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학파, 제논, 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28. 스토아학파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제논은 유물론자였으며 주로 키니코스학파의 철학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결합한 학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점차 플라톤주의와 혼합되면서 유물론을 포기하고 유물론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냄새가 짙게 나타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대부분 시리아인이고 후기에는 로마인이었다. 초기에는 정서적 측면에서 편협하고 광신적 특징을 나타냈다.
제논은 페니키아인으로 기원전 4세기 후반 무렵에 키프로스의 키티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산업에 종사한 듯하다. 소크라테스는 스토아학파가 이어지는 동안 으뜸가는 성인이었다.재판 때의 당당함, 탈출권고 거절, 죽음을 맞선 침착한 태도, 불의를 행하는 자가 불의를 당하는 자보다 자신을 더 해치게 된다는 주장은 모두 스토아학파의 가르침과 일치했다.
제논은 형이상학의 미묘하고 세밀한 요소를 참아낼 만한 끈기가 없었다. 그는 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연학과 형이상학의 가치도 덕에 기여할 경우에만 인정했다. 그는 상식을 수단으로 삼아 당대의 형이상학적 경향에 맞서 싸우려고 했는데 그리스에서 상식은 유물론을 의미했다.
스토아학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은 주요 학설은 우주에 관한 결정론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제논은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의 경로는 자연법칙에 따라 고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제논은 이론적 연구를 전부 윤리학에 종속된 연구로 간주했다. 그는 철학이란 과수원과 같아서 논리학은 울타리이고, 자연학은 나무이며, 윤리학은 열매라고 한다. 또는 달걀과 같아서 논리학은 껍데기이고, 자연학은 흰자이며, 윤리학은 노른자라 말하기도 했다.
스토아학파는 파나이티오스와 포세이도니오스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파나이티오스는 플라톤주의를 상당 부분 도입하면서 유물론을 포기했다. 그는 젊은 스키피오의 친구였으며 키케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주로 키케로를 거쳐 로마인에게 알려졌다. 포세이도니오스는 시리아계 그리스인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이 멸망하던 때의 아이였다. 처음에 아테네로 가서 스토아 철학을 흡수했고 다음은 로마 제국의 서쪽까지 갔다.
역사적 측면에서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보다 훨씬 중요한 로마와 관련된 세 사람이 있다.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인데 각각 행정장관, 노예, 황제이다. 세네카는 스페인 사람으로 부친은 로마에 사는 교양인이었다. 그는 정치가였으며 네로 황제를 제자로 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운이 나빴다. 세네카는 네로를 암살하고 새 황제를 앉히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죽임을 당했다.
에픽테토스는 그리스인으로 원래 에파프로디투스의 노예였다가 네로의 자유민이 되어 행정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에피루스의 니코폴리스에서 칩거하며 저술하고 가르치다가 죽음을 맞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회 계급의 다른 쪽에 있었던 사람이다. 숙부이자 장인이었던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되어 서기 161년에 제위를 계승했고 선왕을 기념했다. 그는 황제로서 스토아학파의 덕을 실천하는데 헌신했다. 그의 독백으로 쓴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공적 의무에 부담을 느꼈으며 권태로 매우 괴로워했다는 걸 보여준다.
『명상록』은 할아버지, 아버지, 양아버지, 여러 선생과 신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말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덕을 부모, 조부모, 스승의 좋은 영향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선한 의지도 악한 의지와 마찬가지로 앞선 원인의 결과일 뿐이라는 말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윤리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했는데 그들의 가르침이 다른 분야에서 열매를 맺는 경우는 둘이다. 하나는 인식론이고 하나는 자연법과 자연권 학설이다.
플라톤이 지각은 지식이라고 주장했는데도 스토아 철학자들은 지각을 인식론에 중요한 요소로 수용했다. 그들이 인식론 분야에서 내놓은 다른 학설은 영향력이 훨씬 강했으나 의문을 품을 여지가 더 많았다. 그들은 생득 관념과 생득 원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 논리학은 단지 연역 논리일 뿐이었으므로 제일 전제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제일 전제는 적어도 일부는 일반 명제인데, 일반 명제를 입증할 방법은 실제로 없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지성의 빛에 따라 명백한 만인이 인정하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원리는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 나타나 있듯 연역법의 기초 명제로 쓰일 가능성이 있었다. 생득 관념도 비슷하게 정의의 출발점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중세 내내 이런 관점을 용인했고 데카르트도 받아들였다.
