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크, 버클리, 흄, 데카르트, 순수이성 비판

15. 로크의 영향

 

로크의 후계자들은 버클리와 흄, 계몽철학자들, 벤담을 비롯한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이었다. 마르크스와 제자들도 후계자에 속했다.

로크가 살았던 당시에 주요한 철학적 반대자들은 데카르트 추종자들과 라이프니츠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거둔 로크 철학의 승리는 대체로 뉴턴의 명성 덕분이었는데 거기에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면도 있다.

데카르트가 당대에 철학자로서 누렸던 권위는 수학과 자연철학 분야의 연구 업적 덕분에 높아졌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제안한 우주 물질의 와동설은 분명히 태양계를 설명한 측면에서 뉴턴의 중력 법칙보다 뒤처진 이론이었다. 뉴턴의 우주 발생론이 승리를 거두면서 데카르트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심은 감소한 반면에, 영국에 관한 관심은 증폭되었다. 두 요인으로 사람들은 로크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지성인들은 낡아빠지고 부패하여 쇠퇴한 전제 정치에 항거하여 영국을 자유의 고향으로서 그리워했으며 로크의 정치 학설로 인해 그의 철학에도 호의를 보였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프랑스에서 로크의 영향력은 흄으로 인해 더욱 강해졌다.

영국의 사상을 프랑스에 전한 주요 인물은 볼테르다. 프랑스 혁명 이전 영국의 로크 추종자들은 정치 학설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버클리는 주교였던 만큼 정치학에 관심이 없었으며 흄은 볼링브로크의 지도를 받던 토리당의 당원이었다.

1781년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출간될 때까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를 포함한 낡은 철학 전통이 더욱 새로운 경험적 방법으로 확실하게 극복된 것처럼 보였다. 콜리지 같은 혁명 반대자들은 프랑스 무신론에 반대하기 위한 근거를 칸트의 철학에서 찾아냈다. 프랑스에 저항하던 독일인도 정신적 지주로서 독일 철학을 자랑스러워했다.

루소와 칸트 이후 두 가지 자유주의 학파가 형성되었는데 굳센 자유주의와 여린 자유주의로 구별될 수도 있다. 굳센 자유주의는 논리적 단계를 밟아 벤담, 리카도, 마르크스를 거쳐 스탈린으로 이어졌고 여린 자유주의는 다른 논리적 단계를 밟아 피히테, 바이런, 칼라일, 니체를 거쳐 히틀러로 전개되었다.

데카르트는 신의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을 제시했는데 가장 중요한 증명은 11세기에 캔터베리의 대주고 성 안셀무스가 처음 발명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범신론적 신이 등장하는데 정통 유대교도의 눈에는 도무지 신으로 비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스피노자의 신 존재 증명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 증명에 속하며 모든 명제는 반드시 주어와 술어로 구성된다는 학설로 귀결된다.

로크는 쾌락이 선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18. 19세기까지 경험주의자들을 지배한 견해였다. 이와 달리 이들의 반대자들은 쾌락을 경멸하고 멸시하면서 훨씬 고상해 보이는 다양한 윤리 체계들을 선보였다. 홉스는 힘에 가치를 부여했으며 스피노자는 어느 정도까지 홉스의 견해에 동의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에는 조화되지 않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홉스의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선이 신과 교감하는 신비스러운 합일 속에 있다는 견해다. 칸트는 윤리학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리면서 윤리적 전제들로부터 자신의 형이상학을 도출했다. 칸트의 윤리학은 철학사에서 중요한데 반 공리주의의 속한 선험 윤리이자 이른바 ‘고상한’ 윤리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버클리, 신 시각 이론, 인간 지식의 원리, 하일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

16. 버클리

 

버클리는 철학사에서 물질의 실존을 부정했다고 알려진 중요한 인물이다. 재치있고 교묘한 논증으로 그것을 지지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물체는 오로지 지각됨으로써 실존한다.

