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뮈스, 토머스 모어, 우신예찬, 유토피아

4. 에라스뮈스와 토머스 모어

 

에라스뮈스와 토머스 모어 경은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친구 사이였으며 공통점도 많았다. 두 사람은 모두 학식이 풍부했으며 스콜라 철학을 경멸했다. 또한, 재치와 해학을 겸비한 고도로 숙련된 저술가들이었다.

에라스뮈스는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직자였고 그리스어 지식을 비롯해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에라스뮈스가 장성하기 전에 부모는 세상을 떠났으며 후견인은 그를 부추겨 슈타이어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도록 했다.

1493년 에라스뮈스는 황금 양털 가죽 기사단의 수장이던 캉브레의 주교가 제의한 비서 자리를 맡았다. 그는 라틴어 학자였고 라틴어의 우아함에 관해 설명한 책을 쓴 로렌초 발라를 각별히 칭송했다. 라틴어 사용이 참된 종교적 헌신과 화합된다고 생각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와 히에로니무스를 예로 들었다. 그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낡은 생각에 매달린 스콜라 철학자들을 혐오했다. 에라스뮈스는 1499년에 처음 영국을 방문했고 그때 콜릿, 모어와 친해졌다.

에라스뮈스의 『우신 예찬』은 바보 여신의 독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1509년에 착상이 떠올랐는데 그가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가는 도중 알프스산맥을 넘어갈 때였다고 한다. 라틴어 ‘모로스’가 ‘바보’를 뜻하기 때문에 어울린다는 농담을 덧붙이며 토머스 모어에게 바쳤다. 바보 여신은 신이 나서 자신을 찬미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는 홀바인의 삽화가 덧붙여 생기를 얻는다. 바보 여신은 풍자가 독설로 변하는 구절에서 에라스뮈스의 진지하고 심각한 의견을 말하는데 성직의 남용이나 폐해에 관한 내용이다.

『우신 예찬』은 참된 종교는 바보 여신의 숭배 같은 형태를 띤다는 진지한 암시로 끝난다. 책에는 시종일관 두 바보 여신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역설적으로 찬미되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진지하게 찬미되는 신이다.

당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호기심에 불탔다. 이러한 호기심은 문학 작품 속의 기이한 대상에서 점차 과학적인 대상으로 옮아갔다.

종교개혁 이후 에라스뮈스는 루뱅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가톨릭 정통신앙을 완벽하게 유지했다. 다음에 바젤에서 살았고 그곳은 개신교도가 많았다. 그는 교회의 성직 남용과 교황의 사악한 행동을 강력히 비난했다. 1518년 루터가 반란을 일으킨 해에 그는 『율리우스의 추방』이란 풍자문학을 발표했는데 거기서 율리우스 2세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묘사한다. 1524년에 그는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추종하고 과장하면서 거부했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작품을 썼다.

토머스 모어 경은 인문주의자였지만 깊고 경건한 신앙심을 지켰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아주 드문 일이어서 이탈리아의 불신자들과 교감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모어는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기로 작정했다. 1504년에 그는 의회 의원이 되어 헨리 7세가 제안한 새로운 세금 징수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왕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헨리 7세는 모어의 아버지를 런던탑에 가두었지만, 아버지는 벌금 100파운드를 지불하고 나왔다. 1509년에 헨리 7세가 세상을 떠나자, 모어는 법률 업무로 복귀했고 헨리 8세의 총애를 얻었다.

울지가 실각하자 왕은 모어를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관행을 따르지 않고 소송 당사자들이 주는 선물을 모두 거절했다. 결국, 모어는 왕의 총애를 잃고 마는데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기로 하자 그 이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532년에 대법관직에서 물러났다. 모어는 결국 참수형을 당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말하는 지명은 남반구에 있는 섬인데 거기서는 모든 일이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일어난다. 라파엘 히슬로데이라는 선원이 우연히 그 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거기서 살다가 섬의 슬기로운 제도를 알리려 유럽으로 돌아왔다.

플라톤의 국가처럼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한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여러 면에서 놀라우리만치 자유주의적 특징을 나타낸다. 하지만 유토피아에서의 삶은 행복에 필요한 본질적 요소인 다양성이 없다. 이는 상상이든 현실이든 모든 사회 체제가 지닌 결점이다.

 

루터, 칼뱅, 로욜라

5.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은 문명의 발전이 더딘 나라들이 지적으로 발전한 이탈리아의 지배에 맞서 일으킨 반란이었다. 종교개혁은 정치적 반항이자 신학적 반항이기도 했다. 교황의 권위를 거부했고 교황이 천국으로 통하는 열쇠의 힘으로 요구하던 조공을 더는 바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반종교개혁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이들은 루터와 칼뱅, 로욜라다. 철학적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된 다음 이어진 세기는 불모의 시대다

종교개혁이 시작될 무렵부터 개신교도 사이에는 국가가 종교 문제에 미친 힘을 두고 분열 조짐이 있었다. 루터는 군주가 개신교도인 나라에서 군주를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했다. 영국에서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러한 권한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도 그랬다. 종교개혁의 개인주의적 양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개신교도는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만큼이나 왕에게 복종하는 것도 꺼렸다.

