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심헌 반시 / 김순경

 

서늘한 바람이 핏빛을 몰고 온다. 짙은 초록의 두꺼운 감나무 이파리도 진홍으로 얼룩진다. 뜨거운 햇볕과 거친 비바람을 막아주던 잎사귀가 하나둘 떠나자 빨간 감이 파란 하늘에 박힌다. 속살을 훤히 드러낸 홍시가 더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뚝 떨어진다.

 

청도 청심헌淸心軒을 찾아가다 감나무숲을 만났다. 반시盤柹의 고장 매전면에서도 오지인 장연리는 비가 많이 오면 동창천이 범람하는 동네 중에 하나다. 가파른 바위산이 삼면을 에워싼 산골이라 결실의 계절만 되면 찾아오는 태풍에도 피해가 거의 없고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해 감과 대추의 당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한적한 시골길을 한참 동안 달려가도 잘 익은 감들이 주변을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광경이 계속되었다.

 

감나무는 봄만 되면 연록의 새순을 내민다. 마른듯한 가지에 맺혀 있던 잎눈에서 가지와 잎이 사방으로 뻗어난다. 감꽃은 매서운 추위가 완전히 물러가기도 전에 보일 듯 말 듯 이파리 뒤에 자리 잡는다. 탄탄한 꽃받침 위에 피어난 우윳빛 꽃잎 속의 열매가 몸통을 불려간다. 봄을 알리는 매화처럼 향기를 뿜어내지도 벚꽃같이 자신의 모습을 천지에 드러내지도 않고 그냥 피어난다. 어머니 치맛자락에 숨어 빼꼼히 내다보다 금세 숨어버리는 아이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수줍은 듯 넓은 잎사귀 뒤에서 나타났다가 얼른 사라진다.

 

유년 시절 감꽃을 많이 먹었다. 가지에서 떨어진 것이 더 맛있었다. 방금 떨어진 오동통하고 하얀 것보다는 조금은 풀이 죽은 노르스름한 것이 훨씬 달았다. 햇가지 높은 곳에 있는 꽃은 쉽게 딸 수도 없고 손이 닿는다고 해도 억지로 잡아당기면 끄트머리만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한 잎을 따 먹어도 단맛이 덜했다. 감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듯 하얗게 이울어져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신록이 짙어가고 벌 나비마저 떠나가면 저절로 흰 별같이 떨어져 있었다. 그때는 밤새 떨어진 감꽃을 주우려는 아이들이 어두운 새벽 골목에서 서성댔다.

 

동창천을 건너 동네 입구로 들어서자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다. 나뭇가지마다 흥부네 아이들만큼이나 매달려 있다. 휘어지고 늘어진 가지는 끈으로 지주목에 매달거나 받침대로 받쳐두었다. 지나치게 열매가 많은 가지는 찢어지거나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같이 불안해 보였다. 사방을 둘러싼 산이 없었다면 지난 태풍에 다 떨어졌을 것만 같았다. 불그스레한 저녁노을이 나뭇가지에 내려앉자 하얀 분을 뒤집어쓴 붉은 감이 더욱 탐스럽게 보인다.

 

청심헌 끝자락이 얼핏 보인다. 세상 시름 다 잊고 자연 속에서 지내고 싶다던 동생의 또 다른 거처다. 삼도사촌三都四村을 꿈꾸며 이곳에다 둥지를 튼 지도 내년이면 십 년이다. 비좁고 꾸불꾸불한 골목을 돌아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언덕배기에 올라서자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촌부가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손을 흔든다. 정원이 흠잡을 데 없이 정갈하다. 중학교 일학년 남학생 뒤통수처럼 잘 정돈된 향나무와 단풍나무, 넓은 마당의 잔디와 화초를 보니 온종일 다듬고 치웠겠구나 싶다. 마당 한쪽에는 벌 나비들이 터질 듯 부푼 소국 꽃망울 주위를 분주히 오가고 마디마다 꽃을 피운 박하는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짙은 향기를 뿜어댄다.

 

현관 계단을 오르다 불쑥 나타난 반시에 놀랐다. 지난봄에 보이지 않던 가지가 탈진한 듯 축 늘어져 있다. 연약한 가지에 어찌나 열매를 많이 달았는지 탐스럽기보다는 안쓰러워 보인다. 올해 조금 달고 내년에 또 맺으면 될 것을 뭐하러 욕심을 부리는지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며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이 없기라도 하듯 저렇게 열매를 맺고 나면 한동안 육신을 추스를 수 있을까 싶다. 아무리 거름을 많이 하고 약을 친다고 해도 해거리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담 밑에 자리한 늙은 나무는 다르다. 떨어지는 연시를 받으려는지 두껍고 거친 이파리부터 바닥에 쌓는다.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마저 없었다면 감나무였는지 모를 정도로 녹색 이파리도 단풍잎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 뻗친 앙상한 가지에는 씨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홍시 몇 개만 매달려 있다. 사력을 다해 지난봄에도 힘들게 순을 내더니 기력이 다했는지 일찌감치 잎사귀를 떠나보내고 나목이 되었다.

 

해마다 조금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잔가지는 정리한 지 오래고 굵은 가지도 많지가 않다. 곳곳에 남아 있는 상흔들이 만만찮았던 역정을 말해준다. 보시하듯 육신을 내어주는 어느 수도승의 풍장처럼 밑둥치에 뚫려있는 구멍에는 텃새들이 들락거리고 우람한 가지에는 담쟁이가 엉클어져 있다. 기력이 쇠잔하고 육신이 썩어가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선뜻 자리를 내주지는 못하고 눈치를 살핀다.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든다. 투박하고 윤기 없는 감나무같이 끝없이 벗겨지는 각질 속에서 검버섯과 푸른 핏줄만 돋아난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괜히 서러움이 복받쳐 울컥거리기도 한다. 돌아보면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으면서 심신만 덧없이 삭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선가 감 하나가 뚝 떨어진다. 저녁놀이 가득한 마당이 졸지에 핏빛으로 물든다. 아무래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만추가 멀지 않은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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