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피시스, 에우클레이데스, 아르스타르코스

23.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자연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이해하려면 그가 상상한 배경을 파악해야 한다. 자연학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상한 배경은 근대 물리학자의 경우와 전혀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그리스인이 ‘피시스’라고 불렀던 것에 관한 학문이며, 피시스는 ‘자연’으로 번역되지만 정확하게 자연이라는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도 ‘자연과학’이나 ‘자연사’란 말을 사용하지만 ‘자연’이란 말을 아주 모호하게 사용하더라도 ‘피시스’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피시스란 성장과 관련이 있다. 도토리의 ‘본성’은 도토리나무로 성장하는 것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의미로 ‘피시스’란 말을 사용한 셈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물의 ‘본성’은 사물의 목적이며 사물은 그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피시스’란 말은 목적론을 함축한다. 어떤 사물은 본성에 따라 존재하고 어떤 사물은 외부 원인에 따라 존재한다. 동물, 식물, 단순 물체(원소)는 본성에 따라 존재하기 때문에 운동의 원리를 내부에 지니고 있다.

본성은 운동과 정지의 기원이다. 사물이 이러한 종류의 내적 원리를 지니고 있다면 ‘본성을 가진다’, ‘본성에 따라서’라는 구의 본성을 가진 사물과 그것의 본질적 속성에 적용된다. 본성은 질료보다 형상 속에 있다. 잠재적으로 살이나 뼈인 것은 아직 그것 자신의 본성을 획득하지 못했고 어떤 사물은 실현되었을 때에 있는 것 이상의 존재다. 생물학에서 이러한 관점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도토리는 잠재적으로 도토리나무다.

자연학은 형이상학과 관련지어 고찰했던 부동의 원동자에 대한 논증으로 마무리된다. 부동의 원동자 하나가 존재하고 이것이 직접적으로 원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원운동은 제일 운동으로서 무한히 계속 일어나는 유일한 운동이다. 제일 원동자는 부분도 크기도 없으며 세계의 둘레에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론』에서 우스꽝스럽고 단순한 이론을 제안한다. 달 아래쪽 사물은 생성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지만 달 위쪽에 존재하는 만물은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지구는 구형이며 우주의 중심이다. 달 아래쪽에서 만물은 흙, 불, 물, 공기의 4원소로 구성된다. 그러나 제5원소가 존재하며 이것이 천체를 구성한다. 지상의 사물을 이루는 원소들의 자연스러운 운동은 직선이지만 제5원소는 원운동이다. 천체는 완벽하게 구형이며 상층부에 있는 전체가 하층부에 있는 천체보다 더 신성하다. 별과 행성은 불이 아니라 제5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운동은 그것들이 부속되어 있는 원운동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이론은 후대에 갖가지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24. 초기 그리스의 수학과 천문학

 

그리스인의 걸출함은 다른 분야보다 수학과 천문학에서 나타난다. 그리스인은 수학의 일부를 이집트에서 도입했으며 바빌로니아에서는 오히려 적게 받아들였다.

2의 제곱근은 최초로 발견된 무리수이고 초기 피타고라스학파에 알려졌으며 그것의 근사치를 구하는 기발한 방법들을 찾아냈다. 프로클로스는 기하학을 교양 교육으로 확립한 첫 인물로 묘사한다. 플라톤은 무리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에서 테오도로스와 테아이테토스의 연구 성과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법률』에서 무리수 문제의 일반적인 내용을 모른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무리수를 알게 되었음을 함축한다. 무리수 문제의 중대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에우독소스의 기하 비례론이다.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은 위대한 저술 가운데 하나로 그리스인의 지성이 드러난 기념비적 업적이다. 물론 그리스인의 전형적 한계도 보여준다. 에우클레이데스를 언급한 최초의 로마인은 키케로이다. 서기 760년경 비잔틴 황제가 칼리프에게 『기하학 원론』을 전했고 하룬 알 라시드가 통치하던 서기 800년경에 아랍어 번역본이 나왔다. 지금까지 남은 최초의 라틴어 번역본 애덜라드가 1120년에 아랍어 번역본을 번역한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구형이라고 생각한 최초의 인물이지만 그가 제시한 건 과학적이기보다 미학적이었다. 아낙사고라스는 달이 반사광 때문에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정확한 일식 이론과 월식 이론을 내놓았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더 나아가 지구를 행성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다.