버클리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22세 때 더블린 트리니티대학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그는 스위프트의 소개로 궁중 배알을 했으며 스위프트의 바네사는 그에게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남겼다. 그는 버뮤다에 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세운 다음, 목표를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로드아일랜드에서 3년간 지낸 후 계획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제국의 행로는 서쪽으로 나아간다.”라는 유명한 말로 캘리포니아의 한 도시에 버클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1734년 그는 클로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만년에 타르수 때문에 철학을 포기하는데 타르수에 병을 고치는 오묘한 속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의 최고 작품은 모두 젊은 시절에 나왔는데 『신 시각 이론』은 1709년에, 『인간 지식의 원리』는 1710년에 『하일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는 1713년에 출판되었다.

물질에 반대한 그의 논증은 『하일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대화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하일라스는 과학 교육을 받은 상식의 대변자이고 필로누스는 버클리 자신이다.

버클리의 논증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는 우리가 한편으로 물체가 아니라 빛깔과 소리를 지각하며 빛깔이나 소리는 ‘정신적인’ 것이거나 ‘정신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추리의 첫 부분은 완벽한 설득력을 갖지만, 둘째부분은 ‘정신적’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논증의 질이 떨어진다. 사실 그는 만물은 물질 아니면 정신일 수밖에 없으며 어떤 것도 물질이면서 정신인 경우가 없다는 기존의 일반적 견해에 의존하여 논증을 펼친다.

버클리의 경험적 논증과 논리적 논증을 결합하려는 시도 자체는 약점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논리적 논증이 타당하면 경험적 논증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맛에 대해서도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끌어낸 논증이 반복된다. 단맛은 쾌락을 일으키고 쓴맛은 고통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둘 다 정신적인 것이다. 또한, 건강할 때는 달게 느껴지는 것이 아플 때는 쓰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역설한다. 냄새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증을 제시한다. 냄새는 쾌감이거나 불쾌감이므로 “지각하는 실체 혹은 정신 말고 어떤 것 안에도 실존할 수 없다.” 버클리는 물질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정신적 실체 속에 있어야 하며, 아무것도 정신적인 것이면서 물질적인 것일 수 없다고 가정한다.

버클리는 지각되지 않는 사물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떤 현실적 사물, 바로 정신적 실체는 지각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어떤 사건이 지각된다고 말할 때 분명 그러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보다 많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식론은 다른 관점을 암시한다. 우리는 완성된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떠받칠 근거가 되는 지식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버클리가 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지각표상은 미리 정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추론을 거치지 않고 안다고 느끼는 명제를 수집하고 수집한 명제가 대부분 날짜가 명기된 개별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사건을 ‘지각표상’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지각표상은 추론을 거치지 않고 아는 사건이다

 

버클리는 오직 정신과 정신적 사건만 실존할 수 있다고 증명하는 논리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흄, 인간 본성론,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영국사

17. 흄

 

흄은 로크와 버클리로 이어진 경험주의 철학에서 논리적 결혼을 이끌어내고 경험주의 철학을 일관성 있게 표현함으로써 상식에 어긋나고 신뢰할 수 없는 철학으로 만들었다. 흄의 저술이 발표된 이후 형이상학자들은 심심풀이 삼아 흄의 견해를 논박하는 일에 몰두했다.

흄은 『인간 본성론』을 프랑스에 머물던 1734년부터 1737년 사이에 썼다. 1권과 2권은 1739년에, 3권은 1740년에 출판했는데 당시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젊은 학자였다. 학계에 그다지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인간 본성론』에서 내린 철학적 결론은 당대의 거의 모든 학파가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흄의 저술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인간 오성에 대한 탐구』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인간 본성론』보다 유명세를 탔다. 칸트를 ‘독단의 선잠’에서 꺠어 나게 한 것도 이 책이었는데 당시 칸트는 『인간 본성론』에 대해 몰랐던 듯하다.

흄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도 썼으나 생전에 미발표로 보관되었다가 1779년에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기적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유명해졌는데 기적의 사건들을 증명할만한 역사상의 증거는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

흄의 『영국사』는 1755년과 이듬해에 출판되었는데 휘그당에 비해 토리당이 스코틀랜드인보다 잉글랜드인이 우월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역사를 철학의 초연함이나 공평함에 알맞은 분야로 생각하지 않았다. 1763년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 당대 계몽철학자들은 그를 환대했다. 하지만 그는 루소와 우정을 맺으면서 언쟁에 휘말렸다. 그 결과 루소가 절교를 선언했다.

