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매매, 베네딕투스 9세, 그레고리우스 6세, 레오 9세, 안셀무스

19. 11세기 교회 개혁

 

11세기가 막을 내릴 무렵에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사라센족은 노르만족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쫓겨났고 헝가리족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더는 약탈하지 않았으며 노르만족은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정복함으로써 스칸디나비아족의 침략에서 벗어났다.

초기 단계의 개혁 운동은 주창자의 정신에 따라 도덕적 동기로만 행동하게 했다. 성직자 계급은 수도회에 속한 성직자든 세속 생활을 하는 성직자든 부패하고 타락했기에 정직한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원칙에 더 적합한 생활을 하도록 촉구하는 일에 착수했다.

사제는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서 분리된 권력 계층을 형성했으나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성직자와 속인은 서서히 구별되었다. 성직자 계급은 특정한 기적의 권능, 특히 평신도가 거행할 수도 있었던 세례식을 제외한 성사에 관한 권능을 소유했다. 성직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사면도 받지 못했으며 병자성사도 불가능했다. 중세에는 실체변화설이 훨씬 더 중요했으므로 사제만이 미사의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 실체변화설 교리는 그리스도교도 전체가 오래도록 믿었으나 11세기인 1079년에 비로소 신앙의 조목으로 명시되었다.

성직자의 기적의 권능은 군대의 선두에 선 군주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성직자의 권력은 두 가지에서 제한받았다. 하나는 분노한 속인의 앞뒤 가리지 않는 무모한 감정의 폭발이고, 하나는 성직자 사이에 생긴 분열이다.

성직자 계급 전체의 권력 형성은 성직자 개개인의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모든 개혁 성직자가 온 힘을 다해 반대했던 최고의 악습은 성직매매와 축첩이었다. 교회는 독실한 신자의 자선과 기부로 부를 축적했다. 많은 주교가 막대한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지역 교구의 사제도 풍요한 삶을 영위했다. 주교 임명권은 실제로 왕의 수중에 있었으나 때로는 왕에게 예속된 봉건 귀족의 손에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왕의 주교 관할구 매매는 관례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매매가 사실 왕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다음에 주교가 자신의 권한에 속한 교회의 직위를 매매했다.

성직자 계급이 권력의 원천인 존경을 얻어 내려면 결혼생활을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과 확실하게 구별되는 것이 매우 유리했다. 개혁가들은 물론 결혼 상태가 현실적으로 죄는 아니더라도 독생 생활보다 저급하며 육신의 나약성을 인정하게 될 뿐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다.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핵심 요소였다.

교회 개혁 운동의 시초는 910년 아키텐의 공작, 바로 경건한 기욤의 클뤼니 대 수도원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클뤼니 대수도원은 처음부터 교황의 권위를 제외한 외부의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단체였다. 당시의 수도원은 대부분 부유하고 규칙이 엄격하지 않았다.

교황권을 개혁하는 일은 주로 황제에게 부여된 과업이었다. 왕가 출신의 마지막 교황은 베네딕투스 9세로 당시 12세였다고 한다. 베네딕투스 9세는 교황 직위를 자신의 대부에게 팔았는데 대부는 그레고리우스 6세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성직을 매매한 죄로 그레고리우스 6세를 폐위시켰다. 그는 게르만족 주교인 밤베르크의 수이드거를 임명했다. 그가 죽고 차기 교황까지 죽자 그는 브루노를 선택했는데 바로 교황 레오 9세다. 레오 9세는 성실하고 진지한 개혁가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의회를 개최했다.

다음 교황은 니콜라우스 2세로 그는 성직매매의 죄를 지은 자의 성직서임을 유효하지 않다는 교령을 선포했다. 그의 재위 기간에 밀라노에서는 권력투쟁이 발생했다. 암브로시우스의 전통을 따르는 대주교가 교황에게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니콜라우스 교황은 1059년에 개혁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성 페트루스 다미아누스를 밀라노에 로마 교황 특사로 파견했다.