오이노피데스는 황도의 경사각을 발견했다. 곧이어 태양이 지구보다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이 사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란 주장을 부정했던 사람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헤라클레이데스는 금성과 수성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24시간마다 한 번씩 자전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아리스타르코스는 대략 기원전 310년부터 230년까지 살았기에 아르키메데스보다 스물다섯 살 정도 나이가 많았고 고대의 모든 천문학자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지구를 비롯한 모든 행성이 태양 주위로 원을 그리며 운동하고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24시간에 한 번씩 자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과 완벽하게 들어맞는 학설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스 천문학은 역학이 아니라 기하학과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천제가 등속운동을 하며 원 운동하거나 복합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3세기에 가장 위대한 두 철학자, 아르키메데스와 아폴로니오스는 그리스의 일급 수학자 명단에 마지막으로 이름을 올린다. 아르키메데스는 수학자일 뿐만 아니라 물리학자로서 유체 정역학을 연구했다. 아폴로니오스는 주로 원뿔곡선 연구로 주목을 받았다.

 

헬레니즘, 알렉산드로스, 불교, 점성술

제3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 철학

 

25. 헬레니즘 세계

 

고대 그리스어 문화권에 속한 세계의 역사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는 자유 도시국가 시대다. 이시기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등장으로 멸망했다. 둘째는 마케도니아 통치 시대다. 이 시기의 마지막 잔재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다음 로마가 이집트를 합병하면서 소멸했다. 마지막 시기는 로마 제국 시대다. 첫 시기의 특징은 자유와 무질서이고 둘째 시기는 복종과 무질서이며 마지막 시기는 복종과 질서다.

둘째 시기가 헬레니즘 시대로 알려졌다. 이때 과학과 수학의 성과는 예전과 다름없이 그리스인의 업적이며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철학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기초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회의주의를 명확한 형식의 학설로 정립한다. 서기 3세기에 신플라톤학파가 등장한다. 그러는 사이 로마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승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짧은 생애로 그리스 세계가 급변했다. 기원전 334년부터 324년까지 10년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사마르칸트, 박트리아, 펀자브 지역을 정복했다, 가장 큰 나라로 알려진 페르시아 제국은 세 차례 전투 끝에 멸망했다. 바빌로니아의 지식과 고대의 미신이 호기심 많은 그리스인에게 알려졌다.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을 비롯해 정도는 덜하지만, 불교가 최고 지위를 차지한 인도의 갖가지 종교에도 익숙해졌다.

그리스는 본질적으로 도시 문명이었다. 물론 많은 그리스인이 농업에 종사했으나 고대 그리스 문화에 뚜렷한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의 상상력에 오래도록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다음 수 세기의 역사를 기록한 『마카베오 1서』는 그의 생애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슬람교에서도 전설적 영웅으로 남았으며 오늘날까지도 히말라야 산지의 족장들은 자신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예라 주장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나서 제국은 세 장군 가문이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영지를 분할해 통치하게 되었다.

2세기 동안 파르티아인이 페르시아를 정복했으며 박트리아 왕국을 세운 그리스인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쇠퇴의 길로 접어든 기원전 2세기, 박트리아의 그리스인들에게 메난드로스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의 인도 제국은 아주 넓었다. 메난드로스 왕과 불교 성자가 나눈 대화 두 편이 팔리어로 전해졌으며 일부는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불교는 기원전 2세기 무렵 활발하게 전파되던 종교였다. 불교 성자이자 왕인 아소카는 지금도 현존하는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의 모든 왕에게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는 바빌로니아에 훨씬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유대를 제외한 시리아의 도시들은 언어와 문학에 관한 한 헬레니즘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와 유대인 사이에 빚어진 첫 갈등은 『마케베오서』에 기록되어 있다. 첫 갈등을 다룬 이야기는 마케도니아 제국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 대단히 흥미롭다.

알렉산드로스의 찬란한 정복의 시간이 지난 다음 헬레니즘 세계가 혼돈에 빠진 까닭은 안정된 지배권을 행사할 만큼 강한 참주가 나타나지 않은 데다 사회 결속을 다질 만큼 강력한 원리를 확립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리스인의 지성은 새로운 정치 문제에 직면하자 무능력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로마인이 그리스인보다 둔하고 난폭하다는 점을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로마인은 적어도 질서는 확립했다.

점성술은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베로수스라는 칼데아인이 처음 그리스인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이는데 베로수스는 코스에서도 가르쳤으며 세네카에 따르면 벨신의 통역사였다고 한다. 최고 철학자 가운데 다수가 점성술에 빠져들었다. 점성술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필연이나 숙명의 신앙과 연결되지만 이러한 신앙은 널리 퍼졌던 운명 신앙과 대립하기도 했다. 물론 사람들은 대부분 필연과 운명을 둘 다 믿으면서도 두 신앙 사이에 내재한 모순을 결코 알아채지 못했다.

