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 순수이성 비판, 피히테
20. 칸트
칸트는 일생 동안 동프로이센에 자리한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에서 살았다. 바깥 생활은 대학교수의 삶이 전부였고 7년 전쟁, 프랑스혁명, 초기 나폴레옹의 시기를 거쳤다. 그는 볼프가 해석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배웠으나 루소와 흄의 영향으로 그것을 포기했다. 칸트에게 흄은 논박해야 할 적이었다면 루소의 영향은 깊고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칸트는 아주 규칙적으로 살았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가 산책하면서 문 앞을 지나갈 때 시간을 맞출 정도였다. 그런데 언젠가 7일 동안 그가 시간표를 지키지 않은 적이 있었다. 바로 『에밀』을 읽을 때였다. 그는 루소의 책을 몇 번 되풀이하여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처음 읽을 때 문제가 무엇인지를 미처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루소의 문체가 수려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경건주의자로 교육받으며 자랐지만,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공포정치 시대가 오기 전까지 프랑스혁명의 정신에 공감했으며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칸트의 초기저작은 철학보다 과학에 관한 글이 더 많다. 리스본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 지진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바람에 관한 논문과 유럽에 부는 서풍이 대서양을 건너오기 때문에 습한지에 대해 다룬 짤막한 논문을 남겼다. 자연지리학은 그가 대단히 흥미를 느낀 주제였다.
그의 과학 저술은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인데 거기서 라플라스의 성운설을 미리 보여주었으며 태양계를 가능하게 만든 기원을 제시했다. 이 저술은 밀턴풍의 숭고한 면을 보여주며 효과적이고 풍성한 가설을 세웠다는 장점도 지녔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보다 회의주의자의 논증 탓에 고통을 많이 겪던 시기에 칸트는 『형이상학의 꿈에 예시된 유령을 보는 자의 꿈』이라는 기묘한 제목의 책을 썼다. ‘유령을 보는 자’는 스베덴보리인데 신비주의 체계를 담은 저술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네 권밖에 팔리지 않았다.
칸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순수이성 비판』이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의 지식이 경험을 초월할 수 없지만, 일부는 선험적이어서 경험에서 도출되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지식의 선험적인 부분은 논리뿐만 아니라 논리의 한계 내의 귀납법으로 도출되거나 논리적으로 연역 될 수 없는 것도 많이 포함한다. 그는 라이프니츠가 혼동한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의 구별, ‘선험’ 명제와 ‘경험’ 명제의 구별을 정확하게 제시한다.
‘분석’ 명제는 술어가 주어의 일부인 명제로 가령 “키 큰 어떤 남자는 남자다”나 “이등변 삼각형은 삼각형이다.” 같은 명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명제는 모순율에서 도출된다. 키 큰 어떤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자기 모순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종합’ 명제는 분석적이지 않은 명제다. 오직 경험을 통해 알려진 명제는 전부 종합 명제다.
칸트에 따르면 외부 세계는 단지 감각의 재료를 제공하는 원인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정신 능력은 이러한 재료를 시간과 공간 속에 질서정연하게 배열하며 우리가 경험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개념을 제공한다. 우리의 감각을 일으키는 원인인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 자체는 시간이나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아서 실체가 아니고 칸트가 ‘범주’라고 부른 일반 개념으로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이성 비판』의 대부분은 공간과 시간, 또는 범주를 경험되지 않는 사물 자체에 적용함으로써 발생한 오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형식이나 범주를 사물 자체에 적용하면 ‘이율배반’이 발생하여 지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겉으로 입증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호 모순된 명제와 마주하게 된다는 말이다. 칸트는 네 가지 이율배반을 제시하는데 각각 정립 명제와 반정립 명제로 구성된다.
사물 자체는 칸트 철학에 포함된 거북하고 다루기 어려운 요소였고 칸트의 직속 후계자들은 이것을 포기함으로써 유아론과 흡사한 체계로 빠져들었다, 칸트의 비일관성은 불가피하게 그에게 영향받은 철학자들이 경험주의 방향이나 절대주의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사실 독립철학은 헤겔이 죽은 다음까지도 후자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칸트의 직속 후계자인 피히테는 ‘사물 자체’를 버리고 주관주의를 거의 정신이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자아가 궁극적인 유일한 현실이며 자신을 정립하기 때문에 실존한다고 주장한다. 종속된 현실성을 갖는 비아(non-Ego)는 오로지 자아가 그것을 정립하기 때문에 실존한다. 피히테는 독일 국가주의의 창시자로서 중요한 인물이다.
