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바빌론 유수, 이사야서, 마카베오 가문

1. 유대교의 발견

 

로마 제국에서 야만인에게 넘어간 그리스도교는 새 요소로 이루어졌다. 첫째, 확실한 철학적 믿음은 주로 플라톤과 신플라톤학파에서 비롯되지만 부분적으로 스토아학파에서도 유래했다. 둘째, 도덕적 개념 체계와 역사는 유대인에게서 유래했다. 셋째, 전반적으로 그리스도교에 새롭게 더해진 확실한 이론, 특히 구원에 대한 이론은 부분적으로 오르페우스교와 근동 지역의 유사한 숭배 의식에서 유래했다.

구약성서 말고는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 역사를 말해주는 출처가 없으며 더욱이 순수한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이 시작되는 지점이 어디인지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윗과 솔로몬은 역사상 실존한 왕이라고 해도 좋으며 확실한 역사가 시작된 최초 시점에 이미 이스라엘 왕국과 유대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구약성서에서 언급한 인물 가운데 따로 기록이 남은 최초의 인물은 아합으로 기원전 853년 아시리아 말로 쓴 편지에서 이스라엘 왕이라고 전한다.

아시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북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백성을 대부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유대 왕국만 이스라엘의 종교와 전통을 보전했다. 유대 왕국은 기원전 606년 바빌로니아인과 메디아 인이 니네베를 점령함으로써 아시리아가 멸망한 직후까지 존속했다.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왕인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한 다음 유대 왕국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바빌로니아는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의 왕인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함으로써 멸망했다. 키루스는 기원전 537년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많은 유대인이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통솔 아래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인의 독특한 정통 신앙을 구체적으로 확립했다.

유대교는 바빌론 유수* 시기와 이 시기를 전후로 아주 중요한 발전 과정을 거쳤다. 유대민족을 다른 고대 민족과 구별하는 특징은 유대인이 보여 준 불굴의 민족적 긍지였다. 다른 민족은 정복당하면 외면뿐 아니라 내면으로도 복종하곤 했다. 그러나 유대인은 유독 민족적 탁월성을 믿으며 자신들이 겪는 불행이 신앙과 종교의식의 순수성을 잃은 탓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확신했다.

「이사야서」는 두 예언자가 쓴 작품인데 한 예언자는 바빌론 유수 이전 사람이고, 다른 예언자는 바빌론 유수 이후 사람이다. 둘째 예언자는 성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2이사야로 불리며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그는 주님을 “나 말고 신은 없다”라고 말한 존재로 기록한 첫 예언자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데 아마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터다. 그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나중에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도래를 내다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주요 출처로 받아들여졌다.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 시대는 유대 역사에서 결정적 시기였다. 바빌론 유수 이후 유대인 분산 시대의 유대인은 점점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마카베오 가문 출신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유대교를 지켰으며 궁극적으로 교회 성장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이슬람교 역시 일신교의 기원을 유대교에서 찾으므로 마카베오 가문 덕분에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동양과 서양의 일신교가 존재하게 되었다 해도 무방하다.

유대교는 그리스도교도와 마찬가지로 죄에 대해 많이 생각했으나 그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주로 그리스도교의 혁신을 통해 나타났으며 바리새파와 셰리의 비유로 도입되어 율법 학자와 바리새파를 책망한 그리스도의 설교에서 덕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도는 겸손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으나 유대인은 대체로 겸손을 덕으로 여기지 않았다.

유대인은 원래 대부분 농민이었으나 바빌론 유수 기간에 바빌로니아인에게서 무역을 배웠다. 많은 유대인이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 이후에도 바빌론에 머물렀으며 엄청난 부자들도 있었다.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자 대다수 유대인은 도시에 정착했다. 그들은 특별 구역을 지정해 살았는데 유대인 강제 거주 지구가 아니라 이방인과 접촉함으로써 유대인의 순수성이 오염되는 위험을 피하려고 만든 구역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은 옛 유대의 유대인보다 그리스 문화에 훨씬 더 많이 동화되어 히브리어를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이 필요해졌고 그러한 필요의 결과물이 70인 역 성서다. 모세 5경은 기원전 3세기 중엽에 번역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약간 뒤에 번역되었다.