점차 종교전쟁에 지치자 종교적 관용을 믿는 세력이 성장했고 종교적 관용은 18, 19세기에 자유주의를 발전시킨 운동의 원천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는 처음에 놀라우리만치 급속하게 성공을 거두지만 주로 로욜라의 예수회 창설을 계기로 성공 가도에서 걸림돌을 만났다. 로욜라는 군인 출신이어서 수도회도 군대식으로 조직했는데 수도회 총장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예수회의 일원은 모두 이교도에 맞선 싸움에 참가할 각오를 해야 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예수회 수사들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도 생활로 단련되었으며 유능한 데다 대의에 투신하는 능숙한 선동가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신학은 개신교도의 신학과 정반대였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가운데 개신교도가 강조한 요소를 거부했다. 그들은 자유의지를 확고하게 믿었으며 운명예정설에 반대했다. 구원은 오로지 신앙 하나가 아니라 신앙과 종교적 행위가 합쳐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회 수사들은 선교에 대한 열의 특히 극동지역에서 수행한 선교를 계기로 신망을 얻었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결과는 처음에 지성계 전반에 나쁜 영향을 미쳤으나 궁극적으로는 유익한 편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망원경

6. 과학의 발전

 

근대 철학의 정초자로 평가받는 데카르트는 17세기 과학을 창안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과학자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갈릴레오와 뉴턴은 과학의 창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코페르니쿠스는 16세기에 속한 사람으로 당대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는 폴란드 사람으로 흠잡을 데 없는 가톨릭교도였다. 1500년에 로마에서 수학 강사직과 교수직을 맡아 활동다. 1503년에 모국으로 돌아와 우엔부르크의 대성장 참사회원이 되었다. 그는 생의 대부분을 독일에 맞선 투쟁과 시대의 흐름에 따란 개혁에 바쳤고 천문학 연구에도 몰두했다. 그는 태양이 지구의 중심이며 지구는 두 가지 운동, 바로 하루에 한 번 자전하고 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믿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당시의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최된 다음에나 예수회 성직자들이 활동하던 때와 종교재판소의 활동이 재개되었던 때보다 더 관대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피타고라스의 학설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 중심설에 대해 알지 못했던 듯하다.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은 지구가 기하학적으로 차지한 우월한 지위를 박탈한 점에서 중요하다.

버트는 『근대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라는 흥미로운 책을 썼는데 근대 과학을 정초한 과학자들은 정당성이 의문스러운 여러 가정을 제안했다고 효과적으로 밝혀냈다. 버트의 책은 근대 과학의 발견이 중세에 유행하던 미신만큼 조잡한 미신에서 우연히 생겨난 행운의 산물이었다고 암시함으로써 근대 과학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 이론은 케플러의 법칙이 발견된 후에 비로소 충분히 단순한 이론으로 발전했다.

케플러는 천부의 재능을 갖춘 천재가 아니면서도 끈질긴 노력 끝에 과학자로 성공한 대표적 모범 사례로 꼽힌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이후 최초로 지동설을 채택한 중요한 천문학자였는데 티코 프라헤의 관측 자료에 비추어 보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설명이 다소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피타고라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태양 숭배에 어느 정도 환상을 가진 선량한 개신교도였다. 그는 피타고라스의 영향으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타난 견해를 추종하게 되었고 우주적 차원의 의미를 가진 모든 존재는 다섯 가지로 정해진 고체로 이루어진다는 가정을 받아들였다.

케플러의 위대한 공적은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는 세 가지 법칙을 발견한 점이다. 두 법칙은 1609년에, 셋째 법칙은 1619년에 발표했다. 제1 법칙은 행성은 타원 궤도를 그리며 태양이 초점 하나를 차지한다는 것, 제2 법칙은 한 행성과 태양을 연결한 직선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휩쓸고 지나간다는 것, 제3 법칙은 한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태양과 행성의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근대 과학을 정초한 과학자 가운데 뉴턴을 제외하고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날에 태어나서 뉴턴이 태어나던 해에 죽었다. 갈릴레오는 역학에서 가속도의 중요성을 처음 발견했다. ‘가속도’는 속도의 크기나 방향 변화를 의미한다. 갈릴레오는 최초로 낙하 물체의 법칙을 입증했는데 ‘가속도’ 개념을 추가하면 가장 단순한 법칙이 된다.

갈릴레오는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큰 덩어리와 작은 덩어리는 속도 측정값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갈릴레오는 태양 중심 체계를 열렬히 지지했는데 케플러와 편지 왕래를 통해 케플러가 발견한 연구 성과를 기꺼이 수용했다.

갈릴레오는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첫 재판은 1616년에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1633년에 열린 공개 재판에서 갈릴레오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한 뒤 지구가 자전한다거나 공전한다는 주장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뉴턴은 코페르니쿠스와 캐플러, 갈릴레오가 닦아놓은 길 위로 걸어가서 그들의 과학적 작업을 완성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세 가지 운동 법칙을 출발점으로 삼는데 제1 법칙과 제2 법칙은 갈릴레오의 업적으로 돌려야 한다. 세 가지 법칙을 근거로 뉴턴은 케플러의 세 법칙이 각 행성은 매 순간에 태양 쪽을 향한 가속도는 행성과 태양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변한다는 명제와 동일한 주장임을 증명했다.

 

17세기 직전 1590년경에 복식 현미경이 발견되었다. 망원경은 1608년에 리페르스하이라는 네덜란드인이 발명하지만 망원경을 과학적 용도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갈릴레오였다.

 

프랜시스 베이컨, 학문의 진보, 귀납법, 우상의 목록표

7.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은 근대 귀납법의 창시자이자 과학적 탐구 절차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선구자다. 그는 국새상서였던 니콜라스 베이컨 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덕분이 국사를 논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스물셋의 나이로 의회에 진출하면서 에식스의 고문이 되었는데 에식스의 충성심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에식스 기소 사건을 돕기도 했다. 그로 인해 리턴 스트레이치는 자신의 저서 『엘리자베스와 에식스』에서 베이컨을 변절자이자 배은망덕한 인물로 묘사했다.

