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플라톤,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변론

11.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중간 계층 시민이었고 일생을 논쟁으로 보냈으며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쳤으나 소피스트들과 달리 돈을 받지는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두 제자,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스승에 관해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소크라테스에 대해 전혀 다르게 이야기한다.

크세노폰은 군인 출신으로 뛰어난 자력을 타고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야도 관습에 얽매어 답답한 인물이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현실에 괴로워하며 기소장의 내용과 정반대로 주장한다.

플라톤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상상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작가였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는 대화편 속에 이어진 대화들이 자신이 기록한 그대로 일어나 난 듯 가장하는 무모한 짓은 결코 한 적이 없다. 플라톤은 허구를 창작하는 작가로서 보여 준 탁월한 능력 때문에 역사가로서 지닌 재능을 의심받게 된다. 플라톤이 창작한 소크라테스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비상하게 흥미를 자아내는 인물이어서 보통 사람의 능력으로는 지어낼 수 없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기록했다고 생각되는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변론』뿐이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연설한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물론 법정 속기 기록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벌어지고 몇 년이 지나서 플라톤이 기억한 내용을 문학적 기교로 다듬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대한 주요 사항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사악한 자이며 땅 아래에 있는 것과 하늘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괴상한 사람이고 나쁜 명분을 좋은 명분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에 능한 데다 그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까지 한다.”라는 고소장에 따라 기소되었다.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자들은 민주주의 당파에 속한 아니토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은 듬성듬성한 데다 메부리코가 두드러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젊은 비극 시인 멜레토스, 우중충하고 모호한 웅변가 리콘이었다. 이들은 소크라테스가 국가에서 받드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고 다른 신을 새로 들여와 젊은이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유죄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기소한 자들의 웅변을 꾸짖고 자신에게 적용된 고소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웅변은 진실을 말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일찍이 델포이 신전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는지 물었더니 없다는 신탁이 나왔다고 말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신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기에 무척 당황했다고 고백한다.

『변론』은 특정한 유형에 속한 인간의 초상을 선명하게 그린다. 그는 자기 확신에 찬 고매한 품성을 갖췄고 세속적 성공에 무관심하며 신의 목소리에 인도받는다고 믿고 명료한 사고야말로 옳은 삶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설득하는 사람이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소크라테스가 신탁 혹은 다이몬의 지도를 받았다는 주장을 의심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것이 어떤 그리스도교가 양심의 소리라고 부른 것인지 그에게 실제 목소리가 나타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잔 다르크도 목소리로 영감을 받았다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정신 이상의 공통된 징후로 간주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강직증성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고 전한다.

플라톤이 그려낸 소크라테스는 스토아학파와 키니코스학파를 예상하게 만든다, 스토아학파는 최고선이 덕이며 외부 원인으로 덕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학설은 배심원들이 자신을 해칠 수 없다던 소크라테스의 주장 속에 암시되었다. 소크라테스가 과학 문제보다 윤리 문제에 더 몰두했다는 점도 확실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윤리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플라톤이 그려낸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지혜로울 뿐이지만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덕과 지식의 밀접한 관계는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의 공통된 특징이다.

 

스파르타,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 영웅전, 국가

12. 스파르타의 영향

 

스파르타는 그리스 사상에 이중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현실과 신화가 각각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실적 측면에서 아테네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으며 신화적 측면에서 플라톤의 정치 이론과 후대에 등장한 수많은 저술가의 정치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의 생애』에 등장하는데 스파르타의 신화가 추구한 이상은 후대에 루소와 니체의 학설을 비롯해 국가 사회주의의 형성에도 큰 역할을 했다.

라코니아는 스파르타 혹은 라케다이몬의 수도이며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동부 지역을 가리켰다. 지배층을 형성한 스파르타인은 원래 도리아족으로 북방에서 침입하여 라코니아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모두 노예로 삼은 다음 ‘헬리오타이’라고 불렀다. 헬리오타이는 스파르타인처럼 그리스인이었기에 노예 처지를 매우 비통하게 느끼며 분개했다. 그들은 기회만 오면 반란을 일으켰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이웃 나라인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주민들을 대부분 노예 신분으로 강등시켰다. 부지는 스파르타의 평민에게 분할되었다. 라코니아의 다른 지역에 거주한 자유민은 ‘페리오이코이’라고 불렀는데 참정권은 없었다.

