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 근본 경험주의, 실용주의, 도구주의, 믿으려는 의지

29. 윌리엄 제임스

 

윌리엄 제임스는 ‘근본 경험주의’를 발명했고 ‘실용주의’ 또는 ‘도구주의’를 주창한 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생애 후기에 미국 철학계의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의학을 연구하다 심리학에 관해 고찰하게 되었으며 1890년에 출간된 대작 『심리학 원리』는 가장 높은 수준의 탁월성을 보여주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두 측면에서 철학적 관심을 드러냈는데 하나는 과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였다. 과학적 측면에서 의학 연구는 그의 사상을 유물론적 경향으로 기울게 했지만, 종교적 정서가 그것을 막았다. 그의 종교적 감정은 개신교로 많이 기울었고, 민주적이었으며 인간적 친절에서 우러난 따뜻함이 넘쳤다.

윌리엄 제임스는 따뜻한 마음씨와 밝은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청교도 조상에게서 선한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뿌리 깊은 신념을 물려받음으로써 민주적 감정이 철학자를 위한 진리와 평범한 사람을 위한 진리가 별개라는 생각을 묵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제임스의 근본 경험주의 학설은 1904년에 「‘의식’은 실존하는가?」라는 논문에서 최초로 공표되었다.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기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데 있었다. 그때까지 철학자들은 ‘인식’이라는 일종의 사건이 발생하고 거기서 하나의 존재인 인식하는 주체가 다른 존재인 인식하는 객체를 의식한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믿으려는 의지』는 1896년에, 『실용주의, 오래된 몇몇 사고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름』은 1907년에 출간되었다. 후자의 학설은 전자의 학설을 확장한 것이다. 『믿으려는 의지』에서 제임스는 우리가 실천할 때 적절한 이론의 근거가 없는 곳에서 강제로 결정하는 일이 흔한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조차 결정이기 때문이라는 논증을 펼친다.

『믿으려는 의지』는 과도기에 나온 학설로 자연스럽게 실용주의로 발전했다. 실용주의는 제임스에서 나타나듯 우선 '진리'의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 실용주의를 제창한 다른 두 주역은 실러와 존 듀이 박사다.

제임스에 따르면 실용주의의 원리는 퍼스가 처음 선언했는데 퍼스는 어떤 대상에 대한 사유를 명료하게 표현하려면 대상이 실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결과를 포함하게 될지 고려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제임스는 퍼스의 원리를 이렇게 해명한다. 철학의 기능은 이런저런 세계 설명 공식이 참이라면 너나 나에게 어떤 차이가 생기는지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론은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아니라 도구가 된다.

제임스는 인간적 현상으로서 종교에 관심을 갖지만, 종교에서 묵상하는 대상에 대해 거의 관념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신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면 신을 믿게 놓아둔다. 여기까지는 자비심의 표현이지 철학은 아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참’이라고 주장할 때 철학이 된다.

제임스의 학설은 회의주의라는 도태 위에 믿음의 상부 구조를 세우려는 시도이며 이러한 모든 시도가 그렇듯 오류에 의존한다. 제임스의 경우 오류는 인간을 빼고 모든 사실을 무시하려는 시도에서 솟아난다. 회의주의와 결합한 버클리식의 관념론이 신을 신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하고 마찬가지로 이것이 정당한 것인 양 가장하도록 이끌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근대 철학의 특징인 주관주의적 광기를 보여준 한 형태일 뿐이다

 

존 듀이, 학교와 사회

30. 존 듀이

 

존 듀이는 1859년에 태어났으며 일반적으로 미국을 이끄는 살아있는 철학자로 인정받는다. 그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교육, 미학, 정치이론을 다루는 연구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매한 인격자로 견해는 자유롭고 대인 관계에서 관대하고 친절하며 지치지 않고 연구하는 인물이다.

듀이는 윌리엄 제임스처럼 뉴잉글랜드 사람으로 100년 전 위대한 뉴잉글랜드인의 후손 가운데 몇몇이 포기했던 뉴잉글랜드의 자유주의 전통을 이어받는다. 특히 교육은 듀이가 관심을 둔 분야였고 그가 미국 교육에 끼친 영향도 매우 컸다.

듀이가 1894년 시카고대학의 교수가 되었을 때 맡은 학과 가운데 교육학과가 포함되었다. 그는 진보적인 학교를 세웠으며, 교육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이때 쓴 글을 요약한 『학교와 사회』는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저작으로 꼽힌다. 그는 일생 거의 철학에 관한 글만큼이나 교육에 관한 글도 썼다.

