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초의 주문 / 박양근 

 

나는 사주팔자를 믿는다. 사주쟁이를 전적으로 믿지 않지만, 내게 사주가 있다는 건 믿는다. 토정 선생의 영향이 아니라도 누구나 자신의 한 해가 어떨까에 대한 궁금증은 갖기 마련이다. 물론 사람의 명운이 사주만으로 정해지는 건 아닐 터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은근히 한 해 운수가 궁금해진다. 지난해의 사주가 잘 맞았는데 하고 생각이 들면 다음 해 운수가 더 궁금해진다. 팔자든 운수든 행운이든 재수든 따지고 보면 모두 사주의 사촌쯤 된다. 길도 어쩌다 틀어지기도 하지 않는가.

바닷가로 차를 몰고 갈 때가 있다. 간혹 죽방렴竹防廉이라는 그물을 지나간다. 죽방렴은 바닷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그물을 쳐두고 물고기를 잡는 포획방식이다. 일단 그물만 쳐두면 앉아 돈 헤아리는 장사다. 물고기는 물길을 순리대로 따르다가 그냥 잡히는 봉변을 당한다. 주로 멸치를 잡는 그물인데 "치"가 붙은 물고기는 성미가 급해 죽방렴의 표적이 된다.

물고기란 정해진 물길을 따라다닌다. 그 길을 따라가며 먹이를 찾고 암컷을 만나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는다. 내가 보기에는 해류가 아니라 사주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 물살, 수온, 먹이, 물길이라는 네 조건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연월일시와 너무나 흡사하다. 사람처럼 사주의 그물에 갇혀 명을 마감한다. 일진이 나빴고 재수가 없다고 하지만 어명魚命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물고기가 사주팔자를 지녔다는 게 난 무척 안심이 된다. 만일 사람에게만 사주팔자가 주어지고 새나 물고기에게 그런 게 없으면 인간은 얼마나 비참할까.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만물의 졸장으로 불릴 것이다. 물고기가 그들의 생사를 자유의지로 결정한다고 해 보라. 끔찍한 사달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끔벅거리는 물고기의 두 눈을 가만히 보라. 우린 친족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사주만 있다면 좀 억울한 생각이 든다. 예외 없는 법칙이 없고 만사에 융통성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처럼 개뿐만 아니라 지렁이도 길을 가다가 위험을 감촉하면 돌아선다. 재수든 운수든, 행운이든, 가변차선이 있으니 가는 것이다. 한번뿐인 목숨이라고 죽방렴을 보면 그물에 갇힌 꼴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궁즉통. 조물주인들 융통성이 없을라고.

그래도 사주는 사주다. 사주의 본성이 무차별성, 평등성, 기회균등이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천하든 귀하든, 잘나가든 못나가든 사주는 하나다. 누구에게나 하나뿐이다. 일단 받으면 반품이 안 되고 리베이트가 안 된다. 바꾸거나 되 물릴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조물주는 참으로 골치 아플 것이다. 원 웨이 티켓One Way Ticket. 편도에 외길. 그래도 인생에는 잠시나마 가변차선이 있다.

나는 드라이브를 즐긴다. 드라이브를 좋아하면서 좋아하는 이유를 잘 몰랐다. 물살을 막은 죽방렴 그물을 바라보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드라이브에는 유 턴(U-Turn)이 가능하고 차선 변경이 가능하고 출구로 빠졌다가 다시 진입하는 게 가능하다. 급발진 같은 운수 나쁜 일을 당ㅎ사지 않고 교통규칙을 잘 지키면 유턴도 차선 변경도 우회도 가능하다. 후진도 가능하다.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만일 갔던 길을 돌아올 수 없고 잘못 들어간 길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 운전 맛은 싹 가실 것이다.

딱 한번 내 돈으로 사주를 봤다.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귀갓길에 재미 삼아 동네 시장에 전을 펼친 관상가에게 성명과 생년월일을 댔다. 알고 싶은 것은 어느 대학에 진학할까에 대한 가르침이지만 그 궤는 알려주지 않았다.

왈, 먹고 살 만하겠지만 고생 좀 하겠다. 자식이 있으나 애를 먹이겠다. 손재수가 이어지겠지만 글재주는 좀 있겠다. 물가에 가는 것을 조심하지만 물 수水자 붙은 곳에서는 잘 되겠다. 제 명에 살겠으나 안달하지 말아라. 지나고 보니 처처 옳으신 말씀이다. 은수저는 아니라도 제 숟가락 달고 나왔겠다. 손재수 없이 어찌 살 수 있겠담. 글재주야 훈민정음 24자를 잘 운용할 수 있으면 족한 것, 그만하면 족하다고 지금도 믿는다.

그래도 나이를 좀 먹으니 예외 없는 법칙이 없다는 말에 은근히 기댄다. 사주팔자가 죽방렴같이 철옹성이 아니기를 바란다. 운수와 재수와 행운이 어쩌다 한 번씩 있기를 바란다. 그렇고 보니 어제도 자동차 열쇠를 잃어버렸다가 운 좋게 찾았다. 지인이 포도 한 봉지를 기분 좋게 가져왔다. 내가 주관하는 행사도 다행스럽게 잘 끝났다. 경로 지하철을 모처럼 탔다. 이것도 운명의 차선 변경이라면 차선 변경이다.

"열려라 참깨."

《천일야화》에 나오는 유일한 주문이다. 사주팔자의 불가능에 바람구멍을 뚫는 연말연초의 주문이기를 바란다. ​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