하지만 제임스가 왕위를 계승한 후 출세 가도를 달리는데 1617년에 자신의 아버지가 맡았던 국새상서 자리를 차지했다가 1618년에는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겨우 2년 만에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대법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5년간 은퇴 생활 끝에 닭 속에 눈을 가득 채워 넣어 냉장하는 실험을 하다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학문의 진보』는 베이컨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베이컨은 과학적 성향을 지닌 철학자들이 만들어갈 긴 역사를 시작한 첫 인물로 연역법과 대조되는 귀납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베이컨은 삼단논법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학의 가치로 실험정신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낮게 평가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적개심을 드러낸 반면, 데모크리토스는 높이 평가했다. 베이컨은 비록 자연의 과정이 신성한 목적을 예시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현상에 대해 실제로 탐구할 경우에 목적론적 설명의 개입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베이컨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일은 작용인의 필연적 결과로 설명해야 한다.

베이컨의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우상의 목록표인데 우상은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도록 만드는 원인인 정신의 나쁜 습관을 의미한다. 그가 제시하는 우상은 네 가지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며 자연 현상 가운데 실제로 발견되는 질서 이상을 기대하는 습관을 지적한다. ‘동굴의 우상’은 개별 탐구자의 특징인 개인적 편견이다. ‘시장의 우상’은 말의 횡포와 관계가 있다. ‘극장의 우상’은 수용되는 사유체계와 관계가 있는데 자연스럽게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자의 사유체계가 가장 주목할만한 사례를 그에게 제공했다.

과학이 베이컨의 관심사였고 그의 일반적 사고방식도 과학에 바탕을 두었지만, 베이컨은 당시 과학이 이룬 업적의 핵심을 대부분 놓쳤다. 1609년에 『새로운 천문학』을 출간한 케플러의 과학이론에도 수긍하지 않았다.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은 가설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결점을 안고 있다. 과학에서 연역법의 역할은 베이컨이 가정했던 것보다 더 크다. 종종 어떤 가설이 시험 되어야 할 때 가설로부터 관찰로 시험 될 수 있는 어떤 귀결로 이어진 긴 연역 과정이 있다. 흔히 연역법은 수학적 방법인데 이 점과 관련하여 베이컨은 과학적 탐구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과소평가했다.

 

홉스, 리바이어던, 하드윅 경

8. 홉스의 리바이어던

 

홉스는 경험론이나 합리론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철학자다. 그는 로크·버클리·흄처럼 경험주의자였지만 순수수학뿐 아니라 응용수학과 관련된 수학적 방법의 찬미자였다는 점에서 그들과 달랐다. 홉스의 일반적 사고방식은 베이컨보다 갈릴레오에게 영감을 받았다.

홉스는 대륙 철학의 결점도 영국 경험론의 결점도 지니지 않았다. 홉스의 아버지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교구 성직자였는데 교회 문 앞에서 이웃 교구 사제와 다툰 뒤 사제직을 잃었다. 이후 홉스는 숙부 집으로 가서 양질의 고전 교육을 받는데 열네 살에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단장격의 라틴어로 번역했다.

스물두 살이 되던 1610년 홉스는 하드윅 경의 가정교사가 되어 그와 함께 생을 좌우할만한 중요한 여행을 했다. 하드윅 경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홉스의 제자이자 후원자로서 그를 도왔다. 홉스는 하드윅 경을 통해 벤 존슨, 베이컨, 허버트 경을 비롯한 중요한 인물들을 만났다.

데번셔 백작이 어린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홉스는 한동안 파리에 살며 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을 공부한 다음 데번셔 경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했다. 홉스는 그와 함께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나 1636년 갈릴레오를 방문했으며 1637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홉스는 왕정을 극단적으로 옹호한 『리바이어던』에서 피력한 정치적 견해를 오랫동안 주장했다. 책에 담긴 합리주의적 성향은 망명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랄한 공격은 프랑스 정부 관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자 홉스는 비밀리에 런던으로 피신하여 크롬웰 치하에서 정치 활동을 하지 않으며 지냈다.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그의 명성은 영국보다는 국외에서 더 높았다. 여가를 즐기면서 84세에 라틴어 운문으로 자서전을 썼으며 87세에는 호메로스의 책을 번역 출판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책의 첫머리에서 그는 자신의 철저한 유물론을 선포한다. 리바이어던이라 부른 국가는 기예에 의한 창조물로 사실상 인공으로 만든 인간이다. 통치권은 인공 영혼이다

제1부는 인간을 개인으로 다루며 홉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반적인 철학에 대해 논의한다. 제2부는 사람들이 각자 중앙 정부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자연 상태의 악에서 벗어날 방법에 대해 말한다. 3부에서는 ‘그리스도교 정치 공동체에 대하여’에서 교회는 시민 국가에 의존해야 하기에 보편 교회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제4부 ‘암흑의 왕국에 대하여’에서는 로마교회를 비판한 내용을 주로 다루는데 홉스는 영적 권위를 세속 권력 위에 두었다는 이유로 로마교회를 증오했다.