사회와 정치에 관한 문제도 듀이의 사상에서 큰 몫을 차지했다. 철학적 관념에서 보면 듀이의 연구가 지닌 최고 중요한 가치는 전통적 ‘진리’ 개념을 비판한 데 있으며 자신이 ‘도구주의’라 부른 이론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대부분 전문 철학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진리는 정적이고 궁극적이며 완벽하고 영원하다. 종교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진리는 신의 사유,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이 신과 공유하는 사유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 진리의 완벽한 모형은 곱셈표로 정확하고 확실하며 시간적 불순물이 전혀 섞여 있지 않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이후에 후학이 신학과 더 많이 연결되면서 대부분의 전문 철학자들의 인식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듀이의 관심은 수학이 아니라 생물학이기 때문에 사유를 진화의 한 과정으로 이해한다. 물론 전통적 견해도 인간이 점차 더 많이 알게 된다는 점을 인정할 테지만 지식의 한 부분은 성취되었을 때 궁극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인간의 지식이란 유기적 전체로서 모든 부분을 거쳐 점차 성장하지만 완전한 전체에 이를 때까지 어떤 부분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듀이는 탐구를 진리나 지식이 아니라 논리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는 탐구를 이렇게 정의한다. “탐구는 결정되지 않은 어떤 상황을, 원래 구성된 요소들이 통일된 전체가 되도록 그러한 상황을 이룬 구별과 관계 속에서 결정된 상황으로 바꾸려고 통제하거나 지시하는 활동이다.”

 

듀이의 세계는 인간이 상상으로 채운 공간이며 그의 철학은 니체처럼 개인의 힘을 강조한 게 아닌, 힘의 철학이다.

 

논리분석철학, 게오르크 칸토어, 프레게, 아인슈타인

31. 논리분석철학

 

플라톤과 토마스 아퀴나스, 스피노자와 칸트는 수학에서 영감을 받은 수학파에 속한다. 데모크리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로크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경험주의자들은 수학 반대파에 속한다. 우리 시대에 수학의 원리에서 피타고라스주의를 제거하고 인간 지식의 연역적 부분에 대한 관심과 경험주의를 결합시키는 일에 착수한 철학 학파가 등장했다.

17세기에 활동한 위대한 수학자들은 낙관적 태도로 빠른 결과를 내고 싶어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해석 기하학과 미적분학의 토대를 불확실한 상태로 남겨 두었다. 라이프니츠는 실제 무한소가 있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믿음은 그의 형이상학에 적합했지만, 수학의 관점에서 보면 논리적 근거가 없었다. 바이어슈트라스는 19세기 중엽에 무한소 없이 미적분학을 확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마침내 미적분학에 확실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다음에 게오르크 칸토어가 등장하여 연속과 무한수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가 정의 내리기 전까지 ‘연속’은 모호한 낱말로 형이상학의 지리멸렬한 면을 수학에 들여오고 싶어 했던 헤겔 같은 철학자에게 편리하게 이용되기도 했다. 칸토어는 연속이라는 말에 정확한 의미를 줌으로써 자신이 정의한 연속이 수학자나 물리학자에게 필요한 개념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베르그송이 내놓은 것과 같은 수많은 신비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폐물이 되었다. 칸토어도 무한수에 관한 오래된 논리적 수수께끼를 풀었다.

게오르크 칸토어는 ‘무한’집합을 전체집합이 포함하는 만큼 많은 항을 포함한 부분을 갖는 집합으로 정의했다. 이를 기초로 그는 무한수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수학 이론을 세울 수 있었고 이로써 이전에 신비주의와 혼란에 빠졌던 정수 영역을 정확한 논리 영역에 들여놓았다.

프레게는 『개념 기호법』을 1879년에, ‘수’의 정의를 다룬 『산수의 기초』를 1884년에 출판했다.

카르납은 철학의 모든 문제는 실제로 구문론과 관련되기에 구문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 철학의 문제들은 해결되거나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된다는 이론을 세웠다.

물리학은 순수 수학과 마찬가지로 논리분석철학에 재료를 제공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통해 일어났다. 아인슈타인은 입자를 사건으로 대체했다. 사건은 제각기 다른 각 사건과 ‘간격’이라는 관계를 맺으며 간격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 요소와 공간 요소로 분석될 수 있었다. 물리학이 물질을 더러 물질적인 대상으로 만드는 사이에 심리학은 정신을 덜 정신적인 대상으로 만들었다.

