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문학의 한계와 확장에 대한 고찰(원고지 99매)

 

 

 

 

 이 글은 수필 문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고, 마지막으로 확장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수필 문학의 문제점이다.

 문학의 사전적 의미는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그런 작품. ,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따위가 있다.”(표준국어대사전)

 이 중에서 수필만이 유독 문학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확고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왜냐하면 메이저 중앙 일간지 중에 신춘문예로 수필을 뽑는 데가 없기 때문이다.(단순 무식한 견해라 해도 할 수 없다)

 수필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보통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뉘는데,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머, 위트, 기지가 들어 있다.”(표준국어대사전)

 통상, 우리가 수필이라 일컫는 것을 전문용어로 경수필(輕隨筆). 미셀러니(miscellany). 연수필(軟隨筆)이라 하는데, 사전적 의미는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을 소재로 가볍게 쓴 수필. 감성적ㆍ주관적ㆍ개인적ㆍ정서적 특성을 지니는 신변잡기이다.”(표준국어대사전)

 신변자기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적은 수필체의 글’(표준국어대사전)이다.

 

 새삼스럽지만 문학과 수필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우리가 보통 쓰는 수필, 신변잡기가 왜 본격 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문학적 위상이 확고하지 못한지, 알아보겠다.

 “감성적ㆍ주관적ㆍ개인적ㆍ정서적 특성을 지니는 신변잡기이다라는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감정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문학으로서 확실히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성적. 객관적. 사회적. 논리적 특성도 지녀야 사상이 확보돼 문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감정 충만, 사상 빈곤이 수필의 결정적 문제다.

 다시 말하면 신변잡기는 자기중심적 에피소드로 감성적ㆍ주관적ㆍ개인적ㆍ정서적 특성을보이다 보니, 사상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문학이 되려면 감성적이면서도 이성적어야 하고,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이어야 하고,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어야 하고, 정서적이면서도 논리적이야 한다.

 즉,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가 함께 있어야 한다. 칼 융(1875~1961. 스위스. 정신분석학자)이 말한 개별성과 보편성을 같이 지녀야 한다. 여기서 감성적. 주관적, 개인적. 정서적인 면이 개별성(개인적 자아)이라면, 이성적. 객관적. 사회적. 논리적인 면이 보편성(사회적 자아)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신변잡기는 사유의 시선이 개인적 자아에 머물러 있다. 성숙한 사회적 자아가 없으므로 본격 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사유의 대상이 나. 자식. 부모. 형제. 친구 등 내 신변은 물론, 공동체와의 연대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올바른 역사 인식이 없는 자의식과 실존에 눈뜨지 못한 미성숙한 자아가 작품 속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격이라면, 신변잡기를 너무 모욕하는 걸까?

 반복하지만, 신변잡기는 자기 얘기에 함몰되어 있어 에피소드에 의미 부여가 빈약하다. 대부분 느낌과 감정이 주를 이루는 반면, 사색과 상념이 빠져 있다. 일기(日記)가 되지 않고 문학으로서의 글이 되려면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가 양립하고. (개별성) 얘기인 동시에 우리(보편성)의 얘기여야 한다.

 문학의 기능에는 도덕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이 있는데, 도덕적 기능이란 공자가 한 말로, 삶의 교훈을 얻는 것을 말한다. 쾌락적 기능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정신적 쾌락을 말한다. 쾌락적 기능이 예술성을 담당한다면 도덕적 기능은 철학성을 담당한다.

 “감성적ㆍ주관적ㆍ개인적ㆍ정서적 특성을 지니는 신변잡기는 감동과 카타르시스라는 쾌락적 기능은 담당할 수 있어도, 이성적. 객관적. 사회적. 논리적인 면이 부족하기에, 공동체의 이상과 삶의 교훈이라는 도덕적 기능은 수행하기가 곤란하다. 문학이 되려면 예술성과 철학성이 함께 해야 함은 물론이다.

 

 신변잡기가 무의미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신변잡기는 개인의 경험을 기록하고, 감정을 해소하며, 자신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특히 상실과 같은 어려운 체험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치유와 성장의 과정이 될 수 있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죽음 등으로 인한 유년기의 애정 결핍, 부모님의 불화 혹은 아버지의 가정폭력 등으로 인한 자기 파괴적 상상과 응징 심리, 청년기 지독한 사랑과 이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 등등, 복잡한 내면을 글쓰기로 발산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신변잡기는 자신의 심정, 생각, 경험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심리적 고통을 타개하고 정화하는데도 효과가 있다. 이는 자기반성, 치유, 그리고 새로운 관점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숨겨진 감정을 발견하고, 자신과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며, 상실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성찰과 깊은 사유이며, 이것이 풍부할수록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으로서의 수필이 된다.