 

홉스는 명료하고 논리적인 철학자였다. 그의 윤리학은 옳든 그르든 완벽하게 이해되며 진의가 분명치 않은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홉스는 근대 정치 이론을 세운 명실상부한 첫 번째 저술가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9.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높은 수준의 철학적 능력을 갖춘 근대 최초의 인물로 새로 등장한 물리학과 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데카르트는 선배 철학자들이 닦아 놓은 기초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완결된 철학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문체는 쉬우면서도 현학적인 티가 나지 않는다. 근대 철학의 선구자가 문학적 감각을 소유한 경우다.

데카르트의 아버지는 브르타뉴 의회의 의원으로 적당한 액수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1604년부터 1612년까지 라 플레슈의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포부르생제르맹의 한적한 휴양지에 은거하며 기하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1621년에 참전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를 잠시 방문했다가 1625년에 파리에 정착했다. 그러나 방문객이 자주 찾아오자 1628년 위그노 교도의 요새인 라 로셸을 포위 중이던 군대에 들어갔다. 그 후 네덜란드에서 살게 된다.

데카르트는 소심하고 가톨릭 신앙이 몸에 밴 사람이었지만 갈릴레오의 이단적 과학 이론에 동조했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도 로마교회가 아닌 편견에 사로잡힌 개신교도로부터 성가신 공격의 화살을 맞았다. 그 뒤 레이덴대학교 당국이 데카르트를 비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데카르트는 스톡홀름의 프랑스 대사 샤뉘의 소개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여왕은 그를 스웨덴 궁정으로 초청하고 마침내 수락하자 군함을 파견해 그를 데려갔다. 샤뉘 대사가 병에 걸리자 그를 간병하다가 데카르트는 병에 걸려 1650년 세상을 떠났다.

데카르트는 철학자이자 수학자 과학자이기도 했다. 철학과 수학 분야의 연구는 최고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과학 분야에서 진행한 연구는 신뢰할 만하지만 당대에 활동한 몇몇 과학자들의 연구만큼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좌표 기하학을 발명했으며 대수학을 기하학에 응용했다.

데카르트의 과학 이론이 진술되어 있는 책은 1644년에 출간한 『철학 원리』이다. 『방법서설』은 기하학과 광학 문제를 다루며 『태아 발생론』이라는 제목의 책도 썼다.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데카르트적 의심’이라고 불린 방법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는 철학의 확고한 기초를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의심할 수 있는 대상은 전부 의심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철학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인식론의 핵심이다.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대부분 인식론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데카르트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주장은 물질보다 정신을, 타인의 정신보다 나의 정신을 더 확실한 존재로 만들었다. 따라서 데카르트에서 파생된 철학에는 주관주의 경향과 물질은 정신에 알려진 것으로부터 추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나타난다. 두 경향은 유럽의 대륙 관념론과 영국 경험론에 영향을 미친다.

데카르트는 ‘생각’을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생각은 의심하고 이해하고 개념을 적용하고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의지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정신 활동을 가리킨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두 가지 다른 점에서도 중요했다. 첫째는 플라톤에서 시작되어 대체로 종교적 이유로 그리스도교 철학이 발전시켰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완성했거나 거의 완성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물질계 전반에 걸친 이론의 측면에서 엄격하게 결정론적 체계다. 동물도 생명 없는 물질과 마찬가지로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가정한 것과 달리 유기체의 성장과 동물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성이나 영혼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작은 예외를 인정했는데 인간의 영혼은 의욕으로 생명 혼의 운동량을 변경시키지 못하지만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는 당대 과학에서 배운 내용과 라 플레슈에서 배운 스콜라 철학의 이원적 대립이 있다. 데카르트가 일관성을 유지했다면 단지 새로운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가 되었겠지만 비일관성 덕분에 데카르트의 철학은 두 갈래로 뻗어 나간 중요한 철학 학파의 원천이 되었다.

 

스피노자, 윤리학, 신학 정치론, 정치론, 형이상학

10.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유대교도로 태어났지만 유대교도에게 파문당했다. 그리스도교도 역시 그를 증오했다. 신(神)관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전체를 지배하는데도 정통그리스도교는 그를 무신론자로 몰았다.

스피노자의 생애는 단순했다. 그의 가족은 종교 재판을 피해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그는 유대교 학습법에 따라 교육받았으나 정통 유대교도로 살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살았다. 암스테르담에서 살다가 헤이그로 옮겨 가서 렌즈를 갈아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간소한 삶을 살았으며 평생 돈에 거의 무관심했다. 스피노자와 알고 지낸 몇 사람은 그의 철학 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는 43세의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의 주요저작 『윤리학』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다른 저작 『신학 정치론』은 성서 비판과 정치 이론이 결합되어 호기심을 끄는 반면 『정치론』은 정치 이론만 다룬다. 스피노자의 성서 비판은 부분적으로 현대의 성서 해석과 일치하는 내용을 미리 보여준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세 가지 다른 문제를 다룬다. 형이상학에서 시작하여 정념과 의지의 심리학으로 넘어가고 마지막으로 앞서 논의한 형이상학과 심리학에 근거한 윤리학을 내놓는다. 형이상학은 데카르트의 생각을 변형한 사상이고 심리학은 홉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윤리학은 독창성이 드러난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체계는 파르메니데스가 개시한 유형에 속한다. 하나의 실체, 바로 ‘신이자 자연’이 있을 뿐이고 유한한 아무것도 스스로 존립하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세 가지 실체, 곧 신과 정신, 물질을 인정했지만 어떤 의미로 신은 정신과 물질보다 근원적 실체다. 왜냐하면, 신은 정신과 물질을 창조했고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다면 물질을 무화 시킬 권능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적 방법에 따라 정의와 공리, 정리로 진술되어 있다. 먼저 공리를 제시한 다음에 모든 내용은 연역적으로 엄밀하게 증명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 탓에 『윤리학』을 읽기는 매우 어렵다.

