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종교는 고대의 다른 종교처럼 풍요제였다. 땅은 여성이고 태양은 남성이다. 황소는 흔히 남성 생식력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황소신은 서민들이 숭배하는 대상이었다. 바빌로니아에서 땅의 여신으로 추앙된 이슈타르는 여성을 대표한 신들 가운데 최고 여신이었다. 서아시아 전 지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대모신을 숭배했다. 그리스의 식민지 이주민들은 소아시아에서 대모신의 신전을 발견하자 아르테미스란 이름을 붙이고 기존의 제례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여기에서 ‘에페소스인의 디아나’가 출현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대모신을 동정녀로, 마리아로 변형시켰으며 성모마리아에 대해 ‘신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써도 좋다고 허락한 곳도 에페소스 공의회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법전은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법전이다. 함무라비는 법전을 최고신 마르두크가 전해주었다고 주장한다.

내세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긴 이집트 종교와 달리 바빌로니아의 종교는 현세의 번영에 관심이 더 많았다.

바빌로니아의 과학적 지식을 습득한 철학자가 바로 탈레스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은 농경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상업 분야에서는 크레타섬이 개척자의 역할을 했던 듯하다.

기원전 2500년부터 1400년까지 약 11세기 동안 크레타에는 예술이 발전했는데 이를 미노아문명이라고 부른다. 현존하는 크레타 예술은 밝고 쾌활함이 지나쳐 거의 퇴폐적이고 사치스러운 인상을 주는데 이집트 신전의 무시무시한 느낌과 차원이 전혀 달랐다.

크레타 문명은 해상 무역을 바탕으로 발전한 문명이며 힉소스 왕조 시기를 제외하면 이집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크레타의 종교는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종교 양식과 일부 유사한 면이 있으나 예술은 이집트와 닮은 점이 더 많았다. 크레타 문명의 중심은 크로노스의 이른바 ‘미노스의 궁전’이었으며 이 궁전에 대한 회상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으로 흡수되었다.

 

-고대 그리스 종교, 호메로스, 바쿠스, 오르페우스

크레타의 여신은 ‘생명의 여신’인데 여성 사냥꾼이자 고대 그리스 아르테미스의 전신으로 알려졌다.

미노아 문명은 멸망하기 전 기원전 1600년경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렇게 본토에서 꽃피운 문명이 미케네 문명이며 왕의 죽음을 기린 무덤과 언덕 꼭대기에 세운 요새로 유명했다.

미케네 문명을 대표한 왕의 무덤과 요새는 고대 그리스인의 상상력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막연한 전설로 알려진 미케네 문명은 대부분 호메로스가 전해주었다.

그리스인은 연이어 일어난 세 파도를 이겨내고서야 그리스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첫째는 이오니아족의 침입, 두 번째는 아카이아족의 칩임, 세 번째는 도리아인의 칩임이었다.

고대 그리스 종교의 여신 몇은 미케네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 본토는 산악지대로 볼모지였으나 계곡에는 비옥한 땅이 많았다.

스파르타에서는 소수 귀족 계급이 다른 종족의 노예들을 억압하며 노동에 의존해 살았다.

그리스의 정치체제는 일반적 경로로 발전하는데 우선 군주정치에서 귀족정치로, 다음에는 참주정치와 민주정치가 교대로 나타난다.

민주정치는 모든 시민에 의한 정치를 의미했지만, 노예와 여성은 시민에서 제외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주목할 만한 첫 결산은 호메로스였다.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시인이라는 주장은 널리 수용된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완성되기까지 약 200년이 걸렸다. 어떤 이는 기원전 750년부터 550년까지라 말하고 다른 이는 기원전 8세기 말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현존하는 호메로스의 시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네로 가져왔는데 그는 중간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니 기원전 560년부터 527년까지 아테네를 통치했다.

호메로스는 원시성과 거리가 먼 검열관의 위치에서 고대신화들을 정리한 18세기식 합리주의 성향의 해석자이며 상류층에 어울리는 도시풍의 세련된 계몽적 이상을 간직했다.