다미아누스는 『신의 전능』의 저자로 신은 모순율에 어긋나는 일도 할 수 있으며 과거를 되돌리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니콜라우스 2세를 이어 알렉산데르 2세가 죽고 난 다음 교황에 오른 사람은 그레고리우스 7세다. 그는 걸출한 인물로 교황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더욱 강화했다.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성직임명’을 둘러싼 논쟁이 불거졌다. 주교 임명식에서 주교는 직무의 상징물로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받았다. 카노사로 이어진 다툼은 밀라노의 대주교 관구를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제1막의 승리는 교황에게 돌아갔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사면을 받기 위해 한겨울 황후와 어린 아들, 그리고 수행원 몇을 거느리고 알프스 몽스니 고개를 넘어 교황이 머무는 카노사의 성 앞에서 간원했다. 황제는 3일 동안 맨발에 참회 복장으로 교황의 접견을 기다렸다. 황제는 교황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맹세한 후에 성체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의 승리는 착각이었다. 결국, 그레고리우스는 죽을 때까지 노르만족의 포로로 살았다.

11세기가 흘러가는 동안 걸출한 철학자가 등장했다. 안셀무스와 로스켈리누스가 그들이다. 성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베크의 수도자였고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어 그레고리우스 7세의 원칙에 따라 왕과 맞섰다. 그는 주로 신의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 의 제창자로 유명했다. 성 안셀무스는 선대 그리스도교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보다 플라톤에 속했다.

 

이슬람교, 무함마드, 페르시아인, 아바스왕조, 아베로에스

10. 이슬람교 문화와 철학

 

이슬람교의 기원 헤지라는 622년에 일어났으며 무함마드는 10년 후에 죽었다. 그가 죽은 직후부터 아랍인은 정복을 시작하여 엄청난 속도로 정복 사업을 이어 갔다. 634년에 동방의 시리아를 침략하여 2년 만에 저항 세력을 완전히 진압했다. 637년에는 페르시아에 침입했고 인도까지 침략했다. 서쪽으로 뻗어 나간 팽창은 이슬람교도가 투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멈추었는데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지 100년 후의 일이었다.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은 기나긴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쳤다. 시리아인은 대부분 네스토리우스파로 가톨릭교도의 박해에 시달렸던 반면, 이슬람교도는 세금을 낼 경우 답례로 어떤 그리스도교 종파든 관대하게 다루었다.

무함마드가 세운 종교는 정교한 삼위일체설이나 육화 신학으로 뒤얽히지 않은 단순한 일신교였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조각한 우상의 숭배를 금지하는 유대인의 풍습을 부활시켰으며 포도주 사용도 금지했다.

아라비아는 대부분 사막이었기에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힘들어졌다. 약탈을 위한 단순 습격으로 시작한 아랍인의 초기 정복 사업은 전투 경험을 통해 적의 취약성을 파악한 후 영구 직업으로 바뀌었다.

아랍 제국의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로서 신성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칼리프 직위에 오르려면 명목상 선출 절차를 밟아야 했으나 곧 세습제로 바뀌었다. 아랍인이 정복을 시작한 동기는 종교가 아니라 약탈과 재물이었다.

페르시아인은 일찍부터 종교심과 사색이 깊었다. 개종한 페르시아인은 이슬람교로부터 무함마드의 동족이 상상했던 것보다 흥미진진하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전통을 만들어냈다. 661년 무함마드의 사위 알 리가 죽은 뒤 이슬람교도는 두 종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었다. 수니파가 더 큰 종파이고 시아파는 알리를 계승했다. 페르시아인은 오랫동안 시아파에 속했다. 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지고 아바스 왕조가 뒤를 이었다.

