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가 사라졌다 / 윤영

 

내가 사는 동네에 자그마한 단층 우체국이 있다. 검붉은 벽돌로 지어진 외관 안에는 이마가 동그랗고 똑 부러지게 생긴 젊은 국장과 수십 년째, 금융 파트를 맡은 영심 씨가 일한다. 볼일 때문에 일주일에 두어 번 우체국을 드나드는 나로서는 귀찮기도 하지만 동백이가 있어 좋았다. 가는 길에 만나는 반농의 평범한 삶들은 덤인 게고. 오늘도 집을 나섰다. 두 남자의 공방에 목공예품은 나날이 늘어가고 문 닫은 중앙자전거 점포엔 자개농만 늙어간다. 대낮부터 붉은 전등을 창가에 매달아 두는 돼지국밥집 주인의 심사는 뭘꼬. 모서리 약국 키 작은 약사는 늘 바쁘다. 발가락을 디밀며 무좀약을 달라는 노인, 아침부터 불콰한 얼굴로 박카스를 싣고 가는 노인. 재활용 의류 공장을 지나 능소화와 동백나무가 있는 우체국 마당에 들어선다. 일주일 전부터 보이지 않던 녀석은 오늘도 부재중이다. 내심 기대를 하고 왔건만. 지난여름인가 가을인가 동백나무가 있는 꽃밭으로 고양이 가족이 이사를 왔다. 오가며 정들다 이름까지 붙여주었거늘. 동백이라고.

우편물을 보내고 녀석들이 없는 꽃밭 모퉁이에 섰다. 희한하리만큼 이 벽에 기대고 있으면 소식 뜸한 친구, 요양원에 계신 엄마가 마구 그리워진다는 거. 뒷방 늙은이 꼬리뼈처럼 앙상한 능소화도 시푸르죽죽한 동백나무도 봄날이 그리운가. 두 나무의 르네상스가 시작되면 우체국 창문은 온통 꽃칠로 범벅을 이룬다. 그 유리창 아래 팔자 좋게 누운 녀석들을 볼 때면 괜스레 마음이 궁하곤 했는데.

나무를 목세권으로 끼고 태극기를 보증인으로 내세워 마련한 보금자리주택. 요즘처럼 꽁꽁 묶인 대출 걱정은 달나라 일. 사통팔달 햇살 들이치니 치솟는 가스값은 별나라 이야기. 다끼들 논자락 팔아 벼락부자가 된 이들의 돈다발 냄새는 또 어떻고. 그뿐이랴. 멀리 강이 보이는 조망권까지 가지지 않았는가. 기막힌 곳에 집 한 채 꿰차고 앉은 혜안이 몹시도 부러웠건만.

어느 한철은 능소화 꽃그늘에, 한철은 툭툭 지는 동백꽃잎에 누워 다디달게 잠들지 않았을까. 귀 밝은 통에 강변 은행잎 지는 소리, 여기저기 암자에서 흘러나온 염불에 씻었던 마음. 다산 들녘 오월은 연밭 천지 아니었던가. 발걸음 닿는 곳마다 연꽃향 즈려밟고 돌아오니 궁궐터가 따로 없다 했거늘. 궁궐터 호사도 살아 보니 별수 없었던가. 근자에 들어 자주 집을 비우긴 했지만, 아무리 원인을 생각해봐도 딱히 이유가 없다. 힘 있는 카르텔들의 집 비우라는 엄포가 두려웠을까. 무대뽀로 들이닥친 무리의 폭거에 맞서 싸우다 덜컥 입원이라도 했으려나. 수백 수천 통의 세금고지서와 독촉장을 싣고 달리는 우편집배원의 고단함이 전해져 왔던가. 이도 저도 아니면 가뭄에 콩 나듯이 훔쳐 읽던 손편지의 부재였을까. 경기 악화로 문 걸어 잠근 공장에 수런거리는 바람 소리가 절절했던가. 새끼들 짝 맞춰 떠나보내고 나니 적적해서 먼 여행이라도 떠난 건지. 동백이 없는 꽃밭엔 찬바람만 누웠다. 나는 털레털레 마당을 나와 사거리 약국에서 몸살약을 샀다. 참 혹독한 겨울이다. 곧 동백꽃이 필 게다. 사라진 동백이네 식구는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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