 

키니코스학파, 회의주의학파, 디오게네스, 안티스테네스, 클리토마쿠스

26. 키니코스학파와 회의주의학파

 

그리스도교의 내세관을 예비한 심리 구조는 헬레니즘 시대에 시작되며 도시국가의 쇠퇴와 관계가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대체로 우주 전체를 절망적으로 바라보거나 정치적으로 무력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처럼 현상계를 비난하고 신비주의로 도피하려던 철학자들조차 지배 계급을 성자나 현자로 변모시킬 실천 계획을 세우곤 했다. 정치 권력이 마케도니아인의 손으로 넘어가자, 그리스 철학자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개인의 덕이나 구원 문제에 더욱 몰두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철학의 네 학파는 알렉산드로스 시대 즈음에 세워졌다. 가장 유명한 두 학파인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그리고 키니코스학파와 회의주의학파이다.

키니코스학파는 디오게네스가 창시자였지만 플라톤보다 20세쯤 연상인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에서 유래한다. 안티스테네스는 비범한 성격의 소유자로 어떤 면에서 톨스토이와 흡사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후에도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로 구성된 귀족 사회에 소속되었으며 비정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선을 추구했으며 노동자들과 교제하며 노동자의 옷을 입었다. 야외설교를 즐겨 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가르쳤다. 그는 자연 회귀를 믿었으며 사치와 인위적으로 자극한 감각적 쾌락 추구를 경멸했다.

안티스테네스의 명성은 제자인 디오게네스에 가려졌다. 디오게네스는 개처럼 살기를 결심했기에 ‘개’를 의미하는 ‘견유’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종교든 예절이든 옷차림이든 집이든 음식이든 체면이든 인습이라면 전부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를 찾아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햇빛만 가리지 말아 주시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디오게네스는 우리가 ‘냉소적이다’ 말하는 것과 정반대 학설을 가르쳤다. 그는 ‘덕’을 성취하려는 열정으로 불탔으며 덕에 비해 현세의 좋다는 것들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욕망에서 해방됨으로써 덕과 도덕적 자유를 얻으려 했다.

기원전 3세기 초에 키니코스학파가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행했다. 통속적 키니코스학파의 사상은 현세의 좋은 것을 피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그저 냉담하라고 했을 뿐이다. 키니코스학파의 최고 수준에 속한 학설이 스토아학파로 흘러 들어가 완전하고 원숙한 철학으로 발전했다.

회의주의는 회의주의학파가 내놓은 학설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소속되어 인도까지 출정한 적이 있던 피론이 처음 공표했다. 그의 학설은 신선하다는 평가를 들을만한 점이 별로 없으며 예전에 제기된 의문들을 체계화하고 형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어떤 행동을 다른 행동보다 더 좋거나 더 낫게 볼 합리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이 어느 나라에 살든 그 나라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회의주의는 자연스럽게 철학 정신과 거리가 먼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학파 사이에 벌어진 신랄한 논쟁을 지켜보며 모두 비슷하게 사실은 도달할 수 없는 지식을 가진 양 가장한다고 단정했다. 회의주의가 게으른 사람에게 위안을 준 까닭은 무지한 사람도 평판이 좋은 지식인 못지않게 지혜롭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복음이 필요한 사람은 회의주의에 만족하지 못하겠지만 회의주의는 헬레니즘 시대에 출현한 여느 학설과 마찬가지로 근심을 떨쳐내 버리는 해독제로서 권장되었다.

제3아카데메이아의 학장이었던 카르네아데스의 다음 수장은 카르다고 사람으로 실명이 하스드루발이었다. 강연만 하던 카르네아데스와 달리 클리토마쿠스는 4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으며 페니키아어로 쓴 책도 몇 권 있다. 클리토마쿠스가 따른 원칙은 카르네아데스의 원칙과 같았다. 두 회의주의자는 당대에 점점 퍼지고 있던 신성, 마법, 점성술을 믿는 경향에 대항했다.

클리토마쿠스 이후 아카데메이아는 회의주의 경향을 더는 나타내지 않았고 안티오코스 시대부터 아카데메이아에서 나온 학설은 수 세기 동안 스토아학파의 학설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았다.

크노소스 출신인 크레타인 아이네시데모스가 회의주의를 부활시켰는데 그는 카르네아데스가 지지한 개연성 학설을 저버리고 초기 회의주의로 되돌아갔다. 서기 2세기에 풍자시인 우리안이 아이네시데모스를 추종했고 조금 뒤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도 추종자가 되었는데 그는 후대에 저작을 남긴 유일한 고대 회의주의 철학자였다.