흄의 『인간 본성론』은 세 권으로 나눠 각각 오성, 정념, 도덕에 관해 논한다. 그는 인상과 관념을 지각의 두 종류라고 말한다. 인상은 강하고 격렬한 지각이다. 관념은 사고 활동과 추론 활동 속에 나타난 인상에 대한 희미한 심상이라고 주장한다.

흄은 철학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일곱 가지 관계를 유사성, 동일성, 시간과 장소의 관계, 양의 비율이나 수, 질의 정도, 반대, 인과관계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관계는 두 종류로 나뉘는데 오직 관념에 의존한 관계와 관념의 변화 없이 바뀌는 관계다. 첫째 종류에는 유사성, 질의 정도, 양의 비율이나 수가 속한다. 그러나 시공 관계와 인과관계는 둘째 종류에 속한다. 첫째 종류의 관계만 우리에게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며 다른 종류의 관계에 관한 지식은 개연적 지식일뿐이다. 대수학과 산수는 확실성을 잃지 않으면서 긴 연쇄 추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이다. 기하학은 대수학이나 산수만큼 확실한 학문이 아닌데 우리는 기하학에 속한 공리의 진리성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관념에만 의존하지 않는 세 가지 관계는 동일성, 시공 관계, 인과관계다.

『인간 본성론』의 부제는 ‘실험적 추리 방법을 도덕의 주제에 채용하려는 시도’다. 그가 과학적 방법이야말로 진리, 건전한 진리, 유일한 진리를 생산한다고 믿으면서 시작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는 확신으로 끝을 맺었다.

흄의 철학은 참이든 거짓이든 18세기의 합리성에 대해 파산 선고를 내렸다. 그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감각될 수 있는 것과 경험적인 것 말고 아무것도 신뢰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경험과 관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면 무엇이든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흄은 로크보다 뛰어난 지성 능력과 예리한 분석력을 가진 반면, 모순을 편안하게 수용하는 면에서 덜 관대했는데 경험과 관찰에서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는 비참한 결론에 도달한다. 합리적인 믿음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불이 따뜻하고 물은 시원하다고 믿는 유일한 이유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너무 큰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믿음도 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어떤 행동도 다른 행동보다 더 합리적인 수도 없다. 왜냐하면, 행동은 전부 비합리적인 확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흄은 이렇게 최종 결론을 내렸던 것 같지 않다. 그는 『인간 본성론』 제1권의 결론을 요약하면서 가장 회의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오류는 위험하지만, 철학에서 오류는 재미있을 뿐이다.”

 

흄의 회의주의는 전적으로 귀납 원리를 거부하는 데 달려 있다. 흄은 순수한 경험론이 과학을 위한 충분한 기초가 아님을 증명했다.

 

루소, 뉴턴, 프랑켄슈타인

18. 낭만주의 운동

 

초기 낭만주의는 루소에 의해 정치학과 닿아 있었다. 낭만주의 운동을 최초로 이끈 인물은 루소지만 그는 이미 있던 낭만주의 경향을 일정한 한계 내에서 표현한 것이다. 18세기에 프랑스의 교양인은 감수성을 높이 찬양했는데 감수성은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표현하고 공감의 정서를 잘 느끼는 경향이다.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감정은 직접적이며 격렬한 동시에 사고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낭만주의자의 눈에 가난한 사람은 도시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으며 산업 노동과도 무관했다. 무산계급은 19세기에 등장한 개념인데 빈곤층과 마찬가지로 낭만적으로 표현되지만 둘은 전혀 다르다.

루소는 기존의 감수성 예찬에다가 호소력을 더하며 낭만의 폭과 범위를 넓혀 놓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이룩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민주주의자였고 긴 생애 동안 지인에 의존하여 가난한 유랑자로 살았다. 자주 그들의 호의를 저버리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기도 했으나 감정에 따른 그러한 반응이야말로 감수성의 열렬한 신봉자에게 바랄만한 것이었다.