자연권 학설은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부활시킨 결과였으나 수정 작업을 거쳤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자연법과 만민법을 구별했다. 그리스도교는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물려받았다. 17세기에 전제정치에 맞서 효과적으로 전투를 벌일 기회가 왔을 때 스토아학파의 자연법 학설과 자연권 학설은 그리스도교의 옷으로 갈아입고 고대의 어떤 황제도 부여하지 못한 실천력을 획득했다.
알렉산드로스,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 플루타르코스, 아랍인
29. 로마제국의 문화
로마는 문화사에 여러 가지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첫째는 헬레니즘 사상이다. 두 번째는 서방 지역에 미친 영향이다. 세 번째는 문화를 널리 보급하고 단일정치, 단일 문명이란 생각에 익숙해지게 하는 오랜 평화였다. 네 번째는 헬레니즘을 이슬람교도와 서유럽에 전달한 역할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서부 지중해 지역까지 정복하지 못했다. 이 지역은 기원전 3세기 초 강성한 두 도시국가, 카르타고와 시라쿠사가 통치했다. 제3차 포에니전쟁과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가 시라쿠사를 정복함으로써 카르타고도 대수롭지 않은 도시로 전락했다. 스페인은 한니발과 맞선 전쟁 때 일어난 사변 때문에 정복당했다. 프랑스는 카이사르가 기원전 1세기에 정복하고, 100년 후 영국도 정복했다. 전성기 로마제국의 변경은 유럽의 라인강과 도나우강, 아시아의 유프라테스강, 북아프리카의 사막까지 이르렀다.
로마제국은 아우구스투스의 즉위부터 3세기 대재난의 시기 전까지 200년 이상 안정과 평화를 유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계승자이자 양자로서 기원전 30년부터 서기 14년까지 제국을 통치하면서 내란을 종식시켜 그리스 문명 이래 처음으로 평화와 안전을 누렸다. 그리스의 정치체제가 몰락한 원인은 도시마다 절대주권을 주장한 것이고 대부분의 도시 내부에서 부자와 빈자의 계층 간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주민의 복지를 위한 조직을 정비했다. 그는 사후에 신격화되었으며 지방에서는 그를 신으로 섬기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로마는 행복했지만, 모험보다는 안전을 선호했기에 삶의 맛이나 재미가 사라졌다. 로마는 점점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고 틀에 박힌 사회로 변화해갔다.
정력이 넘치는 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몰락을 막아냈다. 두 황제로 인해 로마는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었고, 이는 그리스어권과 라틴어권의 구별에 상응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동쪽 절반 지역의 수도를 비잔티움에 세우고 콘스탄티노플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의 지위 체계를 바꿈으로써 군대를 제어했다.
로마의 행정체제는 도시들의 지방 자치를 허용하는 형태로 지방관리들이 세금을 걷게 했고 각 도시가 내야 하는 총액만 중앙정부가 정해주었다. 이러한 체제는 번성기에는 순조롭지만 원기가 소진된 당시의 제국에서 중앙정부가 요구한 세금을 부담하기 위해 치른 고생은 실로 엄청났다.
콘스탄티누스의 역사상 중대한 혁신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인한 것이었는데 표면상의 이유는 병사들이 대부분 그리스도교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결과 5세기에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을 폐허로 만들었을 때 게르만족은 서로마의 위세에 압도되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로써 서유럽은 교회가 흡수한 만큼 고대 문명을 보존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두 나라의 뛰어난 인물들 사이에 발견되는 병행 관계를 추적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트라야누스 황제는 플루타르코스에게 관직을 주기도 했다. 그는 『영웅전』 말고도 철학, 종교, 역사, 도덕에 관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영웅전』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그리스와 로마가 융화되기를 바라며 쓴 책이다.
그리스인은 제조업과 농업기술, 좋은 관리에게 필요한 지식, 대화와 삶을 즐기는 기술, 예술과 문화, 철학에서 우월했다. 로마인은 군사전략과 사회 결속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관계는 1841년과 1845년에 프로이센인과 프랑스인이 맺은 관계와 비슷했다. 포에니전쟁 후 로마의 젊은이들은 그리스인을 동경하게 되었다. 로마인의 기원이 트로이라는 전설도 호메로스의 신화와 관련시키려는 의도로 고안된 것이었다.
온갖 종파와 예언자가 로마에 등장했으며 최고위 정치권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공인은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반면 새로운 종교를 들여오려던 초기 시도는 실패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 종교는 지상의 세계에 관심이 많고 행복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했다. 절망의 경험에 오래 시달렸던 아시아는 저세상의 희망을 담은 종교 속에서 효과가 좋은 해독제를 만들어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될 때까지 그리스에서 많은 요소를 흡수했고 유대교와 함께 후대의 서유럽에 전달했다.
문명이 미치는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로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서부 독일의 일부 지역은 로마 군단이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여 정복함으로써 문명화되었다.