 예술은 공감을 통한 타자와의 소통이다. 이 교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이며 위로다.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에피소드가(개별성)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의(타자)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도 될 때(보편성)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개별성과 보편성이 함께 할 때만이 감동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이 공감을 위해선 글이 감성적ㆍ주관적ㆍ개인적ㆍ정서적 특성을 지니는 신변잡기가 돼서는 안 되며, 이성적. 객관적. 사회적. 논리적인 특성도 함께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반드시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가 함께 있어야 한다. 개별적인 이야기가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때만이 예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으로서의 수필이 되려면, 자신이 체험한 사건이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객관화해, 재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해석이란 철학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예리한 관찰과 분석으로 사물이나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인문적 소양이 필요하다.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통찰(洞察)을 요구하는 고도의 지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신변잡기란 다소 모욕적인 평을 받는 글은, 대개 자신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을 약간의 감정과 감상을 투사해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을 대상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사색(思索)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다. 그러나 문학이 되려면 단순한 재현을 넘어 그것을 제삼자 입장에서 보고, 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해야 한다.

 

 거칠게 표현해 소설이 상상의 산물이라면 문학수필은 사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평범한 일상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 문학적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고로 사유가 없는 수필은 신변잡기일 뿐 문학이 될 수 없다. 사유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고 깊다면, 생각은 단순하고 표피적이고 낮다. 생각이 사유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수필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는 마음 가는 데로, 붓 가는 데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쓰면 필경, 아무리 잘 써도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으며, 후하게 쳐준다 해도 소박한 생활 문예정도로 밖에 봐줄 수 없다.

 글을 읽고 문학성이 풍부하다, 혹은 문학성이 빈곤하다는 평의 요체는 예술성을 말한다. 수필이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이 되려면 핵심은 예술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예술은 대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담보되어야 한다. 새로운 해석이 되려면 당연히 대상에 대한 깊은 탐색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삶과 인간에 대한 실존적 고뇌가 녹아들게 된다. 예술의 생명은 답습이 아니라 새로움이다.

 수필은 먹물(지식인)들의 지적 활동 후 남는 잔여물이 아니다. 결코, 설렁설렁 써도 되는 글이 아니란 뜻이다. () 못지않은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 위해서도 언급했지만, 사소한 일상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 문학적으로 완성하는 수필은,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실존적 고뇌가 필수 불가결하다. 수필이 산문이라 겉은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속은 같은 긴장감과 탄성이 있어야 한다.

 수필 문학의 한계는 치열함이 부족하기에 신변잡기를 써놓고 문학작품이라 착각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둘째, 수필 문학의 문제 해결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해 보겠다.

 신변잡기는 상황(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씀)을 재현한 것이고, 문학으로서의 수필은 그것에 해석을 입히는 일이다. 신변잡기와 문학수필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건드리면 실례가 될 우려가 있으니 한참 부족하지만, 필자의 졸작을 가져오겠다. “요세미티의 아침이란 제목의 원고지 20매 분량의 작품이다.

 

 

 

 이박삼일 휴식을 위해, 암벽 등반가들의 성지라는 요세미티를 찾아갔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미국 캘리포니아 중부에 있는 산악지대다. 수천 년 된 나무가 우거진 넓은 세쿼이아 숲, 거대한 암벽 하프 돔, 폭포,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화강암 절벽 엘 캐피탄이 유명하다.

 

 요세미티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활엽수가 드문드문 나 있는 구릉지대를 지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는 촘촘히 들어서고, 더 올라가면 여기저기 침엽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숲이 깊어질수록 침엽수는 밀도가 높아지고 나중엔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침엽수림을 만나게 된다.

 산 초입엔 활엽수들이 띄엄띄엄 헐렁하게 서 있다가, 정상에 다다를수록 곧게 뻗은 침엽수들이 빈틈이 없을 정도로 들어찬 숲의 모습은, 원숙한 인간의 영혼과 닮았다.

 인간은 영혼이 고양될수록 깊은 숲속의 침엽수림처럼 꽉 차고 비어있지 않으며, 올곧고 그 바늘잎처럼 자기 경계에 날카롭다. 그래서 유혹에 쉬 흔들리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기에 늘 조용하다.

