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2 (화) 12:00:00 정유환 수필가서울의 아침이다. 아파트 베란다 블라인드를 올리자 바로 눈앞에 산이 들어온다. 연두색이 초록으로 변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하얗게 무리 진 나무가 보인다. 흰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아카시아라 불리는 아까시나무다. 창을 여니 아카시아 꽃향기가 훅 들어온다. 달콤한 그 향기는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 소환한다.
어릴 땐 참 많이도 따먹었는데…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요즘, 자주 어릴 적 얘기를 꺼내던 어머니가 아카시아 꽃을 보자 꽃을 따먹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뒷산에 흰 꽃이 흐드러진 오월이면 향내 따라온 벌을 헤치며 벌은 꿀을 따고 우리는 아카시아 꽃을 땄다. 그때는 공해가 심하지 않았으므로 봄비에 깨끗이 씻긴 꽃을 따서 그대로 먹었다. 모든 꽃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다. 향기가 같은 꽃은 없다. 시골 태생인 나는 이꽃 저꽃 먹어보고 향기도 맡아 보았다. 그중, 아카시아 꽃처럼 순하고 향기로운 꽃은 만나보지 못했다. “엄마, 아카시아 꽃 따러 가실래요? 서울 꽃은 공해 때문에 보기만 하지 먹진 못해요.”
아파트 돌담, 길가 축대 위에도 흰 꽃 송아리가 진주처럼 늘어져 있다. 색깔만 다를 뿐,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것 같다. 길가의 가로수 이팝나무 흰 꽃도 신록의 나무와 어울려 피어있다. 문득 이팝나무 흰 꽃을 노래한 시인이 떠오른다. 이팝나무 꽃을 쌀밥에 비유한 안중태 시인이나, 흰쌀이 주렁주렁 이팝나무 차진 쌀밥이 따스한 봄볕에 튀겨지고 있다는 김동석 시인의 시를 가만히 읊조린다. 가슴이 뭉클하다. 먹어본 적 없던 이팝나무 꽃이 행여 내게로 떨어져 내릴까 올려다본다.
맛있게 먹던 아카시아 꽃과 흰 쌀 같은 이팝나무 꽃이 같은 계절, 동 시간에 피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조물주의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시간은 대다수 민중이 힘들게 넘던 보릿고개라 불리는 춘궁기다. 보리 수확까지 한참이나 가야 하는 고갯마루, 몇몇 부유한 이를 빼곤 마을마다 쌀 항아리 긁는 소리가 들렸더랬다. 내 어린 시절도 그랬다. 불과 몇십 년 전 일이다. 전사불망前事不忘이라 했다. 그 시절을 넘어온 세대나, 아예 모르는 후세대나 이팝나무 꽃이 이밥이 되었으면 하던 세대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노파심이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5월, 서울의 봄은 이제 막 벚꽃을 떠나보낸 허전함을 신록의 연두색이 메우고 있다. 꽃잎을 황망하게 떨어버린 나무는 모처럼 고국을 방문한 나를 위로하듯 싱그러운 잎을 팔랑거린다. 피었나 싶었는데 어느 날,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고 지인은 못내 아쉬워한다. 지금은 뒤를 이어 피어난 갖가지 색의 철쭉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난분분 거리며 떨어져 내리진 않지만, 철쭉은 서로 시간을 두고 꽃을 떨구며 봄의 캔버스를 물들인다.
이제는 아카시아 흰 꽃과 이팝나무 흰 꽃의 시간. 거리를 흰색으로 덮어 놓는다. 연둣빛 신록과 짙어지는 초록의 조화는 어디에 카메라를 디밀어도 작품이다. 지금 오월은 조물주의 풍경화를 그리는 중이다. 장미는 화폭 어딘가를 차지하려고 봉오리를 키우고 있다. 이름 모를 각색의 꽃들이 나도 끼워달라고 바람에 올라앉아 춤추듯 자태를 뽐낸다. 소나무는 노란 꽃가루를 날리고, 밤이면 소쩍새가 솟쩍대는 오월이다. 풍년이 오려는가 보다.
<정유환 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