7세기에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사도가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정복했다. 다음 세기에 그들은 스페인까지 정복했다. 아랍인은 동로마제국의 문명을 익혔지만 쇠퇴기의 권태에서 벗어나 떠오르는 정치 조직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아랍어에서 파생한 낱말에는 대수, 알코올, 연금술, 증류기, 알칼리, 방위, 천정 등이 있다. 철학에서 아랍인은 독창적 사상가라기보다 훌륭한 주석가였다. 만일 아랍인이 그리스 전통을 보존하지 않았더라면 르네상스인은 고전 지식의 부활로 얻을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의문을 제기하는 일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플로티노스, 신플라톤학파, 성삼위일체, 일자, 누스, 영혼
30. 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는 신플라톤학파의 창시자로서 마지막 위대한 고대 철학자였다. 플로티노스는 세계의 황폐하고 비참한 광경을 외면하며 선하고 아름다운 영원한 세계를 관조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플라톤학파에게 내세는 이상계, 곧 착각을 일으키는 현상계와 대립하는 현실계였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플라톤학파의 이러한 관점들을 결합했으며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많이 구현했다. 신학자이자 사제인 잉은 플로티노스를 다룬 자신의 아주 귀중한 책에서 그리스도교가 플로티노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플로티노스는 중세와 가톨릭 신학의 그리스도교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유물론에 반대하여 펼친 논증은 훌륭하며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온전한 개념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보다 훨씬 명료하다.
플로티노스는 스피노자처럼 도덕적 순수함과 고결함을 갖추어 대단히 감명을 주는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진지했으며 결코 신랄하거나 검열관 같은 비판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할 수 있는 만큼 간단한 방식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믿음을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그의 생애는 친구이자 제자인 포르피리오스가 쓴 전기를 통해서 알려지는데 포르피리오스는 유대인으로 본명은 말코스였다.
플로티노스는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난 외양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생존 시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그의 청강생들 가운데 유력한 인사들이 많았는데 갈리에누스 황제가 그를 총애했다. 플로티노스는 캄파니아 지방에 플라톤의 국가를 세울 목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하여 플라토노폴리스라고 부를 계획을 세웠다. 황제는 처음에 호의를 보였으나 결국 허가를 철회했다.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은 성삼위일체, 바로 일자는 정신, 영혼과 함께 시작한다. 세 위격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의 위격과 달리 동등하지 않다. 일자는 최고 존재이고, 정신이 다음에 오고 영혼은 마지막에 있다,
일자는 그림자가 여러 개 생기는 조금 어렴풋한 개념이다. 일자는 때로 신이라 부르고 선 자체라 부른다. 일자는 일자에서 비롯되는 최초의 필연적 결과인 존재를 초월한다. 우리는 일자에 속성을 부여해서는 안 되고, 그저 “그것이다”라고 말할 따름이다.
플로티노스가 ‘누스’라고 부르는 제이 위격은 ‘정신’으로 번역된다. 정신은 일자의 모상이라고 한다. 정신은 일자가 자신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통찰력을 갖게 되어 생겨나며 이렇게 보는 활동이 정신이다. 플로티노스는 부분들이 없는 존재가 자신을 인식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에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하나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태양의 비유에 근거하여 표현된 신 안에서는 빛을 내는 자와 빛을 받는 자가 같다. 태양의 비유에 따르면 정신은 일자가 자신을 보는 빛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가 아집과 방자함 때문에 잊어버렸던 신성한 정신을 인식하는 일은 가능하다.
플로티노스의 제삼 위격은 영혼이다. 영혼은 정신보다 열등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조물주다. 영혼은 태양과 달, 별들을 비롯한 눈에 보이는 전 세계를 만들었다. 영혼은 신의 지성에서 생겨난 자식이다. 영혼은 이중성을 가지는데 하나는 정신에 열중한 내적 측면이고 하나는 외부로 향한 측면이다. 외부로 향한 영혼은 하향운동과 결합되고 하향운동 속에서 자신의 모상을 만들어내는데 이렇게 생겨난 것이 바로 자연이자 감각의 세계다. 스토아학파는 자연과 신을 동일시했지만, 플로티노스는 자연을 제일 낮은, 정신을 우러러보는 활동을 잊은 영혼에서 흘러나온다고 생각했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사람들이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북돋우는 결함이 있다. 우리는 안을 들여다볼 때 신성한 정신을 보고 바깥을 볼 때는 감각계의 불완전한 점을 본다. 이러한 종류의 주관성은 점진적 성장의 결과물인데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플라톤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애초에 주관성은 학설과 관계가 있었을 뿐 타고난 기질의 문제는 아니어서 오랫동안 과학적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플로티노스는 끝이자 시작이다. 그리스인의 관점에서는 끝이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관점에서는 시작이다. 수 세기에 걸쳐 반복된 실망에 지치고 절망으로 기력이 쇠퇴한 고대 세계에서 플로티노스의 학설은 수용할 만했으나 활기를 불어넣을 수는 없었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후대에 전하는 일은 로마 말기의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이 해냈다.