스파르타의 시민들은 오로지 전쟁과 관련된 일을 할 뿐이며 태어나면서부터 훈련을 받아야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각 부족장이 검사한 후 병약한 아이는 내다 버렸으며 건강한 아이들만 가르치도록 허가했다. 훈련의 목적은 강인하고 고통에 무심하며 훈육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스파르타 시민이라면 누구든 금이나 은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돈을 철로 만들었다. 스파르타의 검소한 생활은 널리 알려졌다.

스파르타에서 여자들의 지위는 특이했다. 소녀는 소년과 같은 체육 과정을 이수했다. 게다가 소년과 소녀가 모두 벌거벗은 채 함께 체력 단련을 했다.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복잡했다. 다른 두 가문 출신의 세습된 두 왕이 지배하는 이원왕정체제였다. 왕들은 30인으로 구성된 원로회의의 일원이었고 다른 28인은 60세 이상으로서 시만 전체가 참여해 종신직으로 선출했으며 귀족 가문 출신만 원로회의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원로회의는 형사 소송을 심리했으며 민회에 의제로 제출할 안건을 준비했다.

민회는 시민 전체로 구성되며 안건을 발의할 수 없었으나 제출된 법안의 통과 여부를 투표로 결정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두 명의 왕, 원로회의, 민회에 더하여 스파르타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고유한 넷째 요소가 있다. 바로 5인 감독관이다. 감독관은 스파르타 정치체제의 민주적 요소로서 분명히 왕의 권력을 견제하며 균형을 맞추려는 대안이었다.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후기 고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가 확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885년에 법률로 공포했다고 전한다. 스파르타의 체제는 점진적으로 성장했으며 리쿠르고스는 신화 속의 인물로 원래는 신이었다. 그의 이름은 ‘늑대를 쫓는 자’를 뜻이며 아르카디아 출신으로 알려졌다.

오랫동안 스파르타 군대는 지상에서 무적의 강자로 군림하며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 군대에 패배한 기원전 371년까지 패권을 장악했다. 이 전투에 패배한 뒤로 스파르타 군대가 누린 위대한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사람들의 상상 속에 면면이 이어진 스파르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묘사한 스파르타가 아니라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에서 묘사한 스파르타와 플라톤이 『국가』에서 철학을 통해 이상적으로 그려낸 스파르타다. 수 세기에 걸쳐 젊은이들은 위의 책을 읽으며 리쿠르고스가 되거나 철인 왕이 되려는 야심을 불태웠다. 이상주의와 권력 애가 통홥된 결과로 인간은 몇 번이나 길을 잃었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헤매고 있다.

중세와 근대에 독자들에게 알려진 스파르타의 신화는 주로 플루타르코스가 정리해서 고정한 것이었다. 그가 『영웅전』을 썼을 당시, 스파르타는 낭만적 과거에 속해 있었다. 스파르타의 전성기는 콜럼버스가 우리 시대와 멀 듯 플루타르코스가 살았던 시기보다 훨씬 이전 시대였다.

 

스파르타의 시민은 용무가 없다면 여행이 허락되지도 않았고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외국의 낯선 풍습이 스파르타 시민들의 덕을 타락시킬까 두려워했다.

 

플라톤, 국가, 이상향, 정의

13. 플라톤 사상의 근원

 

플라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섯 가지다. 첫째는 이상향으로 기나긴 이상향 역사 속에 최초로 등장한다. 둘째는 이상론인데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보편자 문제를 다룬 선구적 시도로 평가된다. 셋째는 영혼 불멸을 지지하는 논증이고, 넷째는 우주론이며 다섯째는 지각이 아닌 상기로 여기는 지식 개념이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기원전 428년과 427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배했을 당시 플라톤은 젊은 나이였고 패배의 원인을 민주정치 탓으로 돌렸는데 자신의 귀족 신분과 가족 관계로 인해 민주주의를 경멸했을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은 후세 사람들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편협한 제안을 치장하는 기술이 뛰어났기에 사람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안한 내용을 미처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철학적으로 플라톤에게 영향을 준 철학자들도 플라톤이 스파르타를 지지하기 쉽게 만들었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가 그들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에 스며든 오르페우스교의 요소를 피타고라스로부터 이끌어 냈다. 종교적 경향과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 내세관, 사제 같은 어조, 동굴의 비유에 포함된 모든 가르침뿐만 아니라 수학을 중시하는 경향, 지성과 신비주의가 뒤섞인 특징이 피타고라스에서 유래했다.