 공자님은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인자한 사람은 고요하다.”고 하셨다. 강물이나 파도는 끝없이 흐르고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미동도 안 하고 서 있다. 그러나 동적인 것만 힘이 있는 게 아니고 정적이어도 힘이 있다. 바로 산의 정기다. 이 신비한 힘은 침묵의 힘 아닐까?

 인자한 사람이 고요할 수 있는 것은 어진 품성으로 산처럼 많은 것을 품어 안을 수 있기에 잠잠한 것이다. 육체적 힘보다 정신적 힘을 갈구하는 사람이라면 바다나 강보다 산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늘에 닿을 듯 뻗어있는 아름드리 침엽수는 지상에선 천상에 가장 가까이 다다른 영매체리라. 별이 되진 못했지만, 지척인 별과 밤마다 수많은 대화를 나눠 실제로 영성이 높은 거목이 되었는지 모른다. 정신적 구도자들도 대개는 산을 찾는다. 산속에서 옛날 말로 도를 닦는다고 하고 현대적 표현으론 명상을 한다. 고적한 숲과 심오한 영성(靈性)은 어색함이 없고 잘 어울리리라. 진리나 종교적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은 작게는 자기 성찰을 의미한다. 철저하게 자신에서부터 출발해야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우치는 게 아닐까.

 

 바닥으로부터 높이 1,100m로 솟아 있는 화강암 절벽 엘 캐피탄(El Capitan) 위용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현실감이 없다. 어찌나 까마득한지 하늘에 떠 있는 듯하다. 어이 암벽 등반가들만의 로망일 수 있겠는가...

 

 아침햇살과 아침안개가 뒤섞인 요세미티란 공간과 시간은 신비로웠다. 빛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를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햇빛과 안개, 두 파동이 뒤엉켜 서로의 기세를 격하게 겨누면서 금가루. 은가루 입자 되어 계곡을 부유했다. 햇빛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그 색의 질감은 고흐의 그림처럼 깊고 오묘했다.

 다른 한편으론, 밤새도록 지상에서 피워올린 안개라는 욕망을 지우기 위해 천상에서 내려온 햇빛이, 이리저리 허둥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육안으론 분별할 수 없던 금가루. 은가루 입자들이 알알이 반짝이는 유리구슬 되어, 골짜기를 수놓고 있었다. 세상사 몽롱한 꿈과 물리학이 만나는 순간을 나는 목도했던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환상을 받아들이기엔 의식이 너무도 뚜렷한 아침이라 어쩔 줄 몰랐다.

 

 청량한 날씨, 햇발은 따스했으나 바람결은 차가웠다, 한가로이 떠 있는 새털구름, 새 소리, 시냇물 소리, 숲속의 향기로운 바람... 침엽수림에서 나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더럽혀진 영혼을 살균해 주는 것 같았다.

 

 하프 돔(Half Dome)을 보자마자 청마 유치환의 바위가 떠올랐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바위 전문)

 

 젊은 날 내 심혼을 일깨웠던 시다. 흔들리고 흔들리던 나날들. 흔들리고 싶지 않아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소원하던 날들이었다.

 요세미티를 걸으며 누구보다도 청마가 왔다 가야 했을 산이라 생각했다. 난 속으로 엘 캐피탄, 하프 돔이 있는 요세미티는 청마의 산이라 명명했다. 한 가지 더하자면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이 부르는 그리고 별이 되다를 듣기에 가장 어울리는 곳이다.

 

 ‘고양된 영혼이란 실체는 저 하얀 바위가 아닐까. 흔들리지 않고, 굴하지 않고, 그리하여 무엇과도 맞서고......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올곧게 뻗은 침엽수는 무생물과 생물의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고양된 영혼의 심상(心像)으로 서로 소통하는 사이인지 모른다. 아니 오랜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원형 돔을 절반으로 잘라 놓은 모양의 거대한 바윗덩어리인 하프 돔(Half Dome)은 신비로운 형상으로 인해 요세미티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아웃도어 브랜드로 유명한 노스페이스 상표가 이 하프 돔이란다. 높이 해발 2700m인 산처럼 장대한 돌덩어리를 반으로 동강 내버린 것은 빙하다.

 빙하의 차가움은 얼마나 서슬 퍼렇기에 웅대한 바윗덩어리마저 양파 자르듯 싹둑 잘라내는 것이었을까? 물방울 한 방울이 천만년 안으로 안으로 쌓았던 차가움은 칼보다 예리하고 불보다 뜨거웠단 말인가! 순식간에 잘려 나간 바위는 울기나 했을까? 거암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차가움! , 불면 사라지는 차가움도 경지에 이르면 바위를 단방에 가른다.