1660년부터 루소에 이르는 시기, 사람들은 종교 전쟁과 프랑스, 영국, 독일의 내란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들은 혼란의 위험, 강한 열정의 소유자에게 나타나는 무정부주의적 경향, 안전의 가치와 의의, 안전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희생에 대해 너무도 잘 알았다. 사려는 최고 덕으로 간주 되고 지성은 파괴적인 동시에 타락한 광신에 반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평가되었으며 세련된 예절과 태도는 야만주의에 맞서는 방책으로 칭송되었다.

뉴턴의 질서정연한 우주, 행성들이 법칙에 따라 정해진 궤도로 태양을 변함없이 회전하는 우주는 상상 속 좋은 정부의 상징이 되었다. 격정적 감정을 억제하는 능력은 교육의 주된 목표였으며 고상함의 확실한 기준이었다. 낭만주의 이전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기에 조용히 사라져 갔다. 롤랑 부인과 당통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수사학적 의미에서 최후를 맞았다.

낭만주의자들은 평화와 고요가 아니라 활기차고 정열적인 개인적 삶을 간절히 원했다. 그들이 산업주의에 공감을 표현할 수 없었던 까닭은 산업주의가 추악한 면모를 드러냈으며 돈벌이는 영생할 영혼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고 근데 경제 조직체의 성장은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저해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들의 독특한 기질은 허구 세계를 그린 소설 속에 잘 드러난다. 그들은 기이한 것, 예컨대 유령이나 퇴락한 고성, 한때 번성했던 가문의 우울한 후손, 숙련된 최면술사, 신비학, 몰락한 폭군, 레반트의 해적을 좋아했다.

낭만주의 운동 기원의 측면에서 루소의 덕을 입었지만, 초창기에 주로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8세가 말엽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기운찬 젊은 청년들이었는데 젊음에 잘 어울리는 특징적 견해와 사고방식을 표현했다. 젊어서 죽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던 낭만주의자들은 결국 가톨릭교회의 획일성으로 인해 자신들만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콜리지와 셸리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독일의 이러한 영향과 별도로 19세기 초 유사한 낭만주의적 경향이 영국에 전파되었다. 영국에는 19세기 초에 전파되었다. 프랑스는 왕정복고 후 낭만주의 사상이 번성하여 빅토르 위고까지 이어졌다. 미국의 낭만주의 사상은 멜빌, 소로, 브룩 농장 속에 거의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며 에머슨과 호손에서 다소 유연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 리가 알프스산맥의 낭만적인 풍광 속에서 바이런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영감을 얻어 쓴 책인데 낭만주의의 발전을 거의 다 보여줄 만큼 비유적인 예언의 역사로 간주 될 내용을 담고 있다.

낭만주의 운동의 본질은 인간이 성격을 사회적 규약과 도덕의 족쇄에서 자유롭게 하려는 목표에 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족쇄는 바람직한 욕구의 대상이 될만한 활동을 훼방하는 한낱 쓸모없는 방해물이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도덕 영역에 대한 반항으로 변모했다. 무법적인 새로운 자아를 자극하고 고무함으로써 사회적 협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그 후예들은 무정부주의나 전제정치 가운데 하나를 대안으로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기주의는 우선 타인에게 부모의 부드러운 애정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타인 역시 자신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분개했으며 부드러운 애정에 대한 좌절된 욕망은 증오와 폭력으로 변해버렸다.

 

루소, 고백록, 사회계약론, 에밀, 신 엘로이즈, 흄

19. 루소

 

루소는 낭만주의 운동의 시조이자 인간의 감정에서 비인간적 사실을 추론한 사상 체계의 창시자다. 전통적 절대 군주제에 반대되는 유사 민주주의적 독재정치를 옹호한 정치철학을 발명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루소 이후 개혁가로 자처한 사람들은 크게 루소를 추종하는 부류와 로크를 추종하는 부류로 나뉜다.

루소의 전기는 『고백록』에 상세하고 솔직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대죄인으로 비하하는 일을 즐겼으며 때로는 과장하기도 했다.