파르메니데스로부터 현실이 영원하고 시간을 초월하며 논리적 근거에 입각해 모든 변화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계승했다.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감각 세계에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부정적 학설을 이끌어냈다, 소크라테스로부터는 윤리적 문제에 몰두하는 성향과 세계를 기계론이 아니라 목적론으로 설명하는 경향을 배웠을 것이다.

 

14. 플라톤의 이상향

 

『국가』는 플라톤의 가장 중요한 대화편이며 대략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부분에서는 이상 국가의 구조를 설명한다. 이상 국가론에서는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6권과 7권에서는 ‘철학자’라는 말을 정의한다. 셋째 부분은 여러 형태의 실제 정치 체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논의한다. 『국가』의 명목상 목적은 ‘정의’라는 말을 정의 내리는 것이다.

플라톤은 시민을 세 계급으로 나눈다. 평민 계급, 군인 계급, 수호자 계급이다. 수호자 계급만 정치 권력을 가지며 수호자 계급은 다른 두 계급보다 그 수가 훨씬 적다.

교육은 음악과 체육으로 나뉘는데 현재의 의미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포함한다. ‘음악’은 뮤즈 신이 관장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키고 ‘체육’은 체력 훈련과 건강에 관한 모든 영역을 가리킨다. 음악은 우리가 문화라고 할 정도로 넓은 의미로 쓰이며 체육은 우리가 운동 경기라 부르는 의미보다 넓게 쓰인다.

플라톤은 수호자 계급에게 철저한 공산주의를 제안하며 군인 계급에게도 같은 제안을 한다. 수호자들은 작은 집에서 살며 간소한 음식을 먹는다. 그들은 군대 막사에서 사는 경우처럼 동료들과 공동으로 밥을 먹으며 생활해야 한다. 필요 이상으로 사유재산을 소유해서도 안 된다. 금과 은의 소유는 당연히 금지된다. 이상 국가의 목적은 전체 국가의 선이지 한 계급의 행복이 아니다. 부와 가난은 둘 다 해롭기 때문에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는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전번에 걸쳐 다룬 명목상의 목표인 ‘정의’를 정의 내리는 방법은 4권이다. 정의는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몫을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데서 실현된다고 한다. 국가는 상인 계급, 보조 계급, 수호자 계급이 각각 자기 몫을 하고 계급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면 정의롭다.

법률 분야에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정의’라는 말은 정치에 관한 사변에서 쓰는 정의보다 플라톤의 개념과 유사하다. 우리는 민주주의 이론의 영향으로 정의와 평등을 결합하지만, 플라톤의 정의 개념은 그러한 결합을 함의하지 않는다. ‘법’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정의’는 ‘정의의 법정’이라는 경우처럼 주로 재산권과 관계가 있으며 평등과는 관련 없다.

플라톤의 국가는 근대에 등장한 이상향과 달리 아마도 실제로 세우려고 계획되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건립은 우리에게 당연하게 보이듯 공상에 그치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스파르타는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한 몇 가지를 비롯해 이상 국가에 필요한 여러 조건을 실제로 갖추었다. 피타고라스가 철인 통치를 꿈꾼 후 플라톤 시대에는 피타고라스학파에 속한 아르키타스가 타라스의 정치에 영향을 미쳤는데 플라톤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를 방문할 무렵이었다. 당시에 도시국가들은 법률을 제정하게 되면 관례에 따라 현자를 고용했다. 솔론은 아테네를 위한 법률을 제정했고 프로타고라스는 투리를 위한 법을 제정했다.

 

플라톤이 우연히 가게 된 시라쿠사는 거대한 상업 도시였는데 카르타고와 가망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운에 휩싸인 분위기에서 철학자가 성취할 일은 많지 않았다. 이 같은 이유로 소규모 도시국가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고 정치실험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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