 천지 만물은 강한 것도 약한 것도 없어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한다, 모두 다 별이 만든 입자로부터 왔기 때문에, 원자(原子) 단위로 내려가면 돌 같은 무기체와 사람 같은 유기체의 경계가 사실상 없어진단다.

 현대물리학은 돌, 나무, , 짐승, 사람, 등 지구의 모든 물질은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지 결과로써의 결정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강조하면 우주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없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자연이든 이웃이든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양자역학이 일깨워 주는 것이라면, 종교와 과학도 화해할 수 있는 건가?

 

 하프 돔은 갑자기 잃어버린 반쪽 때문에 얼마나 황망했을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반쪽을 찾아 얼마나 헤매었을까. ,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렸을까. 아마도 하프 돔(Half Dome)은 땅 위에 서 있는 가장 커다란 기다림의 상징물이리라. “깃발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듯 기다림의 표상으로서 말이다.

 온전한 돔(Dome)을 상상한다. 얼마나 장엄하고 우아했을까. 떨어져 나간 반쪽은 산산이 부서져 빗물에 쓸리고 쓸려서 어느 먼 바닷가 모래로 쌓이고 있으리라. 언젠가 다시 만날 가뭇없는 꿈을 꾸며...

 그리운 나의 나라, 조국(祖國)은 반쪽으로 쪼개져 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아니니, 반듯이 하나가 되리라. 그것은 꼭 이루어져야 할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임으로.()

 

 

 

 이상 요세미티의 아침전문이다. 단순한 상황 재현과, 의미 부여 또는 새로운 해석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살펴보겠다.

 

 ‘요세미티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활엽수가 드문드문 나 있는 구릉지대를 지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는 촘촘히 들어서고, 더 올라가면 여기저기 침엽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숲이 깊어질수록 침엽수는 밀도가 높아지고 나중엔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침엽수림을 만나게 된다.(단순한 상황 재현)

 산 초입엔 활엽수들이 띄엄띄엄 헐렁하게 서 있다가, 정상에 다다를수록 곧게 뻗은 침엽수들이 빈틈이 없을 정도로 들어찬 숲의 모습은, 원숙한 인간의 영혼과 닮았다. 인간은 영혼이 고양될수록 깊은 숲속의 침엽수림처럼 꽉 차고 비어있지 않으며, 올곧고 그 바늘잎처럼 자기 경계에 날카롭다. 그래서 유혹에 쉬 흔들리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기에 늘 조용하다.

 하늘에 닿을 듯 뻗어있는 아름드리 침엽수는 지상에선 천상에 가장 가까이 다다른 영매체리라. 별이 되진 못했지만, 지척인 별과 밤마다 수많은 대화를 나눠 실제로 영성이 높은 거목이 되었는지 모른다.’(새로운 해석, 또는 의미 부여)

 

 ‘아침햇빛과 아침안개가 뒤섞인 요세미티란 공간과 시간은 신비로웠다.(단순한 상황 재현)

 빛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를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햇빛과 안개, 두 파동이 뒤엉켜 서로의 기세를 격하게 겨누면서 금가루. 은가루 입자 되어 계곡을 부유했다. 햇빛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그 색의 질감은 고흐의 그림처럼 깊고 오묘했다.

 다른 한편으론, 밤새도록 지상에서 피워올린 안개라는 욕망을 지우기 위해 천상에서 내려온 햇빛이, 이리저리 허둥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육안으론 분별할 수 없던 금가루. 은가루 입자들이 알알이 반짝이는 유리구슬 되어, 골짜기를 수놓고 있었다. 세사의 몽롱한 꿈과 물리학이 만나는 순간을 나는 목도했던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환상을 받아들이기엔 의식이 너무도 뚜렷한 아침이라 어쩔 줄 몰랐다.’(새로운 해석, 또는 의미 부여)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올곧게 뻗은 침엽수는 무생물과 생물의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고양된 영혼의 심상(心像)으로 서로 소통하는 사이인지 모른다. 아니 오랜 친구였는지도 모른다.’(새로운 해석, 또는 의미 부여)

 

 ‘하프 돔은 갑자기 잃어버린 반쪽 때문에 얼마나 황망했을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반쪽을 찾아 얼마나 헤매었을까. ,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렸을까. 아마도 하프 돔(Half Dome)은 땅 위에 서 있는 가장 커다란 기다림의 상징물이리라. “깃발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듯 기다림의 표상으로서 말이다.

