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가례嘉禮 / 박순태

 

마음이 달뜨는 계절이다. 경칩이 지나자 진달래 나뭇가지 끝자락의 꽃눈이 하루가 다르게 볼록볼록 부푼다. 혼례 준비 열기가 밖으로 삐져나온다.

지난해 초겨울부터 산책길에서 눈으로 쓰다듬던 진달래 꽃봉오리이다. 좁쌀 크기의 꽃눈은 삼동 내내 해토 되기만을 기다렸던 게다. 눈보라 치는 겨울에도 햇볕에 온몸을 데우고 속을 채우면서 청춘으로 향했다. 봄바람을 재촉하려 애면글면 용을 썼다. 이젠 성년이 되었노라고 목을 치켜세우는 암술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기온이 올라 찬바람에 오들거리지 않은 채 꽃잎 활짝 펼치겠건만, 무엇이 그렇게나 바빠서 암술은 목을 치켜들고 서두를까.

초목 세계에서 진달래 가족의 성혼은 유별나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잎도 나기 전에 성급하게 팡파르를 울려 퍼뜨린다. 녹아내리다 남은 계곡의 빙판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는 시기에 외동딸의 성화로 서둘러 올리는 성혼이라 주변 환경이 여의치 못하다. 계통이 다른 이웃들은 아직 겨울잠에서 기지개도 켜지 않은 상태다. 진달래는 시기로, 크기로, 색깔로, “나여 나”를 풀어낸다. 추위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데 산을 붉게 물들이는 정열의 꽃불, 가관이다.

진달래꽃 안방 정경이다. 우뚝한 몸집의 암술 하나를 가운데 두고 수술들이 둘러서서 주눅 든 자세로 읍을 하고 있다. 복수초꽃, 생강나무꽃, 산수유꽃, 개나리꽃 등, 이른 봄에 피는 여타 꽃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꽃잎이 부드럽고 크다. 딸 하나에 아들 열이 가정을 이루어 한 공간에서 생활한다. 근친혼으로 일처다부제의 가모장 제도이다.

암술의 독무대다. 수술보다 서너 곱이나 몸집이 큰 암술은 중앙에서 자신을 둘러선 수술들을 향해 호령한다. 측천무후 같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원을 그리며 둘러선 수술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면서 일일이 다짐을 받는다. 암술의 기센 용틀임에 수술들은 주눅 든 채 몸 둘 바를 모른다. 이제껏 햇볕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건만 자력으론 도저히 암술을 당해내지 못할 수술들 몸체다. 벌 나비라도 날아든다면 다행이건만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그들의 협조를 기대하기에는 이르다. 성급하게 족두리 쓴 암술을 향해 원망만 널어놓을 위치도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암술은 눈을 내리깔고 수술을 향해 차례차례로 원망의 목소리를 쏟아낸다. 내방內房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극과 극의 암술과 수술. 수술은 이를 악물고 근육에 힘을 주면서 대지의 차가운 기운을 견디어 낸다. 이들은 암술의 다그침을 잠재우려 추위에 오그라든 몸일망정 찬바람에 도움을 청하려 든다. 신세 한탄보다는 고통을 이겨내면서 가풍을 이으려 안간힘을 쓰는 수술들이다. 성에 차지 않은 암술은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며 밑도 끝도 없이 수술들을 다그친다. 진달래꽃 속, 암술의 갑질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덕배기보다 양지바른 곳의 진달래는 닷새나 일찍 성혼선언을 했다. 꽃잎을 일찍 펼친 연유는 태양이 전해주는 기운과 훈풍의 도움이었다. 햇볕과 바람은 살며시 다가와서 운우지정의 이불이 되었다. 그것은 생식生殖을 위한 신의 보시였다. 그 손길이 이젠 언덕배기로 찾아 들 차례다. 햇볕과 바람의 기운은 절차에 따라 순번을 지켜가면서 상대를 고른다. 자력으로 이룰 수 없는 진달래의 사랑, 그 사랑이 완성될 수 있도록 절대자는 훈훈한 입김을 불어낸다.

활짝 피었던 꽃송이가 며칠 새 꽃잎을 떨구었다. 시들어 생기 잃은 꽃잎 따라 수술도 맥없이 허물어졌건만, 암술은 홀로 자리를 우두커니 지키고 있다. 튼실한 씨앗 하나 잉태하려 몇 날을 지새우며 새가 알을 품듯 외롭게 배젖을 보듬고 있다. 때 이른 교접을 고집한 암술, 자신의 성급한 행위를 성찰하는가. 허리를 잔뜩 굽히고 있다.

꽃 진 자리에 눈을 멈춘다. 진달래꽃의 사연을 상상해 본다. 암술은 춘광春光을 내려달라고 해님께 애원哀願했을 거고, 겨울의 잔재를 멀리 날려 보내라며 바람께 졸랐을 것이다. 수술은 암술의 행위에 박자 맞추느라 진을 뺐을 게 뻔하다. 이들은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은 동물이며 옆자리 다른 계통 이웃에게 기지개 켜도록 나팔을 불어댔다. 암술과 수술이 하나가 되어 베푼 진달래꽃 잔치는 새벽잠 깨우는 봄맞이 종소리이다.

‘땡땡 꽃 핀다, 땡그랑 꽃 피었다, 땡 댕그랑 꽃 진다.’ 다닥다닥 피어난 진달래 꽃송이는 크기와 모양이 하나같다. 암술 하나에 수술은 어김없이 열이다. 이들은 정형화된 구조물 속에서 고유한 유전인자로 자손만대 혈통을 보전할 것이다.

진달래 가례嘉禮, 암술과 수술은 전해 내려오는 가풍을 지켜야 한다는 엄명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인간사의 이음줄을 위해 우리는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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