칸트, 헤겔, 엘베시우스, 벤담, 콩도르세
21. 19세기 사상의 흐름
19세기 독일이 보여준 탁월한 지적 역량은 칸트와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요인이다. 라이프니츠는 독일인이었으나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글을 썼으며 철학 속에서 독일의 영향은 찾을 수 없다. 반대로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은 독일 철학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역사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의 덕택으로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점차 이름뿐이었고 국민에 대한 통제력조차 상실했다. 최후의 강력한 황제는 카를 5세였는데 그의 권력은 스페인과 베네룩스 지역에 있는 영지와 재산 덕분에 유지할 수 있었다. 종교 개혁과 30년 전쟁은 독일의 통일을 위해 남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프랑스의 자비에 맡겨진 수많은 소공국만 남겨 놓았다.
프로이센도 예나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하면서 나폴레옹에게 계속 맞서지 못했다. 비스마르크 치하에서 이룩한 프로이센의 부흥은 알라리크 샤를마뉴, 바로바로사의 영웅적인 역사의 부활을 의미했다. 비스마르크는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역사 인식을 잘 보여주었다.
프로이센은 정치적으로 우세했지만, 문화적으로 독일의 서부 지역만큼 진보하지 못했다. 19세기 초반에 독일은 놀라울 정도로 문화적, 경제적 다양성을 드러냈다. 동프로이센에는 농노제가 계속 남았다. 시골의 귀족은 목가적 무지에 젖어 있었으며 노동자는 기초 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서부 독일은 고대에 일부가 로마의 속령이 되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프랑스 혁명군에게 점령되면서 프랑스에 버금가는 자유주의 제도를 도입했다. 몇몇 군주는 지성을 겸비한 총명한 인물로 르네상스기의 군주가 궁정에서 한 일을 모방하며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예가 바이마르였는데 바이마르의 대공은 괴테의 후원자였다.
19세기에 개신교 국가인 독일의 문화는 점차 프로이센 중심으로 흘러갔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유사상가이자 프랑스 철학의 숭배자로서 베를린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려고 고군분투했다. 베를린대학교는 저명한 프랑스인 모페르튀이를 종신 총장으로 선출했지만, 불행히도 볼테르의 치명적 조롱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독일 철학은 독일 문학과 예술보다 프로이센과 관계가 더 깊었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신하였으며 피히테와 헤겔은 베를린대학교의 교수였다. 칸트는 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자유주의적 신학으로 프로이센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피히테와 헤겔은 프로이센의 철학적 대변자였으며 후일 독일의 애국주의와 프로이센 숭배를 동일시한 경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은 19세기 말엽까지 영국을 지배했으며 프랑스는 좀 더 이른 시기에 경험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칸트와 헤겔 철학이 프랑스와 영국의 여러 대학을 풍미했다.
엘베시우스는 『정신론』을 저술하여 명성을 얻지만, 이 책은 소르본대학 측의 유죄 판결을 받아 소각되었다. 벤담은 1769년에 엘베시우스의 저서를 읽고 나서 즉시 입법 원리를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엘베시우스는 공리주의자였고 쾌락이 선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적으로 이신론자였고 성직자가 권력을 가지는 것에 격렬히 반대했다.
엘베시우스의 학설은 낙관론인데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완벽한 교육뿐이라고 보았다. 콩도르세는 엘베시우스와 유사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루소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콩도르세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누구보다 찬양했다. 콩도르세는 여성 평등의 신봉자였다. 멜서스의 인구론을 고안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콩도르세는 엘베시우스보다 열광적이고 낙관주의 성향이 강했다.
벤담은 공화주의자이자 여성 평등의 신봉자였다. 제국주의의 적대자이자 비타협적 민주주의자이기도 했다. 그의 견해는 제임스 밀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벤담주의자들은 대부분 합리주의적 경향을 나타냈다.