아바스 왕조 초기에 칼리프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초기 칼리프 가운데 유명한 하룬 알 라시드는 샤를마뉴와 이레네 여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천일야화』를 통해 전설의 형태로 누구나 아는 인물이다. 하룬 알 라시드의 궁정은 호화로웠으며 시와 학문이 찬란하게 꽃핀 중심지였다. 그가 거두어들인 세입은 어마어마했으며 제국의 영토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인더스강까지 뻗었다. 칼리프의 뜻은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아랍경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농업이었다. 숙련된 관계 기술을 사용했는데 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랍어로 철학책을 쓴 최초의 저술가이자 유일한 철학자 킨디는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 일부를 아랍어로 번역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페르시아의 이슬람교도는 인도와 접촉하면서 천문학 관련 지식을 얻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수학이나 천문학책을 번역한 무함마드 이븐 무사 알 화리즈미는 『인도 숫자 계산법』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슬람 세계는 네스토리우스파를 통해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 가운데 논리학만 높이 평가했고 아랍의 철학자들이 우선 중요하게 생각한 분야는 무엇보다 논리학이었다. 아랍 철학자들은 나중에 『형이상학』과 『영혼론』도 연구했다.

이슬람 철학자 가운데 페르시아 사람인 아비세나와 스페인 사람인 아베로에스는 주목할 만하다.

아비세나 이븐 시나는 부하라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에스파한에서 의학과 철학을 가르치다가 테헤란에 정착했다. 아비세나는 유럽에서 의술의 안내자였다. 백과사전의 저자인 그는 신학자들의 적대감 때문에 동로마 지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라틴어 번역을 통해 서로마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아베로에스는 아비세나와 정반대 쪽에 있는 이슬람교 세계에서 살았다. 아베로에스는 코르도바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하급 법관을 지냈다. 그는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나서 의학과 수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베로에스는 신플라톤학파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았던 아랍인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바로잡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신의 실존을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견해이기도 하다. 영혼 불멸에 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보이며 영혼은 불명하지 않지만, 지성은 불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란 비유 형태로 철학적 진리를 포함한다고 생각했다. 아베로에스의 철학 저술은 일찍이 13세기에 마이클 스콧이 라틴어로 번역했다.

 

십자군전쟁, 롬바르디아, 스콜라, 아벨라르, 베르나르두스

11. 12세기

 

십자군은 명예롭지 못한 종말을 맞이했다. 13세기는 12세기의 과도기를 거쳐 정점에 달했다. 13세기에 교황은 황제를 누르고 확실한 승리를 쟁취했고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은 확고한 독립을 이룩했으며 스콜라 철학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교황은 황제와 맞서기 위해 롬바르디아의 여러 도시와 동맹을 맺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차 십자군을 발족시켰으며 후임 교황들은 뒤이은 십자군 결성을 선동한 장본인이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성서에 호소하거나 먼저 플라톤의 권위에 호소한 다음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호소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독창성이 있더라도 사실을 숨기려고 애썼다. 십자군 전쟁도 사태를 이슬람교의 발흥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1. 황제권과 교황권의 갈등

그레고리우스 7세 시대부터 13세기 중엽까지 유럽의 역사는 교회와 세속 군주 사이에 벌어진 권력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일차적으로 황제뿐만 아니라 때로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과도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교황 파스칼리스 2세는 우르바누스와 마찬가지로 클뤼니 대수도원 출신이었다. 그는 성직임명권을 두고 투쟁을 벌였으며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교황과 황제 사이에 벌어진 투쟁의 최종 결과는 하인리히 3세에게 굴복했던 교황이 황제와 견줄 만한 권력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은 교회 내에서 완전한 주권자가 되어 교황 특사들을 파견해 지배력을 과시했다.

