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한송이 피었으면 좋겠다 / 강천

 

오늘같이 구슬픈 비 내리는 날, 창밖에 매화 한 송이 피었으면 좋겠다. 헐벗은 잔가지처럼 휘청휘청 내 심사 흔들리는 이런 날, 하얀 매화 한 송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얼히고설킨 등나무 줄기처럼 마음 어지러운 날, 암향 한 오라기 머물렀으면 좋겠다.

입춘이면 핀다는 춘당매 한 떨기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긴 긴 겨울의 꼬리를 자르며 보드레한 꽃잎 하나는 언제쯤 찾아올까. 차 한 잔을 들고 창가에 기대어 살금살금 다가오는 새봄을 맞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기미도 없는 봄이 무작정 그리워지는 날. 서리 뒤집어쓴 개망초 겨울 잎처럼 마음 시린 이런 날. 따뜻한 봄바람 전해주는 춘당매 한 떨기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등허리 꼬부라진 와룡매 한 송아리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굽이굽이 예순 고개 넘어나 와보니 ‘만사 다 그렇고 그런 것이더라’고 조곤조곤 다독여주는 속삭임이 그립다. 앞만 보고 왔다가 문득 돌아보니 모든 게 흐릿한 안개 속. 그 미로 안에서 잘나고 못나고, 웃고 울며 제멋에 겨웠다. 인생사 가는 길이 거기서 거기지. 넘어지지 않고 가고픈 대로 갈 수 있으면 그 또한 나쁘지 않으리니. 걸어온 여정만큼 줄기 휘어졌을지언정, 그 가지 곧게 치솟은 와룡매 한 송아리 보았으면 좋겠다.

조롱조롱 영롱한 빗방울에 산천재 남명매 한 송이 비쳐들었으면 좋겠다. 선비의 기상은 ‘겨울이 추울수룩 더욱 향기롭다’ 했던가. 야원에서 머금은 불굴의 정신, 봄마다 두고 보며 다잡았을 의기 아니었던가. 천왕봉처럼 높이 솟은 선인의 길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붓끝으로 피어났을 매화, 내 가슴에도 그릴 수 있으려나. 설중매 바라보며 초심을 가다듬듯, 남명매 자잘한 꽃잎 봄비 맺힌 물방울 속으로 비쳐들었으면 좋겠다.

달 없는 밤 앞길 비춰줄 통도사 지장매 같은, 초롱 하나 걸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인생사야 캄캄한 밤길을 걷는 나그네 신세. 이쪽이 바를까, 저 길이 순탄할까, 이리 가면 쉬이 갈까. 고비마다 망설이는 미혹의 길. 부귀를 바란 것도 아니고 공명을 바란 것도 아니건만 고해의 파도는 끝없이 밀려온다. 내 마음 갈 곳 잃어 정처 없는 이런 날, 아스라한 해인의 불빛 같은 지장매 한 송이 볼그레 빛났으면 좋겠다.

고요한 산사의 청량한 풍경 소리처럼 선암사 선암매, 그윽한 향기 온 창가에 퍼졌으면 좋겠다. 뎅그랑 뎅그랑 빠르지도 느리지도, 바쁘지도 게으르지도 않게, 오로지 제 뜻대로 숨결 가다듬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만히 눈 감고 절간 처마 밑에서 이는 바람 맞으며 세상사의 근심일랑 잊어보면 어떨까. 무한한 초월, 바라는 게 없으니 버릴 것 또한 없을 테지. 육백 년을 살았으니 무상함도 알 터인데, 봄마다 피는 꽃은 또 무슨 심사일까. 득도한 고승의 미소처럼 웃는 듯 마는 듯, 선암매가 읊어주는 해탈의 오도송 그 청량한 소리 한 번 들었으면 좋겠다.

붉다가 붉다가 검어진 흑매처럼 애간장 녹아내리는 기다림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덧없다 여겨 마음 깊숙이 쟁여 두었던 끄나풀 주르르 풀리는 이런 날, 활짝 웃던 그 미소 다시 보았으면 좋겠다. 홍매같이 화사한 연분홍 연서는 보낼 곳도 없는데, 춘심은 간들간들 잿불 같은 심사를 헤집어 놓는다. 귀밑머리 희끗해도 여전히 그리운 열아홉 첫사랑 춘자. 새빨간 볼우물로 앙다문 철심을 녹여내는 중년의 갈망 같은 흑매 한 송이, 뜰 앞에서 날 부르고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에도 없는 어느 곳에나 있는 백매는 마음속에 피었다. 길상암 어디냐고 비구에게 물었더니, 가리키는 손끝이 모호하다. 저기인가, 거기인가 돌아드는 숲길 끝에 있기나 한 것인가. 전설 속의 매화인가, 꿈에 만난 인연인가. 산중에 번지가 어디 있으랴. 중생의 미몽처럼 그 절집은 찾을 길 없다. 예라고 다르고 지금인들 다를까. 안다고 다 가진 것도 아니고 모른다고 다 잃은 것도 아닐지니. 언제나 소망하는 나만의 세상, 길상암 흰 매화 꿈에라도 보고 싶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 생사가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남사마을의 원정매도 피어나겠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원한 것은 없다’더니 죽은 둥치에서 다시 돋은 세 줄기가 그 말을 대신한다. 제 육신은 썩었으되 새 생명을 내었으니 이 또한 나쁘지 않으리. 과거를 바라보며 현재를 깨우쳐가는 인연, 오늘은 살아도 내일은 죽으리라. 만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몸으로 보여주는 고택의 원정매처럼 내 뿌리에서도 희망의 싹 하나 돋았으면 좋겠다.

듬성한 돌담 아래에 흐드러지던 그 매화는 아직도 피고 질까. 동무들 웃음소리 티 없이 날아오르던 고샅 모퉁이에서 여전히 얼굴 붉히고 있으려나. 이름 하나 얻지 못한 얼치기 꽃이지만 그에게는 삶이었고 나에게는 내일이었다. 어젯밤 꿈속에 아주 간 친구 보이더니 그 벗님네 울안에서 벙글던 꽃망울이 비를 타고 찾아온다. 옛 동무들이 그리워지는 오늘 같은 날, 특별하지도 잘나지도 않았던 우물가의 푸른 매화 새삼 그립다.

이 비 그칠 즈음, 봄을 든 매화 한 송이 발그레한 미소 머금고 창가에 서 있으면 더더욱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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