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단지를 열었다. 알싸한 향기가 주당임을 자처하는 내 코끝을 간질인다.
우연히도 베란다 한쪽 구석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술 항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비수리로 담근 술이 몸에 좋다기에 지난가을 앞뒤 가릴 것 없이 담가 두었던 술 단지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에야 발견한 것이다. 남 이야기만 듣고 욕심이 생겨 담그기는 했지만, 아내는 술을 못하니 관심이 없다. 나도 밖에서야 즐기는 편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혼자 마시기가 머쓱해서 찾는 일이 거의 없느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뚜껑을 열고 술을 따르니 유리 항아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양이 생각보다 많다. 찾아오는 손도 별로 없고 집에 있어도 잘 마시지 않는 술이다 보니, 친분 있는 사람들과 조금씩 나누기로 한다. 아내는 작은 음료수 병에다 술을 나누어 담으며, 오래전에 이사를 한 옛 이웃과 시아주버니, 친정 오라버니까지 들먹인다. 항아리의 술이 다 없어질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는 "당신은 밖에서 마시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네요." 하고 눈을 흘긴다.
비수리를 베어서 집으로 가져온 날 밤이었다. 한밤중에 딸아이의 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온 식구들이 잠을 깼다. 도둑이라도 들었을까. 기겁하여 방문을 열어보니 아이는 말을 내뱉지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방구석만 가리킨다. 아뿔싸, 그곳에는 시뻘건 지네 한 마리가 슬금슬금 기어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회에서만 자라서 지네 따위를 볼 일이 없었던 아이가 얼마나 놀랐을까. 겁에 질린 아이를 겨우 진정시키고 있자니, 나보다 더 용감한 아내가 책으로 그 원수를 때려잡는다. 베어 온 비수리를 딸아이 방 앞에다 널어놓고 다듬는 사이, 그놈이 방으로 스며들었던 모양이다.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가져왔다고 오밤중에 타박을 들었던 기억이 술 향에 녹아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이래저래 이 술은 내게 별 도움도 안 될뿐더러 면박만 받았으니 술맛이 날 리도 없다.
사실 지네 사건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사오 년 전쯤 여름이었다. 월요일 출장지에서 받았던 아내의 전화에는 심술이 잔뜩 묻어있었다. 좀처럼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이 뭔가 심사가 틀려도 단단히 틀린 듯했다. 출장 중에 싫은 소리를 들었기에 집에 와서는 초인종 누르기가 한참이나 망설여졌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서자마자 끝도 없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이유도 지네 때문이었다. 산행하고 난 다음 날이 새벽 출장이라서 급한 마음에 등산 가방이며 옷을 세탁실에 대충 넣어 두었다. 아내가 빨랫감을 정리하려고 가방을 들추자,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단다. 표현대로 하자면 뱀인지 지네인지 모를 만큼이나 컸다고 한다. 얼마나 놀랐는지 앉은 자세 그대로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고 호들갑이다. 다행히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서, 신발 바닥으로 지네의 뒤통수를 후려갈겨버렸다니 참 용기도 대단하다. 그 정도에서 이놈의 지네가 찍소리 안고 죽어 주었으면 오죽 좋았겠는가. 반병신이 되어 오도 가도 못한 채 제자리에서 뱅뱅이를 돌고 있으니 얼마나 징그러웠을까. 질겁해서 비명을 질러대니 이웃 아저씨가 뛰어나와 제대로 잡아 주었다는 웃지 못할 경험이 있다. 이런 이력이 있는 아내이다 보니 딸아이를 자지러지게 한 지네를 단박에 저승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무심한 나 때문에 이래저래 애꿎은 지네만 목숨을 잃었으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식물과 자주 접하다 보니 약초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다. 무엇이 몸에 좋다느니, 무슨 식물을 어떻게 하면 효과가 있다느니 하는 식의 뜬금없는 말을 듣게 된다. 특히나 인터넷에서는 근거도 없이 모든 식물이 다 만병통치약처럼 과대 포장되어 있다. 한 번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된 식물은 씨가 말라버릴 정도로 남획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어느 하나하나 소용이 없는 식물이 있겠는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니 문제인 것이다. 아프지도 않은 사람이 그저 내 몸 하나 호사하자고, 온갖 식물이나 동물들에 수난을 가한다. 요즘은 어느 산에서나 흔하게 자라던 잔대나 도라지조차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화가 되는 법이라지 않은가. 효과가 있는 풀도, 건강에 이로운 나무도 그저 필요한 정도면 충분한 것이 아닌가. 풀도 나무도 제 몫의 삶을 가진 소중한 목숨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베란다에 퍼지는 술 향기는 달콤한데, 사람들의 과도한 이기심에 나도 동참한듯하여 자꾸만 뒤가 켕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