다윈은 갈릴레오와 뉴턴이 했던 일을 19세기에 이루어냈다. 다윈의 이론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진화 학설이고 다른 부분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다. 다윈의 이론에서 둘째 부분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생물학자들은 여러 가지 중요한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생물학이 기계론적 세계관에 맞서 싸우는 동안 근대 경제 기술은 반대 결과를 낳았다. 19세기 말엽까지 과학기술은 과학이론에 대립된 것으로서 여론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 산업사회가 출발하면서 비로소 기술이 인간의 사유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헤겔, 정신 현상학, 논리학, 역사 철학, 법철학
22. 헤겔
헤겔은 칸트에서 시작된 독일 철학 운동의 정점에 도달했다. 19세기 말, 미국과 영국의 학계를 선도한 철학자들은 대체로 헤겔 추종자들이었다. 순수 철학 영역 밖에서는 개신교 신학자들이 헤겔의 학설을 많이 채택했으며 헤겔의 역사철학이 정치 이론에 미친 영역은 엄청났다. 마르크스는 청년기에 헤겔의 제자였으며 완성된 체계 속에 헤겔 철학의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을 보유했다.
헤겔은 젊은 시절 신비주의에 매혹되어 있었다. 그는 예나에서 대학 강사로 처음 철학을 가르쳤는데 예나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 『정신 현상학』을 탈고했다. 이후 뉘른베르크에서, 다음에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마지막으로 베를린에서 1818년부터 임종 때까지 철학을 강의했다. 그는 애국심이 강한 프로이센의 국민이자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자신의 철학적 성공을 즐겼다.
헤겔은 일찍이 신비주의에 관심을 두어서 분리된 상태가 비현실적이라는 믿음을 품었다. 세계는 원자이든 영혼이든 각각 완전히 자립하는 단단한 단위들이 모여 이루어진 집합체가 아니었다 유한한 사물의 겉으로 드러난 자립성은 헤겔에게 환상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전체를 제외한 아무것도 궁극적으로 완전히 현실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복잡한 존재 전부를 총괄하여 ‘절대자’라고 부르는데 절대자는 정신적 존재다. 그래서 절대자가 사유라는 속성뿐 아니라 연장이라는 속성도 가진다는 스피노자의 견해를 거부한다. 유사한 형이상적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다른 사상가들과 헤겔이 구별되는 점은 논리학을 강조했다는 것과 ‘변증법’이라는 3단계 운동이다. 헤겔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논리학』 두 권이다.
헤겔이 이해한 논리학은 형이상학과 동일한 학문으로 일반적인 논리학과 다르다. 일상 언어에서 사용하는 어떤 술어든 현실 전체를 수식한다고 생각한다면 자기모순에 빠진다.
헤겔에 따르면 과정은 결과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 요소다. 변증법에서 이후 각 단계는 녹아들 듯이 이전 모든 단계를 포함한다. 이전 단계들은 어느 하나라도 전체적으로 필요하며 전체 과정 속의 한 계기로서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변증법은 모든 단계를 밟아나가는 길을 빼면 진리에 이르는 건 불가능하다. 지식은 3단계 운동을 거쳐야 획득할 수 있다. 전체로서 지식은 감각 지각과 더불어 시작되며 감각 지각 속에서 객체를 의식하기만 할 뿐이다. 지식은 전체로서 자기인식의 단계에 이르러 주체와 객체가 더는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지식의 최고 형식이 된다. 이것이 헤겔 체계 내에서 분명하고 당연한 사실인 까닭은 최고 지식은 절대자가 소유해야 하고 절대자가 전체라면 자신 말고 알아야 할 것이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논리학』은 절대이념으로 끝나는데 절대이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 비슷한 존재다. 절대이념은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사유다. 분명히 절대자는 자신 말고 다른 어떤 것에 관해서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을 파악하는 우리의 단편적이고 오류에 빠지는 방식을 제외한 다른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정신이 유일한 현실이고 그것의 사유는 자기의식에 의해 자신 속에 반영된다.
독일 역사는 헤겔에 의해 세 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샤를마뉴 대제까지, 제2기는 샤를마뉴 대제부터 종교개혁까지, 제3기는 종교개혁 이후 시대다. 세 시기는 각각 성부, 성자, 성령의 왕국으로 구별된다.
헤겔에서 국가는 마르크스에서 계급이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역사 발전의 원리는 민족정신이다. 각 시대마다 이미 도달한 변증법의 단계를 거쳐 세계를 이끌어갈 사명을 부여받은 어떤 국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헤겔이 자신의 특이한 ‘자유’ 개념과 더불어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은 정치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양상인 국가에 대한 미화를 설명해준다. 헤겔의 국가철학은 『역사철학』과 『법철학』이라는 두 저술 속에서 펼쳐진다.