스피노자는 여느 철학자들과 달리 자신의 학설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실천했다. 그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처럼 모든 감정에 반대하지 않고 외부의 힘이 우리를 장악해서 수동적으로 생긴 ‘정념들’만 마땅치 않게 여긴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사유와 감정이 통일된 상태로 진리를 파악할 때 느낀 기쁨과 결합된 참된 사유라고 할 만하다. 참된 사유 속에서 느낀 기쁨이 모두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의 일부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쁨은 부정적 측면을 전혀 포함하지 않아서 전체의 참된 일부이고 조각조각 흩어진 사물이 사유 속에서 분리되어 악하게 보이듯 겉으로만 전체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을 향한 사랑은 정신의 영역에서 최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이는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듯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설명이다. 스피노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숭배한 괴테는 스피노자의 명제를 몰아의 사례로 여겼다. 하지만 이는 몰아가 아니라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 논리적으로 귀결된 주장이다.

『윤리학』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현자는 지혜로운 한에서 정신이 흐트러지는 일이 좀처럼 없으며, 자신을 비롯해 신과 사물을 결코 멸하지 않는 영원하고 필연적 존재로 의식하며 언제나 자신의 정신을 진심으로 묵묵히 유지한다. 내가 이러한 결과로 이끈다고 지적한 방법은 엄청나게 어려워 보이지만 발견될 수도 있다. 그것은 거의 찾기 어렵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구원이 바로 수중에 들어오고 별다른 노력없이 얻게 된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의 문제에 소홀할 수 있겠는가? 탁월한 일은 드물고 어려운 법이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논리적 일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례다.

 

라이프니츠, 신정론, 단자론, 자연과 은총의 원리

11.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30년 전쟁이 끝나기 2년 전에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도덕 철학을 가르친 교수였다.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1666년에 알트도르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뒤이어 같은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대학 측과 ‘사상이 맞지 않다.’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1667년에 마인츠의 대주교 보좌관이 되었는데 대주교는 독일 서부의 다른 군주들처럼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았다.

1672년에 라이프니츠는 파리로 가서 4년간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당시 파리는 철학과 수학 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했다. 그는 파리에서 미적분을 발명했는데 같은 주제를 먼저 연구했으나 미처 발표하지 않은 뉴턴의 저술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이후 누가 먼저 미적분을 발명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양측 모두에게 불행하고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라이프니츠는 하노버 가문과 1673년에 인연을 맺어 생애 내내 하노버 가문을 위해 일했다. 1680년부터 볼펜뷔텔에 위치한 도서관의 사서로 일했으며 브라운 슈바이크의 역사를 1009년까지 기록했다.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1843년에 출판되었다. 라이프니츠의 대중적 철학은 『단자론』과 『자연과 은총의 원리』에서 찾아낼 수 있는데 둘 가운데 한 권을 말버러의 동료인 사부아의 외젠 공을 위해 저술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는 신학적 낙관론의 기초를 『신정론』에서 제시하는데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여왕을 위해서였다. 그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처럼 실체 개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철학을 세웠지만, 정신과 물질의 관계나 실체의 수에 관해서 그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데카르트는 신·정신·물질이라는 세 가지 실체를 허용했고 스피노자는 신만 실체로 승인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연장(延長)은 물질의 본질인데 반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연장과 사유가 둘 다 신의 속성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연장은 실체의 속성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연장은 나뉠 수 있는 복합물의 특징이어서 실체들로 구성된 복합물에만 속하고 단일 실체는 연장이라는 속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의 최종 형식을 만들어냈다. 신의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의 긴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함께 시작되기도 한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일정한 형식을 갖춘 증명 방식을 정리했는데 하나는 성 안셀무스가 발명한 존재론적 논증이다. 성 토마스는 존재론적 논증을 거부했으나 데카르트는 그것을 되살려냈다. 논리적 기량이 출중한 라이프니츠는 신의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증을 이전보다 훨씬 낫게 진술했다.

중세 신학은 그리스 지성의 파생물이다. 구약성서의 신은 권능의 신이고 신약성서의 신은 사랑의 신이지만 신학자들의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칼뱅에 이르기까지 지성에 호소한 신이다. 신의 실존은 우주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는 논증에서 발생한 특정한 수수께끼를 해결해준다는 말이다. 기하학에서 명제를 증명하는 것처럼 추리의 끝에 나타나는 신은 루소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루소는 복음서의 신과 더 비슷한 신개념으로 되돌아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근현대의 주요 신학자들은, 특히 개신교도는 루소를 추종했다. 철학자들은 훨씬 보수적이었다. 칸트가 신의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을 단번에 폐기했다고 선언했는데도 헤겔과 로체, 브레들리의 철학에 형이상학적 논증은 여전히 등장한다.

신의 실존을 지지하는 라이프니츠의 논증은 네 가지인데 존재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 영원한 진리로부터 논증, 예정조화로부터 논증이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철학을 논리학의 두 전제, 곧 모순율과 충족 이유율 위에 세웠다. 두 법칙은 모두 ‘분석’ 명제라는 개념에 의존하는데 분석 명제는 주어 개념 속에 술어 개념이 포함된 명제다. 예컨대 “모든 백인 남자는 남자다”라는 명제가 분석 명제다. 모순율은 모든 분석 명제가 참이라고 진술한다.

