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족, 고트족, 성 키릴루스, 네스토리우스, 유스티니아누스

5. 5세기와 6세기

 

5세기는 야만족이 침입하고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시기였다. 430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다음, 철학은 거의 없었다. 잉글랜드인이 브리타니아를 침략해 5세기에 잉글랜드를 세웠다. 프랑크족이 침입하자 갈리아인이 프랑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반달족이 스페인에 침입하여 안달루시아 지역에 이름을 남긴 것도 5세기였다. 성 패트릭은 5세기 중엽에 아일랜드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5세기 로마 제국에 침입한 게르만족들 가운데 고트족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고트족은 로마의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고트족의 왕 알라리크는 410년에 로마의 약탈을 이끌었으나 같은 해에 죽었다. 동고트족의 왕 오도아케르가 476년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493년까지 군림하다가 다른 동고트족의 배반으로 살해당했는데 오도아케르를 살해한 자는 이탈리아의 왕 테오도리쿠스였다.

이러한 혼란기에 교회는 육화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으로 소란스러웠다. 논쟁의 주역은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라는 두 성직자였다. 키릴루스는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이단 선고를 받았다. 키릴루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으며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다. 논쟁의 쟁점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였다. 성 키릴루스는 광신적인 열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는 여성 학자 히파티아에게 사적 형벌을 가해서 죽였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인격과 신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6세기 문화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 네 사람은 보이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 베네딕투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었다. 보이티우스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중세 내내 감명을 주는 저자로 칭송받았으며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로 여겨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양 다루었다. 그가 524년에 집필한 『철학의 위안』은 순수하게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했다. 보이티우스는 개인적 의견을 산문으로 말하고 철학은 운문으로 응답한다. 스토아학파와 일치하는 도덕이 많이 등장하며 세네카로부터 받아들인 견해가 대부분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황제로 즉위한 지 2년 만에 이교 사상이 성행하던 아테네의 철학 학원을 모두 폐쇄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성 소피아 성당 건축에 착수했다. 그는 서로마 제국을 다시 정복하려는 열망으로 불탔다. 535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처음에 고트족과 맞서 신속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가톨릭교도는 그를 환영했으며 그는 로마를 대표하여 야만족과 맞섰다. 그러나 고트족이 다시 결속해 18년간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은 야만족의 침입을 받던 시대보다 참혹한 고통으로 신음했다.

로마는 다섯 번, 바로 비잔틴에 세 번, 고트족에게 두 번 점령당하면서 보잘것없는 도시로 전락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3년이 흐른 568년 이탈리아는 새로 등장한 흉포한 게르만족, 바로 롬바르드족의 침략을 받았다. 롬바르드족과 비잔틴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200년 동안 거의 사를마뉴 대제 시대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비잔틴인은 이탈리아를 지키는 일에 점차 소홀해졌다. 그들은 남쪽으로 사라센인과도 대적해야 했다. 로마는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비잔틴인이 지배했으며 교황들은 동로마 황제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황제들은 롬바르드족의 침입 이후 권위를 거의 상실하거나 심지어 아무 권위도 없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 문명도 종말을 맞이했다. 전설과 반대로 베네치아를 건설한 사람들은 아틸라를 피해 도망 나온 피난민이 아니라 롬바르드족을 피해 이주한 이탈리아 망명자였다.

 

성 베네딕투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은수자, 수도원

6. 성 베네딕투스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6세기 이후 수 세기에 걸친 끝없는 전쟁 가운데에서 교회는 로마 문화를 불완전하게 보존했다. 이 시기에 관심 가져야 할 세 가지 활동이 있다. 첫째는 수도원 운동이다. 둘째는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재위 시절에 두드러진 영향이다. 셋째는 선교를 통한 이교도 야만족의 개종이다.

수도원 운동은 4세기 초에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이는 두 가지 형태로 고독한 은수자 생활과 수도원 생활이다. 성 안토니우스는 최초의 은수자로 15년 동안 집 근처 오두막에서 홀로 살았다. 또한, 20년 동안 사막에서 지냈다. 안토니우스가 생애 말년에 보낸 테바이드는 그의 모범과 교훈에 영감을 받은 은수자들로 붐볐다.