헤겔은 루터교파에 속한 열렬한 개신교도였으며 프로이센 국가는 에라스투스를 신봉한 절대군주 체제였다. 헤겔이 국가를 지지하려고 제안한 주장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가톨릭교회 후계자들이 교회를 지지하며 주장했던 입장과 흡사하다. 헤겔은 어떤 상황에서 국가가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점만 의미하지 않고 그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막을 세계정부 같은 제도를 설립하는 것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때때로 전쟁이 일어나야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겔의 형이상학에는 다른 사회 조직에 비해 국가를 배타적으로 강조할 어떤 좋은 이유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가 교회보다 국가를 선호한 데는 단지 개신교도의 편견이 작용했을 뿐이다.
바이런, 뉴스테트 저택을 떠나며,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칼라일
23. 바이런
바이런은 대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정작 정신적 후계자를 찾아야 할 영국에서는 영향력이 전무하다. 그러나 바이런의 감수성과 인생관은 외국에 전해져 발전하고 변형되면서 널리 퍼져 나가 마침내 중요한 대사건을 발생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대에 바이런으로 대표되는 귀족주의적 반항아는 농민이나 무산계급의 반란을 주도한 지도자들과 전혀 다른 유형에 속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불만을 자극하거나 변명할 정교한 철학이 필요 없을뿐더러 그들에게 철학은 기껏해야 게으른 부자들의 놀음으로 비칠 뿐이다.
귀족주의적 반항의 철학은 성장하고 발전하고 변화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성숙한 모습을 갖추었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일어난 카르보나리당의 운동부터 1933년 히틀러의 쿠데타에 이르는 긴 혁명적 움직임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바이런의 환경은 대단히 독특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부모의 다툼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잔인성을 두려워한 동시에 그녀의 통속적이고 야비한 면을 경멸했다. 바이런은 빈곤하게 살다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귀족이 되었다. 유산을 상속해 준 종조부는 ‘사악한 귀족’으로 33년 전 결투에서 어떤 남자를 죽여 이웃에게 배척을 당했다.
바이런 가문에는 불법적인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외가 쪽 조상인 고든 가문은 더 심했다. 에버딘 뒷골목의 지저분한 생활에서 마침내 벗어난 소년 바이런은 당연히 자신의 귀족 칭호와 대저택의 호사를 기뻐했고 조상의 소유지를 상속받은 것에 감사하며 그들의 신분도 기꺼이 물려받았다. 초창기에 쓴 시들 중 「뉴스테드 저택을 떠나며」 는 그때의 정서를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데 십자군으로 출정하고 크레시와 마스틴 무어에서 싸운 자기 조상을 찬양한다.
바이런이 혈통과 귀족 칭호를 얻었는데도 귀족 친척들이 그를 싫어하거나 피했기에 그는 귀족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속물근성과 반항 정신이 독특하게 혼합된 성격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19세기 유럽인의 상상력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는 클라우제비츠, 스탕달, 하이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피히테와 니체 사상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탈리아 애국주의자들의 활동을 자극했다. 나폴레옹의 환영은 19세기 내내 활개를 쳤으며 평화주의와 소매업을 비웃고 산업주의와 상업에 저항하여 세력을 키울 유일한 힘으로 작용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통해 나폴레옹의 환영을 쫓아내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나폴레옹의 유령이 당시보다 위력을 크게 떨친 적은 없었다.
바이런이 죽자 프랑스에서는 금세기의 두 위인, 나폴레옹과 바이런이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고 대서특필했다. 당시 바이런을 ‘유럽 최고의 귀족 정신’으로 간주하며 ‘형제를 잃은’ 것처럼 느낀 칼라일은 나중에 괴테를 더 좋아했지만, 여전히 바이런과 나폴레옹을 묶어 생각했다.
칼라일에게 괴테와 바이런이 정반대 인물로 비쳤던 반면, 알프레드 드 뮈세에게 두 인물은 유쾌한 프랑스인의 영혼 속에 우울의 독약을 투입한 공범자들이다. 뮈세는 바이런이 아드리아 해와 구이치올리 백작부인에게서 위안을 얻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돈 후안』은 괴테의 더욱 유쾌한 시만큼이나 프랑스에서 거의 읽은 사람이 없었다. 뮈세가 비판했는데도 프랑스의 시인들은 이후 바이런의 불행을 시적 영감을 주는 가장 좋은 재료로 삼았다.
바이런은 격렬한 감정의 소유자였다. 루소의 비겁한 성격은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바이런의 비겁한 성격은 숨어 있다. 루소는 단순한 덕을 찬양한 반면, 바이런은 삶을 이루는 요소라면 죄도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