라이프니츠는 따분한 작가이고 그의 영향으로 독일 철학은 현학적이고 무미건조해졌다. 그의 제자인 볼프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출판되기까지 독일의 강단 철학을 지배하는데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버려둔 채 무미건조한 직업적 사고방식만 고수했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독일 밖의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당대 철학자인 로크는 영국 철학계를 장악했으며 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가 계속 군림하다가 볼테르가 등장한 후 상황이 바뀌어 영국 경험론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라이프니츠는 위대한 철학자이며 그의 위대함은 이전 시대보다 지금 더 두드러진다. 수학자나 미적분학의 발명자로서 누리는 명성과 별개로 그는 수리논리학의 개척자로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중요한 의미를 통찰했다.

 

12. 철학적 자유주의

 

초기 자유주의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역사와 사회 상황의 산물이었고 종교적 관념을 지지했는데 광신에 빠진 개신교가 아닌 광교회파 개신교에 가까운 입장으로 종교 전쟁을 우둔하고 지각없는 짓으로 여겼다. 상공업의 가치를 인정하고 군주제와 귀족정치가 아니라 떠오르는 중산 계급을 지지했다. 개인이 노동을 통해 축적한 재산에 대한 권리를 중시했다. 상속 원리를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종전의 견해보다 상속 범위를 훨씬 제한했다. 왕권신수설을 거부하고 각 사회는 어쨌든 처음에는 정치체재에 대한 선택권을 보유한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이는 초기 자유주의가 재산권에 의해 조율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을 암시한다.

초기 자유주의는 낙관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철학 사상으로 점점 성장하는 신흥 세력을 대표하면서 별 어려움 없이 승리를 거두고 인류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였다. 초기 자유주의가 정치학과 철학 분야에서 중세적 사상에 반대한 까닭은 중세를 대변한 이론들이 종교적 박해를 정당화하고 과학의 발전을 차단하기 위해 교권이나 왕권의 승인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초기 자유주의자들의 소망은 100년 동안 약해지지 않으면서 마침내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져 나폴레옹을 등장시켰고 이후 신성동맹까지 이끌어 냈다. 자유주의는 제2의 바람을 일으켜 19세기의 새로운 낙관주의를 주도할 수 있었다.

초기 자유주의는 지적 문제에 관해 개인주의 성향을 드러냈고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했지만, 감정과 윤리 문제에 관해 특별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형태의 자유주의가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헌법 기초자, 프랑스의 백과전서학파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혁명 시기에 지롱드 당을 포함한 온건파 정당들이 초기 자유주의를 대표했으나 그들이 축출됨에 따라 자유주의는 한 세대 동안 프랑스 정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자유주의는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당시 미국은 봉건제나 국교회의 훼방을 받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1776년부터 오늘날까지 적어도 1933년까지 미국 사회를 지배했다.

 

자유주의 철학을 처음 포괄적으로 종합한 로크는 근대 철학자 가운데 가장 심오한 철학자는 아니지만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실천적으로 기존 정치 체제에 이론적으로 당시 유행하던 데카르트주의에 저항하도록 이끌었으며 분명히 파란 많은 사건이 발생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

 

존 로크, 인간 오성론, 관용에 관한 첫 편지, 통치론

13. 로크의 인식론

 

존 로크는 역사상 혁명 가운데 가장 온건했으며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둔 1688년 명예혁명의 주창자다. 명예혁명이 겨냥한 목표는 온건했지만 대부분 착오 없이 성취되었기에 이후 영국에서 더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로크는 명예혁명의 정신을 충실하게 구현한 사상가로서 대부분의 저술 역시 1688년부터 시작해 몇 년 내에 출판되었다.

이론철학 분야의 주저인 『인간 오성론』은 1687년에 탈고했으나 1690년에 출간되었다. 『관용에 관한 첫 편지』는 1689년 최초로 네덜란드에서 라틴어로 나왔다. 관용에 관한 다른 편지 둘은 1690년과 1692년 각각 출간되었다. 『통치론』은 1689년부터 1693년 사이 몇 년 동안에 국한되어 나왔다.

로크의 아버지는 청교도였으며 의회 편에 서서 싸웠다. 로크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할 무렵 여전히 스콜라 철학이 지배했다. 로크는 스콜라 철학과 독립교회파의 광신 성향을 모두 혐오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의사가 되었으며 샤프츠버리 경, 바로 드라이든의 ‘아키토펠’이 그를 후원했다.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기 전, 몇 해 동안 로크는 심각한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 이론을 통해서든 실천을 통해서든 영국 정치 상황에 관여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 사이 『인간 오성론』을 집필했다. 이는 로크의 가장 중요한 저술이며 이 책으로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로크의 정치 학설은 몽테스키외가 발전시킨 정치적 견해와 함께 미국 헌법에 구현되며 대통령과 의회가 심각한 갈등을 빚을 때마다 쓸모 있는 역할을 했다. 영국 헌법은 대략 50년 전까지만 해도 로크의 학설에 기반을 두었으며 프랑스가 1871년 채택한 헌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크가 18세기 프랑스 사회에 미친 역할은 컸다. 볼테르는 젊은 시절 한동안 영국에서 지내며 『철학 편지』로 동포에게 영국 사상을 전해주었다. 계몽철학자들과 온건한 개혁가들은 로크를 추종하고 극단적 혁명가들은 루소를 추종했다. 칸트가 활동한 시기 이후 독일 관념론이 영국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철학과 정치학은 다시 관계를 맺었다. 주로 독일 관념론을 추종한 철학자들이 보수파였던 반면 급진파인 벤담주의자들은 로크의 사상을 따랐다.