호메로스의 신은 정복을 일삼는 귀족 계급의 신이고 실제로 땅을 일구는 농부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풍작의 신이 아니었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이오니아, 바로 그리스의 소아시아 일부 지역과 인접한 섬나라들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기원전 6세기 중엽에 키루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스는 수많은 작은 독립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고 각 독립 국가는 농경지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아르카디아처럼 농사만 짓는 촌락공동체도 있었다.

촌락주민들은 헤르메스신과 판신을 숭배하며 풍요제도 많이 올렸는데 신상을 두어야 할 자리에 사각기둥만 세워놓은 일이 흔했다.

판은 원래 이름이 ‘파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목자 혹은 양치기를 의미하다가 나중에 ‘범신’이란 의미로 해석된 유명한 이름을 얻었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 후 기원전 5세기부터 판신을 숭배했다.

디오니소스, 바쿠스는 원래 트라키아족의 신이었다. 그리스인은 트라키아인을 야만인으로 여겼다. 트라키아인이 섬긴 신의 이름이 바쿠스였다.

바쿠스 숭배의식은 야생동물을 갈기갈기 찢고 전부 날로 먹는 야만적 요소를 포함했다. 또한, 기묘해 보이는 여성주의적 요소도 들어있었다. 신분이 높은 여자들과 하녀들이 훤히 보이는 언덕에 무리 지어 황홀경에 이르려고 밤새껏 춤을 추었는데 아마 일부는 술에 취했겠지만 주로 신비감에 도취 되었을 터다. 바쿠스 숭배의식의 아름다움과 야수성은 에우리피데스의 『바쿠스의 무녀들』에서 드러난다.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별하는 기준은 주로 사려(prudence)인데 넓은 의미로 쓰자면 예상(forethought)이다.

바쿠스 종교의식은 ‘종교적 열광’을 불러일으키는데 어원을 따져 보면 신이 숭배하는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는 의미다.

오르페우스는 실존 여부가 분명치 않지만,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어떤 이는 그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신이거나 상상으로 만들어진 영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통에 따르면 오르페우스는 바쿠스와 마찬가지로 트라키아에서 전해졌다고 하지만, 오르페우스나 그의 이름과 결합 된 운동은 크레타에서 생겨났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오르페우스교의 교리 가운데 이집트에서 처음 생겨난 교리가 많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이집트는 주로 크레타를 경유 하여 그리스에 영향을 주었다. 오르페우스는 종교개혁가로 바쿠스의 정통 신앙에 경도된 무녀들이 광란 상태에서 그를 찢어 죽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오르페우스교의 신학에 따르면 바쿠스는 두 번 태어났는데 한번은 어머니 세멜레에게서, 한번은 아버지 제우스의 넓적다리에서 태어났다.

 

오르페우스교, 밀레토스학파,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무덤 속에서 발견된 오르페우스교의 석판들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음 세상에서 길을 찾는 방법과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한 필요한 지침이 적혀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이 마시면 안 되는 샘물은 망각을 일으키는 레테(Lethc)의 강물이다. 다른 샘물은 므네모시네(Mnemosyne), 곧 기억의 강물이다.

오르페우스교는 금욕적 종파였다. 그들이 추구했던 도취는 종교적 열광, 바로 신과 일체가 되는 것이었다. 오르페우스가 디오니소스교의 종교개혁가였던 것처럼 피타고라스는 오르페우스교의 종교개혁가였다. 오르페우스교의 특징은 피타고라스를 거쳐 플라톤의 철학에 유입되었고 플라톤을 통해 어느 정도 종교적 색채를 띤 이후 대부분은 철학 속으로 스며들었다.