 온전한 돔(Dome)을 상상한다. 얼마나 장엄하고 우아했을까. 떨어져 나간 반쪽은 산산이 부서져 빗물에 쓸리고 쓸려서 어느 먼 바닷가 모래로 쌓이고 있으리라. 언젠가 다시 만날 가뭇없는 꿈을 꾸며...

 그리운 나의 나라, 조국(祖國)은 반쪽으로 쪼개져 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아니니, 반듯이 하나가 되리라. 그것은 꼭 이루어져야 할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임으로.‘(새로운 해석, 또는 의미 부여)

 

 이상 요세미티의 아침을 살펴보았다. 상황을 재현하고 반드시 새로운 해석과 의미 부여가 있어야,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으로서의 수필이 된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다. 역시 필자의 졸작이다.

 “크로키란 제목의, 원고지 12매 분량의 아담한 글이다.

 

 

 

 LA 근교 아침, 아들을 배웅하는데 위층에서도 한 여학생이 빨간색 자전거를 끌고 내려왔다. 같은 층 옆집은 서로 인사하고 지내지만, 위층 집들과는 전혀 인사가 없으니,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한다. 일찍 나가는 걸 보면 부지런한 대학생 같아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직장인인지 대학생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앞모습은 볼 수 없었고 뒷모습만 잠깐 보았기 때문이다.

 아. 그 모습,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모습에 나는 마음이 막막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한참 동안 보았다.

 머리는 뒤로 묶은 채 긴 다리의 윤곽이 드러나는 청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은 너무도 심플해서 꾸민 흔적이 없어 보였다. 단정하나 화려할 것 없는 그저 스포티한 차림이었지만 가슴을 먹먹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젊음의 에너지랄까, 젊음에서 발산하는 어떤 기운이랄까, 그림으로 치면 맑디맑은 담채화(淡彩畵), 향기로 치면 라일락, 자태로 치면 피어나기 바로 직전의 목련꽃 봉오리... 도대체 뭐라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입은 빛바랜 청바지는 시간이 주던 쇠락과 무정함 대신 새로움과 가능성만으로 탄력이 넘쳤다. 또 그녀가 탄 새빨간 자전거는 문명이 주던 가식과 복잡성 대신 정직성과 단순성으로 어디든 달려갈 태세였다.

 자연스러움과 순수함 속에 깃들어 있는 어떤 것과도 비견될 수 없는 눈부신 아름다움. 젊고 풋풋한 모습에 싱그러운 생명력이 아침햇살만큼이나 찬란했다. 감히 어떤 사특함도 끼어들 수 없는 순결함, 그 자체가 줄 수 있는 감동과 감격. 섹시함 같은 성적 매력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그러나 뭐라 말할 수 없는 순정한 아름다움, 그 자체가 가슴을 아득하게 한 것 같다. 분위기는 좀 다르지만, 송수권의 시 여승에서 보았던 아름다움 같았다. 마지막 구절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는 마음 같았다면 이해가 될까, 싶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일 수 있다는 걸, 오십 중반 늦은 나이라도 보게 돼서 감사하다.

 

 꽉 막힌 고속도로.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출근 시간 LA로 진입하는 고속도로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그 틈바구니 속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 중인 아가씨를 보다. 오십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라 놀랍고 신기했다. 검정색상의 가와사키 닌자 ZX-14를 타고 검정색 바지와 재킷을 입고 자그마한 백팩을 메고, 검정색 장갑, 구두, 플페이스 헬멧을 착용했기에 얼굴은 전혀 볼 수 없었다. 흡사 닌자 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주인공 같았다. 그러나 날씬한 몸매와 한데 묶은 듯 등 뒤로 가지런히 흘러내린 찰랑대는 생머리는 그가 여자임이 분명했다. 온통 검정색에 어디 한군데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신비롭기까지 했으며 그가 아가씨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백인 아가씨 일까, 동양 아가씨 일까. 히스패닉 아가씨 일까. 이미지는 환상이지만 때론 실체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때 그 닌자는 쏜살같이 차 사이를 빠져나가 버렸다.

 아쉬웠다.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만 진하게 남았다. 남자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오토바이를 건장하지도 않은 여자가 다룬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아무리 자유분방한 미국이라도 여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는 것은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운동은커녕 축구장조차 들어갈 수 없고 운전조차 할 수 없는 중동 국가들이나, 유교적 관습이 지배적인 동양 아가씨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나마 미국이니까 볼 수 있는 풍경일 뿐이다.