로크 사상의 특징은 독단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점인데 이러한 경향은 그에게서 시작되어 자유주의 운동 전체로 전파되었다.

로크가 사용한 이성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다. 다른 하나는 개연성만 지닐 뿐 확실하게 지지할 수 없지만, 실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되는 명제에 대한 탐구다.

경험론이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학설이라면 로크는 경험론의 창시자로 여겨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 오성론』 1권은 플라톤, 데카르트, 스콜라 철학자의 사상에 반대하면서 단지 이성에서 유래한 본유 관념이나 원칙은 없다는 논증을 펼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2권에서는 어떻게 경험을 통해 각양각색의 관념이 생기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는 일에 착수한다.

지각은 지식에 이르는 첫 단계이자 지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재료가 모이는 입구라고 로크는 말한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자명한 진리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적어도 영어권 나라와 교육 내용에 포함된 상식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크가 살았던 당시 정신은 모든 종류의 사물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라고 여겼기에 지식이 지각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선언은 새로운 혁명적 학설이었다.

플라톤은 『테아이토스』에서 지식과 지각의 동일성 논제를 논박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플라톤 이후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를 포함한 거의 모든 철학자는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은 대부분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로크의 철두철미한 경험론은 대담한 혁신적 견해였다.

아직까지 아무도 신뢰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갖춘 철학을 세우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로크는 신뢰성을 자기 철학의 목표로 삼았으며 목표에 이르려고 일관성을 포기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대부분 로크와 반대로 일관성을 위해 신뢰성을 포기했다.

 

로크의 윤리 학설은 학설 자체로서 중요하기도 하고 벤담의 철학을 예상하는 것으로 흥미롭기도 하다.

 

로크의 정치철학, 상속 원리, 자연상태와 자연법, 사회계약, 재산, 견제와 균형

14. 로크의 정치철학

 

A. 상속 원리

로크는 1688년 명예혁명 직후에 『통치론』 두 권을 저술했는데 정치사상사의 맥락에서 두 번째 저술이 중요하다. 그것은 1680년에 출간된 로버트 필머 경의 『가부장제: 국왕의 자연적 권력』에 대한 답변서다. 찰스 1세의 치하에서 집필한 필머 경은 왕권신수설의 열렬한 지지자로 1653년까지 찰스 1세의 처형과 크롬웰의 정치적 승리로 인해 모진 고초를 겪었다. 로버트 필머 경은 찰스 1세에게 작위를 받는 영광을 누렸으나 이후 저택이 열 번에 걸쳐 의회민주주의자들의 습격을 받는 수난을 당했다고 전한다. 필머는 왕권신수설을 지지하는 당파 중에서 가장 극단에 치우친 분파에 속했다

찰스 1세와 측근의 요구는 이전 시대의 왕들에게 허용된 범위를 초과했다. 필머는 영국 예수회의 수사인 파슨스와 스코틀랜드 칼뱅파인 뷰캐넌의 견해가 대부분 일치하지 않지만 두 사람은 모두 군주가 악정을 행하면 백성들이 폐위해도 좋다고 주장한 점을 지적한다. 물론 파슨스는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 여왕을, 뷰캐넌은 가톨릭교도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염두에 두었다. 뷰캐넌의 학설은 성공을 거두고 인정을 받았으나 파슨스의 학설은 동료 수사인 캠피언이 처형되는 악재가 겹쳐 승인받지 못했다.

영국에서 왕권신수설이 타파된 주된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종교의 다원화이고 다른 하나는 군주와 귀족 계급, 상류 자본가 계급의 권력 투쟁이다.

 

B. 자연상태와 자연법

로크는 『통치론』 서두에서 정부의 권위는 아버지의 권위에서 도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정부에 선행한 ‘자연상태’를 가정한다. 자연상태에 ‘자연법’이 있는데 자연법은 신성한 계명들로 구성되며 인간 입법자가 제정하지 않는다. 로크에게 자연상태가 어느 정도 설명을 위한 단순한 가설인지, 역사적으로 실존한 상태로 가정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중세 내내 ‘고리대금업’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는 자연법에 따라 비난을 받았다. 당시 교회 재산은 대부분 토지였는데 지주들은 돈을 빌려주는 편보다는 오히려 빌리는 편에 속했다. 그러나 개신교가 발생했을 때 지지층, 특히 칼뱅주의를 지지한 층은 주로 부유한 중산 계급이라 반대였다. 우선 칼뱅이, 다음에는 다른 개신교도가 마지막으로 가톨릭교회가 ‘고리대금업’을 승인했다. 따라서 자연법은 때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는 했어도, 자연법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연법에 의의를 제기한 가장 큰 반론은 다음과 같다. 자연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송 사건의 재판관이 된다는 점인데 각자가 자기 원리를 스스로 찾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악한 면을 고치는 구제책이 바로 정부지만 자연스러운 구제책은 아니다. 로크에 따르면 정부를 세우겠다는 계약으로 자연상태에서 벗어났다. 어떤 계약을 하든 자연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며 하나의 정치 체제를 구성할 뿐이다. 오늘날 독립된 각국 정부는 상대에 대해 자연상태에 놓여 있다.