 

2. 롬바르디아 도시의 발흥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황제는 유능하고 활력이 넘쳤으며 가능성이 있는 사업은 무엇이든 성공으로 이끌었다. 하드리아누스 4세는 노르웨이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정력이 넘치는 인물로 프리드리히 1세가 황제 직위를 계승하고 2년이 지난 다음 교황이 되었으며 즉위 초에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화해했다. 로마시는 교황과 황제에게서 독립하겠다고 주장하며 투쟁에 필요한 조언자로 신앙심이 깊고 유덕한 이단자 브레시아의 아르날도를 초청했다. 그러나 결국, 로마인은 교황에게 굴복하고 아르날도는 화형을 당했다. 자유도시의 발흥은 교황과 황제 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투쟁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3. 십자군

교황이 십자군 창설의 선두에 섰던 까닭은 목적이 표면상으로 종교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의 권력이 커지면서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사자심왕 리처드 즉위와 동시에 소집된 3차 십자군 당시 잉글랜드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최초로 그리스도교 황제가 통치한 요크는 유대인에 대한 가장 끔찍한 대규모 잔혹 행위가 벌어진 곳이었다. 십자군 이전 유대인은 유럽 전역에서 동양 물품의 무역을 독점했다. 십자군 이후에는 그리스도교가 장악했다.

 

4. 스콜라 철학의 성장

스콜라 철학자로 간주할 만한 최초의 철학자는 로스켈리누스다. 그는 1050년경에 콩피에뉴에서 태어나 브르타뉴의 로슈에서 가르쳤으며 아벨라르는 제자였다. 로스켈리누스는 일반적으로 부분들로 이루어진 어떤 전체는 현실성을 갖지 못하며 낱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그를 극단적 원자론으로 이끌었다, 그는 유명론자였다.

제자 아벨라르는 1079년 낭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서 실재론자인 샹포의 기욤 제자로 공부하다 파리 대성당 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기욤과 논쟁을 벌였다. 그는 참사 의원이던 풀베르의 조카딸인 엘로이즈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 참사 의원은 아벨라르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아벨라르의 가장 유명한 책은 『긍정과 부정』이다. 이 책은 독단의 선잠에 빠져 있던 사람을 깨우는 데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아벨라르는 논리학과 지식론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무미건조한 스콜라 철학 방법과 정반대 성향의 강한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성 베르나르두스가 지도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전사한 기사였다. 베르나르두스는 시토 수도회 수도자였고 1115년에 신축한 클레르보 대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교회 정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대립 교황에 반대하도록 정세를 뒤집었고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서 이단을 제거하기 위해 투쟁했다. 베르나르두스는 종교적 신비주의자로 교황권이 세속에 빠져드는 경향을 한탄하며 세속 권력을 혐오했다.

 

12세기에 번역가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서유럽의 학생들이 그리스 서적을 더 많이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번역서를 낸 주요 공급원은 콘스탄티노플과 팔레르모, 톨레도였다. 톨레도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으나 그리스어를 직접 번역하지 않고 아랍어로 번역된 책을 자주 중역했다. 12세기 중엽에 톨레도의 대주교 레몽은 번역가 양성 대학을 설립했고 대학의 업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인노켄티우스 성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 2세, 토마스 아퀴나스, 카타리파

12. 13세기

 

13세기의 위대한 인물들에는 인노켄티우스 3세, 성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 2세,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다. 또한, 13세기의 위대한 업적으로는 프랑스의 고딕 대성당이 세워지고, 샤를마뉴와 아서, 니벨룽겐에 대한 낭만 문학이 등장했으며, 대헌장과 하원에 근거한 입헌정치가 시작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빈틈없고 약삭빠른 정치가였다. 노르만 왕가의 상속녀 콘스탄체와 결혼한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정복한 시칠리아의 새로운 왕 프리드리히는 인노켄티우스 3세가 즉위할 당시 겨우 3살이었다. 왕국은 혼란에 휩싸였고 콘스탄체는 교황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녀는 교황을 어린 프리드리히의 후견인으로 세웠고 교황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시칠리아에서 아들의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받았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신성한 기미가 없는 첫 대교황이었다. 그의 피후견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1212년에 독일로 가서 교황의 도움으로 오토를 대신할 황제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역사상 대단히 주목받는 통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청소년기를 역경 속에서 보냈다. 아버지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을 쳐부수고 노르만 왕국의 상속녀 콘스탄체와 결혼했다. 프리드리히는 여섯 가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아랍 철학에 정통했으며 이슬람교도와 우호 관계를 맺어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교도에게 치욕을 느끼게 했다.