유식한 유대인은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랍어를 구사할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학식이 모자란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풍부한 지식을 전해주었다. 중세 이후 유대인은 문명에 여전히 개인으로서 크게 기여했지만, 민족으로서 기여하지는 않았다.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는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이 신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에게 멸망 당하고 치드키야(시드기야) 왕과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억류되어 약 70년간[1] 포로 생활을 했던 사건을 일컫는다. '유수(幽囚)'는 '유배되어 갇히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그노시스주의, 콘스탄티누스, 삼위일체

2. 초기 4세기 동안의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유대교의 개혁을 목표로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설교한 가르침이었다. 성 야고보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를 개혁하는 수준에 머물기를 바랐고 성 베드로 역시 정도는 덜하지만 그러기를 바랐다. 성 바오로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바라는 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성 바오로는 이방인을 포용하기 위해 할례나 모세 율법의 준수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의 관점에서 두 파벌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기록하고 있다.

그노시스주의*가 철학적 이교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이에 타협의 여지를 마련해 준 까닭은 그노시스파가 그리스도를 공경한 반면 유대인은 나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등장한 마니교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를 거쳐 가톨릭 신앙에 귀의했다. 마니교는 그리스도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를 결합함으로써 악은 물질에 구현된 적극적 원리이고 선은 정신에 구현된 적극적 원리라고 가르쳤다. 마니교는 육식을 비롯해 성과 연관된 모든 행위, 결혼 관계 안의 성교조차 죄로 여겼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리스도교 신학도 발전했다. 유대교 신학은 언제나 단순했다. 야훼는 부족 신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경전의 종합은 오리게네스 시대에 이르기 전까지 계획성 없이 단편적으로 이루어졌을 따름이다. 오리게네스는 필론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는데 알렉산드리아는 상업의 번성과 대학의 발전으로 건설 초기부터 몰락할 때까지 여러 학문이 혼합된 중심지였다.

오리게네스의 장편 저작은 『켈수스 논박』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다.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책의 저자인데 오리게네스는 켈수스의 논점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세세하게 응답한다.

교회 정치 조직은 초기 3세기 동안 느리게 발전했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 이후 빠르게 세력을 넓혀나갔다. 주교들은 일반 투표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각 주교 관구의 그리스도교도에게 꽤 많은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모든 교회를 지배하는 중앙 집권적 정치 형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주교의 권한은 여러 대도시에서 자선을 실천함으로써 한층 커졌다. 신도가 바친 헌금은 주교가 관리하기에 주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까지도 결정했다. 그래서 주교의 뜻에 기꺼이 따르는 궁핍한 무리가 생겨났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주교들이 사법, 행정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가톨릭교도와 아리우스파 신도 사이에 벌어진 다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통거리였다.

교황은 공식적으로 교회를 대표한 가장 중요한 개인이었으나 훨씬 후대에 이르러 비로소 교회 전체를 지배할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리스도교 세계는 두 가지 문제로 계속 들끓었는데 하나는 삼위일체의 본성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육화 교리 문제다. 아타나시우스 시절에는 첫 번째 문제만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교양 있는 사제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지 않으며 성부가 창조한 존재다. 이전 시대에 이러한 견해를 주장했다면 적개심을 품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겠지만 4세기 신학자들은 대부분 아리우스의 견해를 거부했다. 마침내 성부와 성자는 동등하며 같은 실체에 속한다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하지만 성부와 성자의 위격은 서로 달랐다. 성부와 성자의 위격이 다르지 않고 한 존재의 다른 양상일 뿐이라는 견해는 창시자인 사벨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사벨리우스 이단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정통 그리스도교는 좁은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했다.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아리우스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었고 성부와 성자가 하나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사벨리우스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아리우스의 교리를 이단으로 판결했다. 콘스탄티노플과 아시아는 아리우스주의로 기울었으나 이집트는 아타나시우스에 열광했다. 서로마 제국은 니케아 공의회의 신경을 확고부동하게 고수했다.

379년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가톨릭교를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가톨릭교가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승리를 거두었다.

 

 

*그노시스주의 : 그리스도교와 같은 시기에 지중해 세계에서 일어난 종교사상 운동. <그노시스(gnōsis)>는 그리스어로 지식을 의미하는데, 헬레니즘 종교사상의 경우 의미가 한정되어, 인간을 구제로 이끄는 궁극의 지식을 가리킨다.

 

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마니교

3. 교회의 세 박사

 

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 서로마 교회의 박사로 불린다. 이들은 교회의 기틀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교회의 관점에 맞춰 개념적으로 확립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공인된 교회 신학을 비롯하여 종교개혁 이후 루터와 칼뱅이 내세운 교리의 태반을 확립했다.