 스치듯 지나친 닌자 아가씨는 모르긴 몰라도 호기심이 강하고 적극적이며 세속적 가치를 추종하지 않는 자의식이 강한 여성일 것 같다. 사회적 질서나 통념에 맹목적으로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낭만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책임질 일 앞에 여성성을 내세워 모면하거나 회피하려 들지 않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맞서는 독립적이고 도전적인 아가씨일 것이다. 선택되어지기보다는 자신이 선택하고, 따라가기보다는 자기 길을 스스로 가는 자존심 강한 여성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고 싶은 여자인지도 모른다.

 

 움직이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태를 빠르게 그린 그림 크로키(Croquis)가 글로도 가능할까를 오늘, 처음 생각하다. 능력 밖이지만 하이쿠(17자로 된 일본 단시) 같은 형식으로 아침에 보았던 느낌을 속사화처럼 쓰고 싶었다.()

 

 

 

 이상 크로키전문이다. 총 삼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 문단은 실은 텍사스 오스틴에서 쓴 글인데 너무 짧아 미완성으로 두고 있었다. 이어 삼 년 후 캘리포니아 LA로 이사 와 쓴 글이 이 문단이다. 역시 너무 짧아 한 편의 수필이 될 수 없었다. 그 후로 또, 이 년이 지났다. 늘 미완성인 두 편의 글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이 두 편의 에피소드를 한 편의 글로 합쳐서 완성해도 되겠다는 아디어가 떠올랐다. 두 장면이 객관화되니, 크로키란 미술 양식과 하이쿠란 시 형식을 결합해 새롭게 재편성할 수 있었다. 각기 다른 두 장면이 찰라라는 하나의 순간성으로 통합된 것이다. 여기서 예술이 요구하는 일말의 창의성(새로움)이란 게 생겼기 때문이다. 삼 문단이 있어 비로소 이 글은 문학적인 수필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일 문단, 이 문단 두 장면을 객관화시켜 재구성하는데 오 년이 지나서야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소설은 정황(에피소드라 해도 좋다)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있듯 수필은 정황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있어야 한다. 이 해석은 단순한 주석 달기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 부여다. 새로운 의미 부여로 말미암아 창작으로서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소설과 수필의 차이다. 에피소드(정황)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창조적 행위며, 앞에서 말한 사소한 일상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 예술적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LA 근교 아침, 아들을 배웅하는데 위층에서도 한 여학생이 빨간색 자전거를 끌고 내려왔다. 같은 층 옆집은 서로 인사하고 지내지만, 위층 집들과는 전혀 인사가 없으니,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한다. 일찍 나가는 걸 보면 부지런한 대학생 같아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직장인인지 대학생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앞모습은 볼 수 없었고 뒷모습만 잠깐 보았기 때문이다.

 머리는 뒤로 묶은 채 긴 다리의 윤곽이 드러나는 청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은 너무도 심플해서 꾸민 흔적이 없어 보였다. 단정하나 화려할 것 없는 그저 스포티한 차림이었지만 가슴을 먹먹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젊음의 에너지랄까, 젊음에서 발산하는 어떤 기운이랄까, 그림으로 치면 맑디맑은 담채화(淡彩畵), 향기로 치면 라일락, 자태로 치면 피어나기 바로 직전의 목련꽃 봉오리.(단순한 상황 재현)

 그녀가 입은 빛바랜 청바지는 시간이 주던 쇠락과 무정함 대신 새로움과 가능성만으로 탄력이 넘쳤다. 또 그녀가 탄 새빨간 자전거는 문명이 주던 가식과 복잡성 대신 정직성과 단순성으로 어디든 달려갈 태세였다.(새로운 해석 또는 의미 부여)

 

 청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간 여학생을 설명하고 해석한다.

 또,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며 설명하고 해석한다.

 

 ‘꽉 막힌 고속도로.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출근 시간 LA로 진입하는 고속도로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그 틈바구니 속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 중인 아가씨를 보다. 오십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라 놀랍고 신기했다. 검정색상의 가와사키 닌자 ZX-14를 타고 검정색 바지와 재킷을 입고 자그마한 백팩을 메고, 검정색 장갑, 구두, 플페이스 헬멧을 착용했기에 얼굴은 전혀 볼 수 없었다. 흡사 닌자 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주인공 같았다. 그러나 날씬한 몸매와 한데 묶은 듯 등 뒤로 가지런히 흘러내린 찰랑대는 생머리는 그가 여자임이 분명했다. 온통 검정색에 어디 한군데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신비롭기까지 했으며 그가 아가씨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백인 아가씨 일까, 동양 아가씨 일까. 히스패닉 아가씨 일까. 이미지는 환상이지만 때론 실체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때 그 닌자는 쏜살같이 차 사이를 빠져나가 버렸다.