몇 년 후 이집트 사람인 파코미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건립했다. 거의 동시에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도 수도원이 출현했다. 수도원 제도는 주로 성 바실리우스의 덕택으로 동양에서 그리스어를 쓰는 나라로 전해졌다. 수도원 생활은 처음에 교회 조직과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수도원 운동을 촉진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에 수도원 생활을 도입했다.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는 갈리아 지역에 여러 수도원을 열었고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수도원을 발족시켰다. 이오나 수도원은 566년에 성 콜룸바가 세웠다. 수도자들은 교회 조직에 맞춰 거듭나기 이전 초창기 무렵에 혼란을 초래한 근원이었다.

서로마 지역 수도원 생활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성 베네딕투스로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창시자다. 그는 480년경에 스폴레토 근처의 움브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20세가 되던 해에 로마의 사치와 쾌락을 피할만한 동굴을 찾아 그곳에서 3년 살았다. 이후 고립된 은수자 생활을 접고 유명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설립한 데 이어 ‘베네딕투스 규칙서’를 제정했다. 베네딕투스 수도회 수도자들은 나중에 학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초창기 그들의 독서는 모두 기도와 관련이 있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일원인 그레고리우스 대 교황이 교황으로 즉위하기 직전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성 베네딕투스는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왔다고 한다. 그러나 학문 탓에 방종하고 음란한 생활에 빠져든 사람을 여럿 보고 발길을 돌렸다. 성 베네딕투스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획득했다. 그는 파손된 체를 기도의 힘으로 고치기도 하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다.

그레고리우스의 대화편은 베네딕투스의 생애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6세기 말엽에 생존한 대다수 교양인의 정신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대화편은 서로마 교회의 네 번째 박사이자 최우의 박사이며 정치 측면에서 교황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 직접 쓴 작품이다.

그레고리우스는 6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최초로 대교황이라 불린 그레고리우스는 540년경에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나이에 대 저택과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 573년에 로마시의 장관이 되었다. 그는 579년부터 585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 살면서 황제의 궁정 안에서 교황의 이익을 대변하고 서로마 성직자들보다 언제나 이단으로 쉽게 기울던 동로마 성직자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교황의 신학을 대변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우리의 부활한 육체가 무형의 존재가 될 것이라는 잘못된 의견을 주장했으나 그레고리우스는 황제가 참신앙에서 벗어나 이단에 빠져들지 않도록 구제해 주었다.

585년부터 590년까지 5년 동안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서 원장으로 일했다. 이후 교황이 죽자 그레고리우스가 교황의 자리를 계승했다. 그는 주로 편지를 활용해 로마 세계 전역의 주교들과 통치자들에게 권위를 나타냈고 다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가 주교들에게 조언한 내용이 포함되어있는 『사목 규칙서』는 중세 초기 내내 큰 영향을 미쳤다. 『사목 규칙서』는 주교의 의무를 명시한 지침서로 수용되었다. 그레고리우스의 편지는 유별나게 흥미를 끄는데 그의 성격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시대상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노섬브리아를 제외한 잉글랜드의 개종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교황이 되자 앵글족을 개종시키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켄트 지방으로 파견했으며 잉글랜드의 이교도 신전을 파괴하지 말고 우상을 파괴한 다음 신전을 정화하여 교회를 만들라고 명한다.

6세기 사람들은 문명을 발전시켜 제도를 형성했으며 궁극적으로 야만족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레고리우스는 탁월한 현실감을 지닌 최후의 로마인이다. 그레고리우스 이후 여러 시기를 거치는 동안 로마시는 위인을 배출하지 못했다. 로마를 정복한 자들이 베드로 사도좌를 보고 느낀 존경심은 로마 황제들의 왕좌를 보고 느낀 경외심이 거둔 성과였다.

 

교황권, 그레고리우스, 니콜라우스 1세, 샤를마뉴, 피핀

제2부 스콜라 철학

 

7. 암흑기의 교황권

 

교황권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부터 실베스테르 2세에 이르는 4세기 동안 눈부실 만큼 영고성쇠를 거듭했다. 교황은 때로는 그리스 황제에게 복종하고 때로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복종했으며 한때 로마의 지방 귀족에게 복종하기도 했다. 그리스의 교회는 대체로 황제에게 복종했으며 황제는 신앙 문제를 결정한 자격이 본인에게 있으므로 주교를 비롯한 총대주교까지도 임명하고 폐하고자 했다. 수도자들은 황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했고, 그러한 이유로 때로는 교황의 편을 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황제에게 기꺼이 복종한 반면, 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생각이 없었다.

