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칸의 시간 / 최민자

 

 

-저쪽 끝이 314호실이에요.

 

안내인이 복도 끝 방을 가리켰다. 처음 와보는 요양병원, 가슴이 우당탕, 방망이질했다. 고관절이 무너져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된 노모가 이곳으로 옮겨온 게 일주일 남짓, 좁고 지저분한 복개천을 돌아 멀뚱하게 서있는 병원건물에 들어설 때부터 마음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막혀있던 가족 면회가 때맞추어 풀린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시난고난 살아낸 한 생의 끄트머리를 이렇듯 심란한 종착지에서 지어야 하는 인생이라니.

 

복도 양쪽, 병실마다에 머리 허연 노인들이 폐기물처럼 내박쳐 있었다. 침대에 웅크려 돌아누운 사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쭈그려있는 사람, 반쯤 넋이 나간 퀭한 눈으로 멍하니 허공이나 주시하는 사람〮…. 대낮이었음에도 음산하고 퀴퀴한 기운이 안개처럼 건물 안을 점거하고 있었다. 삼백 명 가까운 노인들이 형량도 정해지지 않은 무기수처럼 표정을 잃고 복역하는 이곳 불쑥, 설국열차의 꼬리 칸이 떠올랐다. 낡고 해지고 여기저기 고장나 쓸모를 잃은 육신들을 한시적으로 보관 해주는 수용소 같은 이곳은 더 이상 인간들의 삶터가 아니었다. 이승이 아닌 연옥 어디쯤의 풍경이려나. 위리안치로 수감시켜 두기에는 너무나 무해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순치된 가축 아니 좀비 같은 표정들, 요양은 무슨. 이름만 아름다운 감옥 아닐까.

 

"고려장이여, 고려장. 거기 들어가면 니들도 못 보고 혼자 죽 을턴디…. 나는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란다. 똥오줌 못 가리고 누워버리면 그땐 거기다 데려다 놓을 테지…"

똥오줌 못 가리고 누워버릴까 봐 고장난 허리와 아픈 다리를 끌며 가까스로 화장실을 오가다가 기어이 절퍼덕 주저앉으신 엄마. 고령에 수술도 어려워 다시 걸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게 병원 측이 내린 최후통첩이었다. 현대 의학이 선물한 유병장수라는 질병 아닌 질병이 장수를 축복 아닌 재앙으로 바꾸면서 네 명 중 세 명이 병원에서 죽는 시대, 내 침상에서 내 베개를 베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하고 아쉬운 포옹이라도 나누며 편안하고 품위 있게 죽는 일은 애초 허용 안 된 꿈이었을까. 연어도 물 냄새를 기억해 강을 거슬러 오르고 코끼리도 죽을 데를 찾아든다는데 임종 장소조차 선택하지 못하고 주삿바늘이 주렁주렁 꽂힌 채 무슨무슨 환자라는 죄목을 덮어쓰고 어딘지도 모르는 아득한 곳으로 유배되어 떠나는 게 이생의 마지막 수순이어야 한다니.

 

허리부터 발끝까지 반깁스한 몸으로 울룩불룩한 욕창 매트 위에 101살 노인이 누워계신다. 엄마……하고 부르니 반가움에 고개를 일으키시려다 발끝도 못 움직이고 자지러지는 엄마. 일찍 머리가 세셨지만 염색 한 번 거르지 않았고 진즉 틀니를 하셨음에도 성근 잇바디를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을 만큼 자존심 강하고 정갈한 엄마가 일생 입어본 적 없는 얼룩덜룩 한 환복에 갇혀 수인(人)처럼 형틀에 포박되어 계신다. 앙상한 뺨, 움푹한 눈자위, 주사 자국으로 성한 곳 없이 멍든 팔뚝, 근육도 없이 말라붙은 다리로 그렇게도 오기 싫어하시던 곳으로 짐짝처럼 옮겨진 엄마는 단지 너무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잠수복 같은 육신에 갇혀 천형 같은 고문을 감수하고 계신다.

 

소변줄 끝 비닐 주머니에 탁한 붉은빛이 괴여드는 동안 감은 듯 가느스름해진 눈자위로 말간 누액이 흘러내린다. 전쟁과 가난과 온갖 풍파 속에 아홉 아이를 낳고 생떼 같은 자식을 셋씩이나 가슴에 묻은 구겨지고 쭈그러진 피대기 같은 범부가 무에 그리 큰 죄를 지었기에 한 생의 끄트머리에서 산채로 칠성판에 붙박인 채로 고통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개체의 죽음과 자기복제로 세대를 이어가는 이 행성의 운영체제를 모르지 않지만, 육친의 생생한 고통 앞에 서면 여태의 터무니없는 은총을 잊고 아직껏 화해하지 못한 신에게 주먹감자라도 날리고 싶어진다. 설령 그것이 이 땅에 생명을 존속시키는 기발한 순환의 방편이라 쳐도 원천징수치고는 너무 가혹한 몰인정한 징벌적 과세 아닌가.

 

생명은 모두 백전백패, 모든 삶은 죽음으로 요약된다. 우연으로 왔다 필연으로 지는 인생, 왜 내 의지도 선택도 아닌 한 생을 힘들게 살아내고도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흩뿌리며 공포에 질린 뒷걸음질로 세상을 하직해야 한단 말인가. 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독수리에게 생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견뎌야 했던 프로메테우스처럼, 상황을 명징하게 인지하면서 언제일지 모르는 때가 올 때까지 초조하게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다. 욕창이 자리 잡은 아랫도리를 어쩔 수 없이 타자에게 내맡기는 수모를 견디며 집에 가고 싶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어야 하냐고, 자포자기의 눈빛으로 그렁그렁해 하시는 외로움에 대하여 검불 같은 저 안노인처럼.

 

병원에 다녀온 뒤로 내내 잠자리가 편치 못하다. 잠결에 문득 돌아눕다가, 푹신한 침상이 죄스러워 뒤챈다. 뼈마디가 부서지고 살갗이 문드러지면서도 돌아눕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채 형기도 모르는 형량을 감수하고 있을 늙은 수인(人)의 신음소리가 벌떡벌떡 나를 일으켜 세운다. 차라리 얼른 데려가시라고, 아니면 정신이라도 무뎌지게 하시라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환하기도 한다. 자신의 죽음과 가장 상관없는 사람은 자신일 것이어서 엄마는 지금 삶의 마지막 과정을 명철한 감각으로 인지하며 이승의 시간들을 살아내고 계시는데 주제넘은 딸은 타자의 삶을 고통으로 해석하며 불효막심한 기도나 드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날이 밝으면 또 문안 전화를 드리고, 오늘은 엄마 목소리가 좋다고, 드시기 싫어도 드셔야 한다고, 그래야 빨리 집에 갈 수 있다고, 세 숟갈 죽도 못 넘기는 엄마에게 자꾸 늘어가는 거짓말로 짐짓 명랑한 척 주절대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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