회의주의는 서기 3세기 무렵까지 교양을 갖춘 일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지만, 점점 독단적 종교와 구원의 교리로 기울어지던 시대의 추세와 반대되는 경향이었다. 회의주의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국가 종교에 불만을 느끼게 할 만한 힘은 지녔으나 순수하게 지적인 영역에서도 국가 종교를 대신할 만한 적극적 요소는 하나도 제공하지 못했다.

 

에피쿠로스학파, 쾌락, 루크레티우스

27.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는 사상의 기초가 같은 시대에 세워졌다. 창시자는 제논과 에피쿠로스이며 거의 같은 시대에 태어나 몇 년 차이로 각자 학파의 수장으로 아테네에 정착했다. 에피쿠로스 생애에 관하여 믿을 만한 권위자는 서기 3세기에 살았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다. 에피쿠로스의 아버지는 사모스에 정착한 가난한 아테네 주민이었다. 그는 기원전 342년이나 341년에 태어났으며 소년기를 사모스에서 보냈다.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11년 처음 미틸레네에서 학파를 세운 다음 람프사코스에 이어 307년 이후 아테네에 학파를 세웠고 기원전 271년 또는 270년 아테네에서 죽었다.

에피쿠로스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우정을 맺는 아주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인물로 공동체에 소속된 회원들의 어린아이들에게도 상냥하고 유쾌한 편지를 쓰곤 했다. 그의 편지는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공동체 생활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했는데 한편으로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돈이 부족해서다.

에피쿠로스는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아 병에 시달렸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법을 터득했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은 스토아학파가 아니라 에피쿠로스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신사답고 친절했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오만하고 전체적인 독단주의에 빠지는 과오를 저지르고 만다.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들은 그가 가르친 학설들을 담은 일종의 신경을 배워야 했는데 의문 제기는 용납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그는 쾌락을 선이라고 여기고 이러한 견해에서 나올 만한 모든 결론을 일관성 있게 고수했다. 그는 “쾌락은 축복받은 삶의 시초이자 목적이다.”라고 말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삶의 목적』에서 “미각의 쾌락을 버리고, 사랑의 쾌락과 청각과 시각의 쾌락을 버린다면 나는 선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라며 에피쿠로스의 말을 인용한다.

에피쿠로스는 능동적 쾌락, 수동적 쾌락, 동적 쾌락, 정적 쾌락을 구별한 점에서 이전의 쾌락자들과 다르다. 동적 쾌락은 목적을 달성하고 고통이 동반되던 이전의 욕망을 충족시킬 때 얻는다. 정적 쾌락은 없으면 바라는 사태의 실존에서 비롯되는 평형 상태에서 얻는다.

성적 사랑은 눈에 띄는 동적 쾌락 가운데 하나로 당연히 금지되었다. 에피쿠로스는 “성교는 결코 인간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성교가 인간을 해치지 않았다면 운이 좋은 셈이다.”라고 선언한다. 그가 사회생활에서 제일 안전하게 여기는 쾌락은 우정이다.

에피쿠로스는 두려움을 피하는 문제 때문에 이론 철학에 이끌렸다. 그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두 근원이 종교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데, 종교가 죽음은 불행이라는 견해를 장려하기에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자였으나 결정론자는 아니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를 추종하여 세계가 원자들과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와 달리 원자들이 언제나 완전히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지 않았다.

에피쿠로스의 출중한 제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시대에 살았던 시인 루크레티우스뿐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 자유 사상이 유행하면서 에피쿠로스의 학설이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율리우스 아우구스투스가 의고주의를 도입하여 고대의 덕과 고대 종교를 부활시키면서 루크레티우스의 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인기가 없어졌으며 르네상스 시대까지 그러했다. 시의 필사본 한 부가 유일하게 중세 이후까지 전해졌고 완고한 고집쟁이들에게 파괴될 뻔한 순간을 가까스로 모면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운문으로 쓴 에피쿠로스의 철학이다. 두 사람은 같은 학설을 주장하지만 기질은 전혀 다르다. 루크레티우스는 열정이 넘쳤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보다 사려의 권고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주로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 이후 독자들에게 알려졌다. 독자들은 전문적 철학자들이 아니었는데도 유물론, 섭리의 부정, 영혼 불멸의 거부 같은 문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에피쿠로스의 복음은 어느 시기든 대중의 마음을 폭넓게 사로잡을 수 없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철학자들도 일반적으로 스토아 철학을 지지하고 에피쿠로스의 복음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에피쿠로스와 유사한 학설을 부활시켰고 벤담과 그의 추종자들이 영국에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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