17세기에 홉스는 교회가 세속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교리를 제거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주로 성 암브로시우스에 반대하는 논증을 펼쳤다. 4세기 말에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밀라노였고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의 주교였다. 그는 국가에 봉사하며 성공할 모든 기회를 잡았다. 암브로시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아버지는 고위 관료로서 갈리아 속주의 사령관이었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로마 군단이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둔해 있던 변방 수비대 도시 트레베스에서 태어났을 개연성이 높다.

암브로시우스는 처음에 황궁과 친하게 지냈고 이탈리아를 침략했을 수도 있던 왕위 찬탈자 막시무스에게 파견될 외교 사절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중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유스티나 황후는 아리우스파였고 밀라노의 한 교회를 아리우스파 신도들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거절했다. 밀라노의 군중은 암브로시우스 편을 들었고 군중이 떼를 지어 대성당으로 몰려들었다. 아리우스파에 속한 고트족 군사들이 대성당을 점령하도록 파견되었으나 민중과 충돌하는 상황을 꺼렸다. 암브로시우스가 보여준 힘의 근원은 민중의 지지였다. 그는 교회의 독립을 둘러싼 한바탕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국가가 교회에 양보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중요한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히에로니무스는 오늘날까지 가톨릭교회에서 공인한 성경 판본인 불가타 성서의 번역자로 유명하다. 히에로니무스의 시대 이전 서로마 교회는 구약성서를 70인 역 성서 번역본에 의존했는데 히브리어 원본과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났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이 그리스도교가 발생한 이래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히브리 성서 원문을 왜곡했다고 주장하곤 했다. 이러한 견해는 건전한 학문 연구를 통해 지지할 수 없다는 점이 밝혀졌으며 히에로니무스도 근거 없는 견해라고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유대인이 두려워 비밀리에 랍비의 도움을 받았다.

히에로니무스는 암브로시우스보다 5년 후인 345년에 아퀼레이아에서 멀지 않은 스트리돈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377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그는 363년 로마로 가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갈리아 속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그는 아퀼레이아에 정착해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암자 또는 동굴에서 거주하며 그날그날 밥벌이를 하고 베옷을 걸친 채 살았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수많은 논쟁에 휘말렸다. 성 바오로가 갈라티아서 2장에서 말한 성 베드로의 의문스러운 행동을 둘러싸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언쟁을 벌였으며 오리게네스와 관련된 논쟁 끝에 친구인 루피누스와 절교하기도 했다. 그는 다마수스 교황이 죽고 나서 새 교황과 언쟁을 벌였는데 이 사건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갔고 그곳에서 386년부터 420년 죽을 때까지 살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히에로니무스보다 9년 후 암브로시우스보다 14년 후 354년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어머니는 그리스도교도였고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한때 마니교도가 되었으나 후에 그리스도교도로 개종하여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396년 카르타고에서 멀지 않은 히포의 주교로 부임했다. 그리고 4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톨스토이와 비슷한 인물이지만 지성은 톨스토이보다 뛰어났다. 청년기의 그는 정열이 넘쳤지만, 진리와 의로움을 추구하려는 내적 충동도 간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엄격한 인생을 살았으며 철학도 인간다움과 점점 멀어졌다.

그는 19세에 뛰어난 수사학 실력을 갖췄으며 키케로의 영향으로 철학에 입문했다. 성경을 읽고 보았지만, 성경에서는 키케로의 철학에 나타난 장중한 문체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직업은 수사학 교사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났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친절에 감동 받고 흠모하면서 마니교의 교리보다 가톨릭 교리를 더욱 강하게 믿었다. 한동안 그는 아카데메이아학파에서 배운 회의주의에 경도되어 망설이기도 했으나 “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 병든 영혼을 그들에게 돌봐달라고 맡기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내적 투쟁 끝에 개종했다. 교수직, 애인, 신부를 차례로 포기하고 짧은 기간을 은거하며 명상한 다음 성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받았다. 어머니가 누구보다 기뻐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388년에 그는 아프리카로 돌아가 남은 생을 주로 직무 수행과 여러 이단, 바로 도나투스파와 마니교, 펠라기우스주의에 맞서 논쟁하는 글쓰기에 전념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신국, 순수철학, 펠라기우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신학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쓴 저술가이며 주로 신학적 주제로 글을 썼다. 펠라기우스파와 관련된 저술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순수 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순수한 사변적 견해가 성서와 일치되어야 할 필요의 영향을 받은 첫 인물이다. 그의 저서 가운데 순수 철학에 속한 최고의 작품은 『고백록』 11권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조를 원시 물질과 관련짓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르다. 그는 세계가 물질이 아닌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신은 질서와 배열뿐만 아니라 물질도 창조했다. 세계가 창조되는 순간에 시간도 창조되었다. 신은 무시간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영원하다. 신 안에 이전과 이후는 없고 영원한 현재만 있다. 그는 과거도 미래도 현실적으로 있지 않고 현재만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현재는 순간일 뿐이고 시간은 오로지 지나가는 동안 측정될 따름이다. 과거는 ‘기억’과 동일시하고 ‘미래’는 기대와 동일시하며, 기억과 기대는 현재에 속한 사실들이다. 그는 세 가지 시간, 곧 ‘과거’에 일어난 일의 현재,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현재, 미래에 일어날 일의 ‘현재’가 있다고 말한다.