‘교황파’와 ‘황제파’라는 말은 프리드리히와 오토 황제가 경쟁하던 시대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문의 명칭 ‘벨프’와 ‘바이블링겐’에서 와전된 말이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1206년에 죽었고 오토 황제는 1218년에 죽었다. 새 교황 호노리우스가 죽고 그레고리우스 9세가 뒤를 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성 프란체스코를 사랑했고 그에게 사랑받았던 열렬한 금욕주의자였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리드리히를 파문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예루살렘에서 대관식을 올렸고 교황과 황제는 1230년에 평화를 회복했다.

평화 시기는 프리드리히가 롬바르디아 동맹과 다시 갈등을 빚으면서 막을 내렸다. 교황은 프리드리히를 파문했다. 양 진영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결국 교황 측이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의 왕 루이 9세가 프리드리히와 인노켄티우스의 교섭을 위해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능력이 출중했지만, 프리드리히가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건 당시 존재하던 교황 반대 세력은 신앙심이 깊고 민주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반면, 프리드리히 목표는 이교도 로마 제국의 재건과 비슷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단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종파는 카타리파인데 프랑스 남부 지역의 알비파로 더 알려졌다. 카타리파의 교리는 발칸인을 통해 아시아에서 들어왔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널리 수용되었으며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교회 토지를 빼앗기 위한 구실을 찾던 귀족을 비롯한 주민 태반이 그들의 교리를 굳게 믿었다.

카타리파는 이원론을 지지했으며 그노시스파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야훼는 악한 데미우르고스이고 참된 신은 오로지 신약성서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채식주의자가 되어 달걀, 치즈, 우유를 먹지 않았다. 카타리파의 교리는 불가리아의 보고밀파로부터 십자군 전사들을 통해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들어왔다. 보고밀파는 마니교도와 바오로파가 융합한 결과로 발생했다. 바로오파는 유아세례, 연옥, 성인에게 구원을 비는 기도, 삼위일체설을 거부한 아르메니아의 종파였다.

민중의 지지를 얻은 왈도파는 왈도를 따른 신도인데 1170년에 그리스도의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킨 광신자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란 이름의 단체를 결성하여 청빈을 실천하고 엄격하게 덕을 쌓으며 살았다. 그들은 결성 초기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으나 성직자 계급의 부도덕함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성직자를 스스로 임명함으로써 가톨릭 사제의 전례를 필요 없게 만들었으며 롬바르디아뿐만 아니라 보헤미아로 퍼져나가 후스파를 위한 길을 닦았다.

 

아사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역사에 알려진 사랑받을 만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일상의 환락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말을 타고 나병 환자 옆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연민을 느껴 말에서 내려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세속의 재화를 모두 버리고 자신의 삶을 설교와 좋은 일을 하는데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신자들이 집이나 교회를 소유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자신의 구원보다 타인의 행복에 관심이 많았다. 프란체스코가 죽고 난 뒤 수도자들의 주요 업무는 교황파와 황제파 사이에서 벌어진 참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정쟁에 나갈 병사들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의 삶이 빚어낸 최종결과는 부유하고 부패한 수도회를 하나 더 설립하여 성직자 계급제도의 박해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이교도 반박 대전, 신의 실존 증명

13.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퀴노 백작의 아들이다. 아퀴노 백작의 성은 나폴리 왕국 근처 몬테카시노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나폴리의 프리드리히 2세 대학교에서 6년 동안 공부했다. 이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고 당시 철학자 사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지도자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밑에서 공부하려고 쾰른으로 갔다. 1259년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아퀴나스는 선대 철학자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실제로 갖고 있었다. 아퀴나스의 친구인 기욤은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옮긴 번역서를 그에게 제공했으며 직접 주석서를 내기도 했다.