현대물리학과 생리학은 옛날부터 이어진 지각의 문제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다. 만일 ‘지각’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지각은 어느 정도 지각된 대상이 낳은 결과임이 분명하고 지각이 지각된 대상에 대한 지식의 근원이라면 대상과 많든 적든 유사할 수밖에 없다. 첫째 필요조건은 범위가 크든 적든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독립된 인과 계열들이 있어야만 충족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광선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광선이 지구 대기권에 도달하여 굴절되면 어떤 광선은 다른 광선보다 더 많이 산란된다. 광선이 인간의 눈에 도달하면 다른 곳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법하지만, 우리가 ‘태양을 본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온갖 일이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 경험에 속한 태양이 천문학자가 경험한 태양과 많이 다르더라도 전자가 여전히 후자에 속한 지식의 원천이다.

철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철학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뒤섞인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세계의 본성에 대한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최선의 삶의 방식에 대한 윤리 혹은 정치 학설이다. 두 부분을 충분히 명료하게 분리하지 못한 것이 혼란스러운 사고의 원천이었다. 플라톤부터 윌리엄 제임스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교화에 대한 갈망 속에서 우주의 구조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지성적으로 철학은 도덕적 고찰의 잘못된 결과로 비범한 정도까지 진보하지 못했다. 플라톤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는 영혼 불멸과 신의 실존을 입증하는 ‘증명들’을 제시하는 일이 자기가 맡은 직무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선배 철학자들의 증명에서 결점을 발견했기에 성 토마스는 성 안셀무스의 증명을 거부하고 칸트는 데카르트의 증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증명을 제안했다.

 

러셀, 사랑하고 따지며 꾸밈없이 따뜻한 마음가짐으로 살다 / 서상복

 

철학자, 수학자, 사회운동가, 교육자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 버트런드 러셀은 1872년에 영국 웨일스에서 존과 케이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유주의자로서 공리주의적 사회 개혁을 옹호한 존과 케이트는 갑작스레 병에 걸려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어린 러셀은 형과 함께 조부모가 사는 펨브로크 로지 저택에서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 존 러셀 경은 1832년 선거법 개정 투쟁을 이끈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가로 영국 수상을 두 차례 지냈으며 할머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파의 독실한 신자였다. 러셀은 자서전에 유년 시절은 행복했으며 열한 살이 되었을 무렵에 형과 함께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하면서 지적 활동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1890년에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화이트헤드와 함께 페아노와 프레게의 수리 논리학을 발전시켜 주저인 『수학 원리』 1권을 1910년에, 2권과 3권을 출간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논리적 분석 방법의 토대를 세웠다. 1911년에 자신의 논리분석철학의 계보를 잇는 비트겐슈타인을 만났으면 그가 『논리철학논고』를 출간하고 학문 세계를 형성하도록 도왔다.

그는 소련을 방문하기도 했고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철학을 강의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문제』를 펴냈다. 1938년부터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연했는데 이 시기에 『러셀 철학사』를 완성했다. 1950년에 『러셀 서양 철학사』, 『인간 지식』, 『결혼과 도덕』 등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55년에는 핵무기의 위험을 알리고 평화와 안전을 촉구한 ‘러셀 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고 각국의 과학자가 참가하여 군축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퍼그워시 회의’를 창설했다. 이후 88세의 나이에도 ‘100인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중적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쳤고 1963년에 ‘러셀 평화 재단’을 설립했다. 핵무기 폐기 운동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 케네디 암살 조사, 인도·중국 국경 분쟁,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당대 많은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논리주의자, 실재론자, 자유주의자, 인도주의자, 시민운동가로 불리는 러셀은 20세기 영미 분석 철학의 문을 연 선구자로서 논리학, 인식론, 존재론, 윤리학, 사회철학을 비롯한 철학 전반에 걸쳐 분석적 방법을 적용한 독창적 견해를 연이어 발표했다. 학문적인 면에서 수리논리와 관계논리를 포함한 현대 기호논리학을 확립했고 비트겐슈타인, 라일, 카르납, 콰인, 셀라스, 크립키 등으로 이어진 현대 분석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사회적인 면에서 과학의 힘을 믿는 무신론자이자 개혁적 자유주의자로서 인권과 시민권을 옹호하기 위해 권력과 맞서 싸웠다.

러셀은 생을 마감하기 3년 전부터 『러셀 자서전』을 3권으로 나눠 출간했는데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은 자신의 일생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했다.

러셀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미운 것을 아름답다고 강변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복에 도취되어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누구의 인생이든 아름답고 즐겁고 좋아지기를 바랐다. 그가 매번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을 아름답고 좋게 만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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