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여관은 버림받은 여인들이 한을 풀어놓는 곳이다. 예산 수덕사 입구에 있는 이곳은 마음에 깊은 상처가 없는 이들은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회한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우선 시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일엽 스님이 그렇고 스님의 친구이자 동갑내기인 화가 나혜석의 족적은 근세의 전설로 남아 있다. 또 여관의 주인이자 화가 고암(顧菴)이응로의 본부인인 박귀옥 여사도 한을 풀어 놓으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수덕사를 이야기하면서 일엽스님과 박귀옥 여사의 한은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관에서 정작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살다 무연고자 병동에서 외롭게 숨진 나혜석에 대해선 취급품목이 아니란 듯 외면하고 있다.
나혜석은 신바람 같은 자유 여성이다.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유학하면서 오빠 친구인 게이오대생 최승구와 열애 중 그가 결핵으로 죽었지만 그를 잊지 못한다. 24세 때 부유한 집안의 김우영과 결혼하면서 죽은 연인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 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녀는 연인의 고향인 전남 고흥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뜻을 이룬다. 나혜석은 그런 여인이다.
그녀는 아들 딸 둘을 낳은 뒤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여행에 올랐다가 잠시 파리에서 남편과 헤어져 홀로 머문다. 그곳에서 파리를 방문하는 천도교 교령 최린을 만나 ‘사랑은 눈으로 오고, 술은 입으로 오듯’ 첫눈에 빠져들고 만다. 독일에서 급거 파리로 날아온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확인한 후 3년 뒤 결국 갈라서고 만다.
귀국 후 나혜석은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한다.’는 파격적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싣고 “육과 영이 분리된 사랑이 능히 있을 수 있다.”며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 ‘이혼 고백장’이란 글에서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는 것과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오,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다.”며 여성의 일방적 정조관념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글을 반박하는 잡지사 기자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사를 털어 놓기도 했다. “연애하는 순간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야. 나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아.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니야. 서로 눈동자만 바라보고 앉아서 좋기는 뭣이 좋아, 수박 겉핥기지.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사람 같이 바보는 없을 거야.”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나혜석이 너무 일찍 태어난 것이다. 온 동네방네 모텔이 들어서 있고, ‘묻지 마 관광’이란 섹스 이삭줍기가 관광버스 안에서 이뤄지고 있고, 간통죄까지 없어진 요즘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한 발 앞서 달린 그녀의 행위가 그렇게 지탄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조선의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나 일반 여성에게는 그걸 요구하고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란 폭탄선언을 하고는 최린에게 ‘유부녀 정조를 유린했으니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소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 소송을 계기로 그녀는 세 아이의 어미란 직분과 화가로서의 인기, 그리고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신여성으로서 위상까지 잃고 만다. 나혜석은 결국 수덕사에서 승려가 되기로 자청하고 나섰지만 “너는 중이 될 재목이 아니야.”란 한 마디로 거절당한다.
나는 연전에 문화유산답사를 함께 한 도반들과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등 이른바 내포땅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수덕여관에서 하룻밤 몸을 의탁한 적이 있다. 한정식에 곁들여 동동주 몇 잔을 마시고 나니 객기가 발동했다. 시중드는 아주머니께 “칠팔십 년 전 이곳에 몇 년간 살았던 나혜석이란 여류화가가 혹시 어느 방에서 머물렀는지 아세요.”하고 물어 보았다. “우리 어머니도 태어나기 전이어서 잘 모르겠는데유.”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베개를 곧추 세우고 남으로 난 봉창을 향해 누웠으니 흐느끼는 듯한 여류화가의 낮은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나는 파리에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돌아 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꿈속에서 혹시 그녀를 만나면 “연애가 그렇게 재미있고 맛이 있더냐.”고 물어보려고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