 아쉬웠다.'(단순한 상황 재현)

 

 ’스치듯 지나친 닌자 아가씨는 모르긴 몰라도 호기심이 강하고 적극적이며 세속적 가치를 추종하지 않는 자의식이 강한 여성일 것 같다. 사회적 질서나 통념에 맹목적으로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낭만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책임질 일 앞에 여성성을 내세워 모면하거나 회피하려 들지 않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맞서는 독립적이고 도전적인 아가씨일 것이다. 선택되어지기보다는 자신이 선택하고, 따라가기보다는 자기 길을 스스로 가는 자존심 강한 여성일 것이다.‘(새로운 해석 또는 의미 부여)

 이 해석(사소한 일상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는 행위)이 있으므로 수필의 문학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수필에서 작가가 체험한 사실을 그대로 써야만 한다면 이 작품은 거기에 어긋난다. 한날한시 한 공간에서 경험하지 않은 일을, 한 날 한 공간에서 경험한 것으로 작품화했기 때문이다. 엄밀한 사실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허구적 진실>이란 문학 용어가 있다. 소설 이론에 나오는 얘기다. 소설이 거짓말인지 알지만, 거기엔 허구적 진실이 들어 있으므로 읽는 것이다. 수필의 에피소드도 상상력(fiction)으로 쓰되 허구적 진실만 있으면 되지 않는가. 수필도 문학 장르 중 하나고 예술작품인데 왜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 안 되는가. 수필이, 문학이, 예술이, 신문도 아닌데,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사실을 중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

 허구가 진실을 향할 때는 예술이 되고, 허구가 이익을 향할 때는 사기가 된다. 작가가 표절로 사기 치는 때도 있으나, 이 경우를 제외하면 작가가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원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소설가가 거짓말쟁이가 아닌 것처럼 문학적 허구(거짓말)와 실존적 자아의 정직성과는 별개다. 고로 수필이 발전하려면 사실성에 얽매이지 말고, 에피소드에 허구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 자기 자랑, 자기 과시는 절대 금물이다.

 

 셋째, 수필 문학의 확장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보겠다.

 다음은 에피소드에 허구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작품을 소개하겠다. 제목이 발디 산의 돌이란 필자의 작품이다. 직접경험은 전혀 없고 상상력으로만 에피소드를 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해, 한 편의 수필을 만들었다. 자료조사는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서 했다.

 

 

 

 LA 인근에 발디라는 산이 있다. LA에 거주하는 한국 산악인들에게 발디는 북한산으로 불린다고 한다. 발디 높이가 3,068m이니, 835m에 불과한 북한산과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거의 서울 전역에서 북한산을 볼 수 있듯, 발디봉 역시 LA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늦은 겨울이라 해도 되고, 이른 봄이라 해도 무방한 토요일 날. 발디 산을 왕복 세 시간 정도만 등산할 요량이었다. 햇빛은 찬란하고 따스했으나, 바람은 투명하고 꽤 차가웠다.

 

 산행을 하다가 돌을 잘못 밟아 미끄러졌다. 다행히 크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식겁했다. 친구에게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하니 그러자 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이 아니니 그 자리에 널브러져 앉은들 민폐가 될 일은 없었다. 배낭에서 가지고 온 오이를 꺼내 친구와 나누어 먹으며, 무심코 내가 밟았던 돌을 보았다. 아뿔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오 학년 무렵 우리 집 바깥마당 한 귀퉁이엔 축대를 쌓고 남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초여름쯤이었다. 윗집 형과 돌을 갖고 놀았는데 그 모양이 자루만 붙어 있으면 장작을 쪼개도 될 것 같은 영락없는 도끼 같았다. 날카롭게 날 선 것이 위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양이 신묘한 탓에 악동들은 이걸 갖고 놀았고 그만, 내 팔이 열 바늘이나 꿰매는 큰 부상을 당했다.

 

 옆 동네에 진짜 의사는 아니었으나 김 의사라는 분이 사셨다. 병원도 없는 시골 마을에 의사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이분은 농고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과수 농사를 짓다 군대 가서 의무병이 되고 월남 파병이 되었단다. 의사가 절대 부족한 전쟁터에서 군의관이 시키는 대로 부상병들을 직접 수술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이 했는지 나중엔 수술 속도가 진짜 의사인 군의관과 비슷했다 한다.