가톨릭철학,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대교황
제2권. 가톨릭 철학
서론
가톨릭 철학이라는 용어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르네상스까지 유럽 사상을 지배한 철학을 의미한다. 1000년의 기간을 전후로 동일한 대규모 학파에 속한 철학자들이 존재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초기 교부들이 있었고 르네상스 이후에는 얼마간 중세 체계,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계를 오늘날까지 고수하는 정통 가톨릭 철학 교사들을 포함한 수많은 철학자가 있었다.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가톨릭 철학을 종합하거나 완성하는 데 관여한 시대는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르네상스까지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그리스도교를 믿었던 수 세기 동안 스토아학파와 신플라톤학파에 속한 철학자들은 교부들의 능력을 능가했다. 르네상스 이후 걸출한 철학자들은 정통 가톨릭교도조차 스콜라 철학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려 하지 않았다.
교회 일부는 철학자와 관계가 있고 일부는 신경(信經-천주교의 신조를 기록한 경문)에 근거하여 형성된 사회제도다. 교회는 신경을 매개로 권력을 쟁취하고 부를 축적했다. 교회는 로마전통이나 게르만 전통과도 맞서 싸워야 했다.
당대 지성계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성직자였다. 속인도 중세기간 동안 느리지만 강력한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를 형성했으나 그들의 활동은 어떤 점에서 맹목성을 드러냈다.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 교회 문학과 전혀 다른 중요한 세속 문학이 출현했다. 성직자 계급은 14세기까지 사실상 철학을 독점하면서 교회의 관점에서 저술했다.
고대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중세 세계의 특징은 가지각색의 이원성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성직자와 속인의 이원성, 라틴족과 튜턴족의 이원성, 신의 왕국과 현세의 왕국으로 나뉜 이원성, 정신과 육체의 이원성이 나타난다. 갖가지 이원성은 교황과 황제의 이원성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라틴계와 튜턴계의 이원성은 야만인이 침입함으로써 빚어진 결과이지만 다른 이원성의 기원은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톨릭 철학은 서유럽에서 지적 활동이 거의 자취를 감춘 암흑기를 분기점으로 두 시기로 나뉜다. 콘스탄티누스가 개종한 때부터 보이티우스가 죽은 시점까지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의 사상은 현실로든 최근의 기억으로든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6세기 말에 즉위한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의 신하로 자처하지만, 야만인 왕들에게는 주군으로 행세한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시대 이후 서로마 그리스도교 세계 전역에 걸쳐 성직자와 속인을 분리하는 현상이 점차 분명하게 나타난다.
가톨릭 철학의 위대한 제1기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이교도의 대표 격인 플라톤이 지배한다. 제2기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배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보다 훨씬 중요하다.
13세가 가톨릭 철학의 종합은 완벽한 최후의 형태로 자리 잡은 듯 보였으나 다방면의 원인이 영향을 미쳐 파괴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부유한 상인 계급의 성장인데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등장하고 이후 다른 곳에서도 나타났다. 봉건 귀족은 대체로 무지하고 우둔했으며 야만적 특징을 드러냈다. 평민 계급은 지성, 도덕성, 무정부 상태에 대처하는 능력이 귀족 계급보다 뛰어난 교회의 편에 섰다.
중세 말에 가톨릭 철학의 종합을 파괴한 다른 원인은 프랑스 영국 스페인에 강력한 국민군주국들이 발흥한 것이었다. 군주국의 왕들은 내부의 무정부상태를 진정시키고 귀족 계급에 맞서기 위해 상인 계급과 연합하면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교황에게 맞서 싸울 만큼 강해졌다.
가톨릭 철학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제도, 바로 가톨릭교회의 철학이다. 근대 철학은 정동 가톨릭 철학과 거리가 멀 때도 대체로 도덕법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가톨릭 교리에서 갈라져 나온 문제에 관여한다. 특히 윤리학과 정치이론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11세기에 일어난 교회의 도덕 개혁은 스콜라 철학을 직접 이끈 서곡이며 교회가 봉건 제도에 점차 흡수되어 가는 현상에 맞선 반동이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을 이해하려면 힐데브란트(그레고리우스 7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를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악과 싸웠는지를 알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