루소는 제네바에서 태어나 정통 칼뱅교도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가난했으며 시계 제작자와 무용 교사를 겸했다. 어머니는 루소가 어렸을 적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친척 아주머니가 그를 양육했다. 열두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소매상을 전전하며 수습생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열여섯 살에 제네바에서 사부아로 건너갔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가톨릭교회의 사제를 찾아가 개종하겠다고 말했다. 격식에 따른 개종 절차는 토리노에 있는 세례 지원자 학원에서 거행되었는데 무려 9일이 걸렸다.

청소년기에 루소는 방랑자로서 다양한 삶을 살았는데 도보여행을 하거나 남에게 의지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그가 파리에 있는 호텔의 하녀인 테레즈 르 바쇠르에게 열중했던 것도 이 시기로 1745년경이었다. 그는 남은 생애를 그녀와 함께 살았다.

루소의 문학적 성공은 말년에 찾아온다. 디종 아카데미는 “예술과 과학은 인류에게 이익을 주었는가?”라는 문제에 관한 논문 중에서 가장 우수한 논문을 골라 상을 수여했다. 루소는 부정적 주장을 펼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그는 과학과 문학, 예술은 도덕의 가장 큰 적이며 탐욕을 조장하는 노예근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디종 아카데미상을 받은 뒤 자신의 논문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을 택하고 앞으로는 시간을 알 필요가 없을 것이라며 시계를 팔아버렸다.

1754년 루소가 유명해지자 그의 고향 주민들이 그를 고향 도시로 초청했다. 그는 이를 수락했고 오직 칼뱅주의자만 제네바의 시민이 될 수 있었기에 스스로 원래의 신앙을 회복했다.

그는 극작가이며 연극 애호가였던 볼테르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리스본 지진과 신학적 의문, 무대 연극에 대한 도덕 문제를 둘러싸고 적대감은 더욱 심해졌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는 1760년에,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1762년에 출판되었다. ‘자연의’ 원리에 따른 교육론에 해당하는 『에밀』은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당국이 무해한 저술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사회계약론』은 더 위험한 사상을 담고 있었는데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왕권신수설을 부인했다. 두 권은 루소의 명성을 높여준 반면 그를 향한 공식적 비난과 규탄의 폭풍을 일으켰다. 그는 프랑스에서 도망쳐야 했다. 제네바시는 루소와 연루된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베른시도 그의 망명을 거절했다. 그는 마침내 영국으로 도망쳤는데 1762년에 그곳에서 만난 흄이 그를 돌봐주었다.

흄은 루소를 가장 오래 아낀다고 말하면서 친분을 유지한 덕분에 루소의 생애 내내 우정을 돈독히 했다. 그런데 이 무렵 루소는 박해 망상에 사로잡혀서 흄이 자기 목숨을 노리는 음모의 대행자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루소가 절교를 선언하고 떠나자 흄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일생 동안 오로지 감정에만 충실했다. 이 점에 관해 이전의 어떤 사례도 능가할 정도로 고양되어 있다. 그런데 감수성은 그에게 쾌락보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그는 자신의 옷뿐만 아니라 피부까지도 벗어버린 채,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와 맞서 싸우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 같다.”

루소는 신학 분야에서 혁신을 이루었는데 지금까지 대다수 개신교 신학자들이 루소의 사상을 수용했다.

루소의 정치이론은 1762년에 출간된 『사회계약론』에서 제시된다. 이 책은 그의 저술 대부분과 아주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사회계약론』은 감상적인 면은 거의 드러내지 않고 지적 추리에 훨씬 근접한 내용을 포함한다. 민주주의에 대해 말로만 호의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여기에 등장한 학설은 전제주의 국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이바지한다.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을 이끈 대부분의 지도자가 떠받든 성경이 되었으나 그의 제자 중 책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에게 형이상학적 추상에 빠지는 습관을 다시 소개했으며 일반의지의 학설로 지도자와 국민의 신비한 일체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헤겔은 이 책에 기술된 철학의 대부분을 프로이센의 전체 군주국을 지지하는 데 이용했다. 루소의 철학이 실천적으로 거둔 첫 결실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였다. 러시아와 독일의 독재정치는 부분적으로 루소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성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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