바쿠스를 숭배하는 한 가지 특징은 여성주의 색채인데, 여성주의는 피타고라스의 사상 속에 더욱 짙게 나타나며 플라톤의 철학 속에서 여성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남성과 완벽하게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피타고라스는 “성의 측면에서 여자들은 천성적으로 경건과 더욱 가깝다”라고 말한다. 바쿠스교의 특징에 해당하는 다른 요소는 격렬한 감정을 존중하는 태도이며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교의 의식에서 생겨났다. 에우리피데스는 특별히 오르페우스교의 중요한 두 신, 바로 디오니소스와 에로스를 공경하며 두 신에게 모든 영광을 돌렸다.

그리스 신화에서 보면 원형 신화는 올림포스의 제우스가 아니라 불을 천상에서 훔쳐 내 인간에게 전해 준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받은 프로메테우스다.

그리스 문화를 지배한 두 가지 경향은 영정을 중시하고 종교에 몰입하며 신비를 표방하고 내세를 믿는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명랑하고 경험을 중시하며 합리주의를 내세우고 다양한 사실에 대해 지식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후자의 경향을 대표하는 역사가이며 초기의 이오니아 자연 철학자들도 후자의 경향을 따랐다. 어느 선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후자의 경향에 포함된다.

 

3. 밀레토스학파

 

탈레스는 소아시아의 번성한 상업 도시, 밀레토스 출신이었다. 당시 밀레토스를 구성한 인구는 대다수가 노예였고 자유민들은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갈라져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밀레토스는 이오니아의 다른 상업 도시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7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동안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했다. 처음에 토지를 소유한 귀족층이 정치 권력을 장악했으나 점차 상인 계급에 의한 금권정치로 대체되었다. 이어 참주가 등장하여 상인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데 참주는 보통 민주파의 지지로 권력을 얻었다. 밀레토스는 니네베가 함락될 때까지 그리스 해안 도시 동쪽에 위치한 리디아 왕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스인이 최초로 이집트에 정착한 곳은 밀레토스의 주둔군이 점령한 요새였지만 기원전 610~560년에 가장 중요한 정착지는 다프나이였다. 여기에서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유대계 망명자들이 네부카르데자의 압제에서 도망쳐 피난처를 찾아다녔다.

탈레스가 살았던 연대를 추정할 가장 좋은 증거는 천문학자들이 기원전 585년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일식을 탈레스가 예측했다는 유명한 사실이다.

탈레스는 이집트를 여행한 이후 그리스에 기하학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집트인이 알았던 기하학은 주로 경험을 통해 발견한 규칙이므로, 탈레스가 나중에 그리스인이 발견한 연역적 증명에 도달했다고 믿을 어떤 이유도 없다.

탈레스는 그리스 일곱 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명하며 일곱 현자는 저마다 지혜를 담은 격언 한마디로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격언으로 유명하지만, 이 가정은 오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탈레스는 물이 근본 물질이며 물에서 만물이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땅이 물 위에 떠 있다고도 주장했다. 자석이 철을 움직이기 때문에 자석 안에 영혼이 있으며 만물에 신들이 깃들여 있다고 말했다고도 전한다.

밀레토스학파의 둘째 철학자로 꼽는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인물로서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546년에 64세였다는 사실은 진실에 가깝다고 볼 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만물이 제일 실체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은 탈레스가 주장한 물이 아니며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실체도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나이를 먹지도 늙지도 않는 실체로서 “여러 실체를 에워싸고 있다.”라고 말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여러 세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제일 실체는 낯익은 다양한 물질 형태로 변하고 그러한 물질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주장을 펼친다.

“사물들이 정해진 대로 다시 한번 발생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까닭은 사물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부정의를 서로 상쇄하거나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세계의 불, 흙, 물은 당연히 일정한 비율로 존재할 테지만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는 각 요소는 제각기 지배권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런데 각 요소가 영원히 균형을 유지하도록 작용하는 일종의 필연 또는 자연법칙이 있다. 예컨대 불이 있었던 곳에는 재가 남는데, 이것이 바로 흙이다. 영원히 고정된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정의의 개념은 가장 심오한 그리스인의 신념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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