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무꽃 피다 / 김근혜 

 

등에 무꽃이 허옇게 폈다. 꺾어서 맛을 본다면 아마도 달싸한 맛이 나지 않을까. 눈여겨보지 않아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한 생을 마감하는 사람 등에만 피는 꽃, 아름다운 향을 지니고도 어둠 속에 있어서 더 쓸쓸해 보인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짊어져야 할 목록들을 숨기고 등은 고인 눈물을 삼키며 단단해져 간다. 빗물이 들어도 몸을 열어 품고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등. 둥그렇게 굽어가는 이유이다. 작은 등은 극한의 시간을 견디며 점점 넓은 들판이 되어 간다.

성인이 다 된 지금도 딸아인 내 등에 얼굴을 묻는 걸 좋아한다. 아빠 등에선 밤꽃 냄새가 나는데 엄마 등에선 페퍼민트 냄새가 난다고 유독 내 등을 선호한다. 언젠간 아빠의 밤꽃 냄새를 가슴 일부분으로 담을 때가 오겠지. 그 냄새가 자신을 키워낸 땀이었고 종교였다는 걸 알 때도 있을 것이다.

가끔 꽃가루가 날려 등이 간지럽다. 손의 더듬이로 문장을 읽는다. 위안이 되지 않고 손톱이 생채기만 낸다. 상처가 처음엔 화끈거리지만, 딱지가 안고 흉터가 남을 때쯤이면 성숙해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생채기는 가족들의 응원이었고 격려였고 사랑이었다. 상처를 통해 서로를 빚고 가족들은 또 다른 풍경으로 살아간다.

딸아인 직장 생활 3년 차이다. 융통성이 없어서 덜 절인 배추처럼 뻣뻣하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산사태를 내 손전화기 속으로 자주 흘려보낸다. 그때마다 거대한 화물차 몇 대가 내 등을 밟고 지나갔다 되돌아오곤 한다. 곧추세우고 있던 등뼈가 휘청거린다. 아직도 업어줘야 할 것 같아 전율이 인다. 다행스럽게도 등보다 혀가 앞서 잘 길러온 말로 다독여 준다.

감정을 적절하게 뒤섞는 것도 삶의 지혜이고 요령이다. 나를 닮아서인지 타협하는 법을 모른다. 사회생활을 순탄하게 하려면 등을 굽혀야 편하다. 성정은 바꿀 수 ​없으니 딸아이를 탓하지 못하고 바람에 몸을 유연하게 맡기는 법을 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식들은 잔 바람에도 휘청거렸을 고목의 속살을 잊고 영양분을 계속 공급해 주길 바란다. 진흙탕을 걸어왔을 부모의 신발 무게쯤은 당연하다고 여기나 보다. 투정이 한때 소나기로 그칠 거라서 그런지 이젠 익숙해진다.

몸의 중심은 아픈 곳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잘나나 못나나 자식은 부모의 아픈 부분이다. 작은 새가 앉아도 나뭇가지가 휜다는 걸 몰랐던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가슴이 헐러 본 내가 끌어안는다. 내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태평양을 건너서 아들이 온다.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날아오는 아이가 감사하다. 꽃은 많아도 장미처럼 벌과 나비가 찾지 않는 꽃이 있다. 장미는 독을 가져서 벌과 나비가 찾지 않으나 요즘은 벌과 나비가 독을 가지고 꽃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꽃에 비하면 나는 수시로 찾아드는 '자식'이라는 나비가 있어서 행복하다. 때수건으로 밀어도 지워지지 않는 암각화 꽃밭을 가지고 있으니 즐겁다. ​ 한겨울에도 벌과 나비가 찾아드는 꽃은 내 등에 핀 무꽃뿐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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