비잔틴인이 롬바르드족과 싸워 패배한 이후, 교황은 억센 야만족에게 정복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교황은 샤를마뉴의 영도 아래 이탈리아와 독일을 정복한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위기를 돌파했다. 동맹의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출현하고 로마 제국은 교황과 황제가 조화롭게 지낼 정치 체제를 갖추었다. 처음에 교황은 카롤링거 왕조의 쇠퇴를 이용해 이득을 얻었으며 9세기 후반 니콜라우스 1세는 지금껏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교황권을 강력한 수준까지 확립했다.

7세기에도 황제의 군사력은 로마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교황은 복종의 길을 선택하거나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658년부터 교황은 대부분 시리아인이거나 그리스인이었다.

741년에 카를 마르텔과 그레고리우스 3세가 죽고 뒤를 이은 후계자 피핀은 교회가 만족스러워할 만한 인물이었다. 교황 스테파누스 3세가 754년에 롬바르드족을 피하려고 알프스를 넘어 피핀을 찾았을 때 체결한 협정은 양측 모두에게 유의했다. 교황은 군사력이 필요했던 반면 피핀은 교황만이 수여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교황이 그리스 황제의 지배를 계속 받았더라면 가톨릭교회의 발전 양상은 아주 다르게 전개되었을 터다. 동로마 교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지도 못했고 교황처럼 다른 성직자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주교는 모두 동등하다고 생각했으며 동로마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상당히 받아들였다. 교황은 서로마의 유일한 총대주교였다.

황제의 특권은 교황의 특권에 대적할 정도로 충분했을지도 모르지만, 서로마의 군주 가운데 누구도 교황에 견줄만한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실권이 없는 경우가 흔했다. 더욱이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는 즉위식을 거행한 경우에만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교황권이 비잔틴 제국의 지배에서 해방된 것은 교회가 세속 군주에 대해 독립을 유지하고 서로마 교회의 통치 체제 속에 교황 군주제를 최종적으로 확립시키는 데 아주 중요했다.

교황권으로 얻은 이익은 서로마 제국이 거둔 이익보다 훨씬 견고했다. 잉글랜드는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명령에 따른 수도원 선교를 통해 개종했으므로 지역 자치에 익숙한 주교가 사는 지방보다 로마의 지배를 훨씬 더 잘 수용했다. 독일의 개종은 대부분 카를 마르텔과 피핀의 측근이자 교황을 충실히 따랐던 잉글랜드의 선교사 성 보니파키우스의 업적이었다.

성 보니파키우스는 데번셔 출신으로 엑서터와 윈체스터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716년에 프리지아로 갔으나 곧 돌아왔고 717년에 로마로 갔다. 그는 그레고리우스 2세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어 교황에게 순종하겠다고 맹세했다. 보니파키우스는 732년에 대주교가 되었고 738년에 세 번째로 로마를 방문했다. 그의 덕분에 독일의 그리스도교는 아일랜드가 아닌 교황령에 속하게 되었다.

샤를마뉴의 죽음과 더불어 카롤링거 왕조가 쇠퇴하고 제국이 분열된 초기 상황은 교황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이전 어느 때보다 교황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10세기 내내 교황 직위는 로마 지방 귀족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있었다. 아직 교황을 선출할 규칙도 없었다. 교황은 때로는 지지를 보내는 대중의 박수로 선출하고 때로는 황제나 왕이 지지하여 선출하거나 10세기에 그랬듯 로마 도시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한 자들이 추대하는 방식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은 915년에 가릴리아노의 사라센족을 쫓아냄으로써 사라센족의 이탈리아 정복을 막아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 정복 이후와 마찬가지로 로마를 통치할 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기에 교황 직위는 약 100년 동안 로마의 귀족이나 투스쿨룸의 백작이 당연히 누리는 특권이 되었다.

 

역사에서 600년부터 1000년에 이른 시기를 ‘암흑기’라 부르는 관행은 서유럽에 집중된 부당한 처사다. 같은 시기에 중국은 시문학이 꽃을 피웠을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당 왕조 시대였다.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찬란한 이슬람교 문명이 번성했다. 서유럽의 어떤 나라도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중국, 일본, 이슬람교 국가를 따라잡지 못했다.