 

 하여튼 돌쇠 같은 이분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겐 없어선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농사 일 하다가 다치거나 감기. 몸살 등 어지간하면 다 이분에게로 갔다. 지금으로 치면 불법 의료행위지만 공공의료시설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던 70년대, 의료공백을 훌륭하게 메꾸어 주었던 분이 아닌가 싶다. 더더욱 이분은 치료해 주고도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마움에 보리. . 고구마 등등을 갖다 주거나, 또는 김 의사 과수 농사일을 직접 거들어 주는 등, 자기 형편대로 감사 표시를 했다 한다.

 

 아버지와 김 의사분이 내 두 다리와 팔을 끈으로 꼭꼭 묶고 입에는 손수건을 물리고는 생으로 열 바늘을 꿰매었다. 얼마나 아팠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마취 안 하고 수술하면 빨리 낳고 흉터가 조금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추측하건대 마취제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실제로 내 팔에는 흉터가 조금 남아있다. 그 돌 모양과 지금 내 발밑에 있는 돌 모양이 너무나 똑같았다. 50여 년 만에 보게 되는 돌이지만 그 형태며 질감이며 색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암갈색이라 해도 좋고 적갈색이라 해도 상관없다. 예나 지금이나 장작을 패도 될 만큼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는 것도 변함이 없다. 어쩌다 이 돌이 여기 아니, 미국까지 왔나 싶어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 사고로 나는 부모님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너무도 미웠고 원망스러웠던 돌이었는데, 오래간만에 뜻밖의 곳에서 만나니 희한하게 반가웠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흉터가 남을 미움이나 원망도 세월이 지나니 용서가 된단 말인가. 세월이 약이란 말은, 죽을 것 같이 힘든 일도 반드시 아무니까, 사실은 별 게 아니란 말인가.

 

 내가 그 돌을 주워 가방에 넣으려 하니 친구가 깜짝 놀라며, 왜 그 위험하게 생긴 돌을 가방에 넣어 가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우리 집 화단에 잘 모셔 놓으려 한다네.” 그리고 혹시, 밉고 용서 못 할 사람이 생기면 이 돌을 보며 지나고 나면 별 게 아니야, 그러니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대범 하라고, 너그러워지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오라, 사연 있는 돌이니 반면교사로 삼으시겠다. 좋은 생각이군.”이라며 친구가 맞장구쳐 주었다.

 

 아무리 발길에 차이는 게 돌이라지만 때론 값지고 의미 있는 돌도 있었다.

 우선 원시인들에겐 요긴한 생활 도구였고, 내 어릴 적, 마을을 드나들 때마다 애건 어른이건 이웃의 안녕을 빌며 서낭당 당산나무 옆에 던지던 소원의 돌은 흔할지라도 고귀했다.

 임진왜란 중 행주대첩 때 권율 장군을 도왔던 아낙들 행주치마 속에 있었던 구국의 돌은 숭고했다.

 80년대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며 던지던 대학생들의 돌과, 강자 골리앗과 맞짱 뜨던 약자 다윗의 돌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을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저 여인을 돌로 쳐라" 일갈했던, 통렬한 자기 성찰을 촉구하던 예수의 돌은 고결했다.

 이 모든 돌 들은 지금도 어느 광장 땅속이든, 냇가든, 들판이든, 산기슭이든,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의 시가 떠오른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의미 있는 돌이 되었던 적 있었던가? 부끄럽게도 나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살피며 살아왔다. 돌이켜 보면 김 의사 같은 분이 뜨거운 사람이거나 의미 있는 돌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발디 산의 돌은 직접경험을 비틀고 간접경험을 덧붙여 엮은 에피소드에, 의미 부여를 한 글이다. , 에피소드를 완전 소설 쓰듯 쓴 수필이다. 고백하자면 발디 산 근처도 가본 적이 없고, LA 와서는 등산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필자의 작품 중 삼분의 일이 이러한 방법으로 쓴 글이다. 다만 에피소드가 허구지만 진실을 향하기 때문에 문학,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은 사실을 중시하는 전기 문학(傳記文學)이 아니다. 또한 사실에 입각해 진솔하게 써야 하는 일기(반성문)가 아니다. 창작으로서의 문학이고 따라서 팩트(fact)보다 상상력이 중요시되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수필이 문학으로서 발전하는 데 결정적 걸림돌이 되었다고 사료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수필이 발전하려면 상상력, 허구(fiction)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이란, 표준국어대사전의 수필에 대한 정의를 필자는 이렇게 바꾼다.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쓰지 않고, 거기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 예술적으로 쓴 산문 형식의 글이라고.

 신변잡기를 쓸 것인지, 문학적인 수필을 쓸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고 몫이다. 기왕 쓸 글이라면 치열하게 매달려 문학적 수필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