로크의 법 이론은 개인의 ‘권리’가 국가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견해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자연법의 원리에 따른 보복 행동을 정당화할 만한 상해를 개인이 당했을 경우, 국가가 대신 보복을 하도록 규정한 실정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C. 사회계약

17세기 정치와 관련된 사변 속에서 정부의 기원에 대한 두 유형의 주요이론이 등장했다. 첫째는 로버트 필머 경의 이론에서 발견된다. 신이 특정인에게 권력을 부여했고 권력을 부여받은 자들이나 후계자들이 합법적 정부를 구성하며 저항은 반역 행위일 뿐 아니라 불경한 짓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면 옛날 고대에 대한 감상적 태도로 인해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초기 문명사회에서 왕은 신성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왕은 당연히 이러한 이론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한편 귀족 계급은 이러한 이론을 지지할 동기를, 또한 반대할 동기도 갖고 있었다.

로크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시민 정부는 계약으로 형성되고 세상에 순수하게 속한 사안으로서 신성한 권위로 확립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사회계약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고 어떤 이는 법적 의제로 간주했지만, 이들이 모두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는 정부 권위의 기원을 지상에서 찾은 점이었다. 사실 그들은 계약을 가정하는 것 말고 왕권신수설에 맞설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계약론은 전제 정치를 정당화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다. 예컨대 홉스는 시민이 선택된 군주에게 모든 권한을 양도하는 계약을 맺었으나 군주는 계약에 참여하지 않은 필연적 결과로 무제한의 권위를 획득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계약으로 세워졌다는 이론은 진화론이 보편화 되기 이전 사상이다. 정부는 점차로 성장하여 퍼져나갔음이 분명하지만 새로운 지역에 갑자기 출현했을 수도 있다. 인간은 인류학을 연구하기 전에 정부의 시초에 얽힌 심리 기제, 혹은 나중에 유용하다고 입증될 제도와 관습을 채택하도록 이끈 기발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회계약론은 정부의 정당성을 보여 줄 법적 의제로서 진실을 가늠한 어떤 척도가 된다.

 

D. 재산

로크의 사상 속에는 병행하지만 조화될 수 없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발전한 자본주의를 예견한 학설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에 조금 더 가까운 사고방식을 보여 준 학설이다. 누구나 자기 노동의 결과로 얻은 사유재산은 갖거나 마땅히 가져야 한다.

모든 곳에서 귀족은 대규모 농지를 소유했으며 농민에게서 고정된 비율의 생산물이나 시기별로 변동이 가능한 소작료를 강제로 거두었다. 전자의 방식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후자의 방식은 영국에 보급되었다. 먼 동부 유럽에 속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노동자는 지주를 위해 일할 뿐 사실상 아무 권리도 없는 농노였다.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이러한 낡은 제도는 프랑스에서 최후를 맞이했고 북부 이탈리아와 서부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혁명군대에 정복당함으로써 사라졌다. 프로이센에선 나폴레옹의 군대에 패한 결과로 러시아에선 크림 전쟁에서 패하면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두 나라의 귀족은 부동산 소유권을 그대로 보유했다. 동프로이센의 경우 농노제는 나치당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으나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러시아와 지금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는 러시아혁명으로 귀족 계급의 부동산 소유권이 박탈되었다. 헝가리와 폴란드에선 귀족 계급이 현존했는데 동폴란드의 귀족 계급이 1940년 소련 정부에 의해 비로소 청산되었다. 그런데 소련 정부는 전역의 소작농 제도를 집단동장 제도로 대체하려고 온 힘을 쏟았다.

노동가치설은 윤리 측면과 경제 측면을 갖는다. 말하자면 생산물의 가치는 생산물에 들인 노동에 비례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실상 노동이 가격을 규제한다는 주장이다. 노동가치설은 흔히 이익에 눈이 먼 약탈자로 비친 계급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지지를 얻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대적하기 위해 노동가치설을 주장했다. 리카도는 지주 계급에 대적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에 대적하기 위해 노동가치설을 주장했다.

 

E. 견제와 균형

정부의 입법·행정·사법 기능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학설은 자유주의의 특징이다. 이 학설은 영국에서 스튜어트 가문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생겨나 적어도 입법과 행정에 관해서는 로크가 분명한 형식으로 표현했다. 로크는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과 행정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크가 말한 입법부는 영국 의회를 의미하고 행정부는 국왕을 의미한다.

몽테스키외는 견제와 균형의 학설을 프랑스에 전파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프랑스혁명 당시에 온건파가 이 학설을 주장했으나 자코뱅 당이 승리하면서 한동안 잊혔다. 견제와 균형의 학설은 나폴레옹에게 당연히 쓸모가 없었지만, 왕정복고 시기에 소생했다가 나폴레옹 3세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다가 1871년 소생하여 대통령이 권한을 아주 적게 가지고 정부가 의회를 해산할 수 없다고 규정한 헌법을 채택하도록 이끌었다. 그 결과로 하원은 정부와 유권자에 비해 큰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근대 영국보다 권력 분립이 잘 이루어졌으나 로크의 원리에 근거한 분립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입법부가 행정부의 권한을 무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로크의 권력 분립 원리를 가장 완벽하게 적용한 나라는 미국으로 대통령과 의회는 서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으며 대법원은 대통령과 의회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부주의로 인해 미국의 헌법은 대법원을 입법부의 한 지부인 양 규정하고 있는데 대법원이 아니라고 말하면 어떤 법률도 법률로서 효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크의 정치철학은 산업혁명 때까지 전반적으로 적절하고 유용했으나 이후 점점 중요한 문제에 대처할 수 없게 되었다. 거대 주식회사에 통합된 재산의 힘은 로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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