시간에 대한 이론은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시대 이후 고대 세계에서 점차 증가했던 가장 극단적 형태의 주관주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종류의 주관주의를 드러낸다. 이는 칸트의 시간 이론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라는 주장도 미리 보여준다.

 

2) 신국

 

『신국』은 중세 내내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으로 특히 교회가 세속 군주들과 투쟁할 때 영향력을 과시했다. 로마가 고트족의 점령으로 약탈당할 때 발생한 문제점을 고찰하면서 시작된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이전 시대에 일어난 훨씬 더 참혹한 사건을 보여주려고 기획되었다.

로마는 사비니 여자들의 겁탈 이후 언제나 사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의 여러 장에서 로마 제국주의가 빚어낸 죄악상을 다룬다.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기 전에 로마가 고통을 겪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 11권에서 신국의 본성에 관해 설명한다. 신국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다. 신에 대한 지식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다. 철학자들처럼 지식을 이성으로 발견할 수도 있으나 더 높은 종교적 지식을 얻으려면 성서에 의존해야 한다.

세계가 6일 동안 창조된 까닭은 6이 완전수, 비로 자신과 약수의 합이 같은 수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욕을 아담의 죄 탓에 우리가 받은 벌의 일부라 말하며 이를 논의하는데 금욕주의에 대한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세계는 두 나라로 나뉘어 한 나라는 신이 영원히 다스리고 다른 나라는 사탄에게 맡겨져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카인은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에 속하고, 아벨은 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속한다. 아벨은 은총으로 예정된 운명에 따라 지상의 순례자이자 천국의 시민이었다. 이스라엘 족장들도 신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부활에는 두 가지, 곧 죽을 때 일어나는 영혼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날에 일어나는 육신이 부활이 있다.

『신국』은 하늘에 있는 신과 신국의 영원한 복락을 보여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환영을 묘사하며 끝난다. 후세에 영향을 미친 사상은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고 국가란 신국에 속한 일부에 불과하므로 종교와 관련된 문제라면 모두 교회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분명한 가르침이다. 이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교회의 교리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교황 권력이 커진 시기뿐만 아니라 교황과 황제가 갈등을 빚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로마 교회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공했다. 판관기에 나오는 전설의 시대와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후 역사 시대의 유대 국가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당연히 유대 국가의 정교일치를 모방했을 것이다.

 

3) 펠라기우스 논쟁

펠라기우스는 웨일스 사람으로 실제 이름은 ‘뱃사람’을 뜻하는 모건이고 그리스어로 펠라기우스라고 부른다. 그는 교양있고 호감을 주는 정통 그리스도교도로서 많은 동시대인보다 광신에 빠져든 정도가 약했다. 자유의지를 믿고 원죄설에 의문을 제기한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덕을 행한다면 그것은 도덕을 따르려는 인간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올바르게 행동하는 정통 그리스도교도라면 덕의 보상으로 천국에 갈 것이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견해는 오늘날 상식처럼 보일지 몰라도 당대에 대소동을 일으켰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노력을 통해 대부분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이단 사상은 한때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에게 교활한 이단 사상의 창시자를 경계하라는 취지로 편지를 써야 했는데 펠라기우스가 많은 동로마 교회의 신학자를 설득해 자신의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비로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순수한 가르침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에서는 529년 오랑주 공의회에서 유사 펠라기우스 이단을 최후로 단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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