 

요한네스 스코투스, 범신론자, 샤를, 신성한 예정론, 위디오니시오스, 자연 구분론

8. 요한네스 스코투스의 사상

 

요한네스 스코투스는 9세기에 생존한 인물로서 아일랜드인이며 신플라톤학파에 속한다. 그리스어에 조예가 깊었으며 펠라기우스 주의자이자 범신론자였다. 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의 대머리 왕 샤를의 후원 아래서 보냈으며 정통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멀었지만,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그리스어는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도루스 시대부터 잉글랜드에 알려졌으며 그는 그리스인으로 아테네에서 교육을 받았다.

학자들은 자주 유목민처럼 어쩔 수 없는 유랑 생활로 내몰리곤 했다. 그리스 철학을 시작한 초기 철학자들은 대부분 페르시아를 떠나온 망명자였다. 그리스 철학 말기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그들은 페르시아로 되돌아가는 망명자 신세가 되었다. 5세기 무렵에 학자들은 게르만족의 위협을 피해 갈리아 지방을 떠나 서쪽의 섬으로 피난을 갔다. 9세기로 접어들자 그들은 다시 스칸디나비아인을 피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돌아왔다.

요한네스 스코투스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843년경에 프랑스 왕 샤를의 초청을 받아 궁정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예정과 자유의지를 둘러싼 논쟁은 수도자 고트샬크와 저명한 성직자이자 랭스의 대주교인 힝크마르의 대립으로 발생했다. 수도자는 예정론을 주장했고 대주교는 자유의지론을 주장했다. 요한네스는 자신의 논문 「신성한 예정론」에서 대주교의 입장을 지지했으나 사려와 거리가 먼 행보였다. 이 주제는 난해하고 미묘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견해에 반박하는 저술 속에서 자유의지 문제를 다루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 동의하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더욱 위험했다. 요한네스는 자유의지를 지지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검열을 받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요한네스의 다음 작품은 위(僞)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어 저술을 라틴어로 옮긴 번역서였다. 디오니시오스는 신플라톤학파와 그리스도교회 화해를 꾀한 중요한 작품의 저자로 유명했다.

요한네스의 번역서는 860년에 교황 니콜라우스에게 전달되었다. 교황은 책을 펴내기 전에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은 사실에 격분한 나머지 샤를 왕에게 요한네스를 로마로 보내라고 명했으나 명령은 묵살되었다. 교황에게 번역서에 대한 의견을 의뢰받은 도서관 사서이자 뛰어난 그리스어 학자인 아나스타시우스는 먼 야만족의 나라에서 온 사람의 그리스어 실력이 출중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한네스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자연 구분론』 이다. 스콜라 철학 시대라면 ‘개념 실재론’이라고 부를 만한 견해를 제시했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보편자는 특수자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 속에 존재뿐만 아니라 비존재도 포함시켰다. 창조하지만 창조되지 않는 존재는 홀로 본질로 생존하며 만물의 본질이다. 신은 만물의 시작이자 중간이자 종말이다. 인간은 신의 본질을 알지 못하며 천사조차 알지 못한다. 신의 존재는 성부이고 신의 지혜는 성자이며 신의 생명은 성령이다.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사물의 부류에는 제일 원인, 혹은 원형, 혹은 플라톤의 이상이 전부 포함된다. 이러한 제일 원인의 총체가 신의 말씀이다. 창조는 영원한 과정이다. 유일한 만물의 실체는 신이다. 창조는 신과 별개로 일어나지 않는다. 피조물은 신 안에서 살고 신은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피조물 속에 현시한다. 죄의 근원은 자유에 있다. 죄란 인간이 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기 때문에 발생한다. 악의 근거가 신 안에 있지 않은 까닭은 신 안에 악이라는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악은 비존재이고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악에 근거가 없다면 악도 필연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악은 선의 결핍일 뿐이다.

범신론은 피조물의 실체적 현실성을 거부하며 그리스도 교리와 정반대되는 학설이다. 그는 다른 모든 범신론자와 마찬가지로 죄에 관한 난점에 봉착한다. 그는 인간이 원래 죄가 없었으며 죄가 없었을 때 성의 구별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요한네스가 번역한 위디오니시오스의 저술은 중세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자연의 구분에 관한 대작은 영향력이 미미했다. 『자연 구분론』은 끊임없이 이단 사상이라는 비난에 시달리다 1225년 결국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필사본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다행히도 교황의 명령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않아 필사본이 모두 불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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