아퀴나스의 중요한 저작 『이교도 반박 대전』은 1259년부터 1264년까지 몇 해 동안 저술되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독자에게 논증을 펼치는 형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확립하려고 했다. 그는 『신학 대전』도 썼다.

『이교도 반박 대전』은 네 권이다. 첫 단계는 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다. 증명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는 신앙으로도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증명은 어렵고 유식한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은 무지한 사람, 젊은이, 실생활에 몰두하느라 철학을 배울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어떤 이는 신은 오로지 신앙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신의 실존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타나듯 부동의 원동자 논증으로 증명된다.

신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영원하고 신은 어떤 수동적 잠재성도 포함하지 않기에 불변한다. 신 안에서 본질과 실존은 동일하다, 신 안에서 우연은 없다. 신은 어떤 실체적 차이로 상술 될 수 없다. 신은 선하고 자신의 선 자체다, 신은 모든 선한 것의 선이다. 신은 지적이며 더욱이 신의 지성 활동은 신의 본질이다.

식물의 본질은 인식이 아니라 생명이며 동물의 본질은 지성이 아니라 인식이다. 따라서 식물은 살아 있다는 점에서 신을 닮았지만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닮지 않았다. 동물은 인식한다는 점에서 신을 닮았고 지성을 지니지 못했기에 닮지 않았다.

신은 만물을 동시에 이해한다. 신의 인식은 습관이 아니라 추론적 지식이나 논증적 지식도 아니다. 신은 진리 자체다

신에게 의지도 있다. 신의 의지는 곧 자신의 본질이고 신의 의지가 향하는 주요 대상은 신의 본질이다. 신에게는 환희와 기쁨, 사랑이 있다. 신은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관조적이며 능동적인 덕을 소유한다. 신은 행복하고 행복 자체다.

2권은 주로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모든 지성적 실체는 미물질적이며 소멸하지 않는다. 천사는 육체가 없지만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결합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처럼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다. 인간의 영혼은 셋이 아니라 하나뿐이다. 동물의 영혼은 인간과 달리 불멸하지 않는다. 지성은 인간이 지닌 각각 영혼의 일부다.

3권은 윤리문제와 관련한다. 악은 의도된 게 아니고 본질이 아니며 선한 우연적 원인을 가진다. 만물은 만물의 목적인 신을 닮으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신에 대한 관조에 있다. 신법은 우리에게 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이웃을 사랑하라고도 한다.

죄, 예정설, 신의 선택 문제에 있어서 아퀴나스의 견해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유사하다. 인간은 도덕적 죄를 지음으로써 영원무궁한 세계에 이르려는 최후의 목적을 상실하기 때문에 영원한 벌은 인간이 받을 당연한 응보다. 누구도 은총을 받지 못하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죄인은 회개하지 않으면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인간은 선한 목적을 관철하려면 은총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의 조력을 마땅히 받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교도 반박 대전』 4권에서는 삼위일체설, 육화, 교황의 지상권, 성사, 육신의 부활에 관해 논의한다. 신을 향한 세 가지 길은 이성으로 통하는 길, 계시로 통하는 길, 오직 계시로 미리 알려준 중요한 것을 직관함으로써 통하는 길이다.

아퀴나스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일치하며 독창성보다 체계화 능력이 뛰어났다.

 

아퀴나스의 철학 체계 안에 진정한 철학 정신을 드러내는 부분은 거의 없다. 아퀴나스는 플라톤의 대화 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달리 논증이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결과를 미리 할 수 없는 탐구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철학을 시작하기 전에 벌써 그는 진리를 알고 있다. 진리는 가톨릭 신앙으로 선언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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