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룽나무 꽃 피던 날 / 유동희

 

 

창밖, 팥배나무가 움을 틔우고 있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내미는 싹을 보고 있자니 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시인인 그는 나무와 들꽃 사랑이 특별했는데 내가 사는 동네 뒷산에 귀룽나무가 많다고 했다. 사월 하순, 귀룽나무에 흰 꽃이 피면, 온 산에 하얀 뭉게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 후, 기대와 설렘을 품고 사월 하순이 되기를 기다렸다.

작년 이맘때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는 꼭 그 꽃을 보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봄이 아직 멀었는데도 시간만 나면 산으로 향했다. 이 나무일까? 저 나무일까. 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나무들은 내 맘과 달리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도드라진 행동을 하는 나무도 없었다. 그저 평온한 낯빛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잘났다고 뽐내며 얼굴을 내미는 인간세계와 사뭇 달랐다.

숨이 차면 양지바른 곳에서 자주 쉬곤 했다. 어느 날, 고른 숨을 내쉬며 앉아 있는데 눈앞에 맑은 햇빛을 알뜰하게 모으는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자세히 보니 새 부리처럼 뾰족한 연둣빛 잎이 조심조심 고개를 내미는 중이었다. 꽃이 피면 뭉게구름 같다는 귀룽나무를 만날 때가 가까워지는가 싶어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사월 하순 주말, 드디어 그 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을 거라는 시인이 보낸 메시지가 울렸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부드러운 날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산에 오래 머물 작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떡과 남편이 좋아하는 사과도 챙겼다. 산 입구에 다소곳이 서 있던 벚나무가 화사한 꽃잎을 날렸다.

발걸음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골프장 옆길로 향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오솔길이다. 편하게 오를 수 있는 널찍한 길이 근처에 있는데 내가 오솔길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그 길을 오를 때면 종종 등산객을 만나기 때문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길을 내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데도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한다. 그들과 주고받는 인사가 즐거워서다. 처음 보는 사이에도 눈빛에 담긴 따뜻함을 읽는다. 꽃향기보다 사람향기가 더 좋다는 생각을 그때 한다. 몇 사람을 마주치다 보면 어느새 운치 있는 숲에 이른다.

오솔길 끝에는 조그마한 계곡이 있다. 물소리가 숲에 사는 생명을 깨운다.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자고 했더니 남편이 ‘우린 천생연분인가 보다’라며 활짝 웃었다. 혼자 오는 날이면 늘 이곳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곤 한단다. 겨우 그게 천생연분이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햇살이 풍덩 풍덩, 자맥질하는 계곡을 바라보았다. 잔잔히 흐르는 물은 언제 보아도 한결같다. 바위나 지형의 모양을 거스르지도, 자신을 받쳐주는 존재의 형태를 망치지도 않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섞이고 흩어지면서 서로를 아우르는 모습이 평화롭다. 서로 잘났다고 고개를 쳐드는 인간세계와 다르다. 이제 육십 고개를 넘은 우리의 삶도 물처럼 저렇듯 유유히 흐른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발아래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건너편 숲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구름이 몽글거리는 곳에 눈동자가 멈췄다. 시인의 말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래 귀룽나무 꽃이 피면 뭉게구름 같다고 했지.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근처에 다다르자 맑은 향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푸른 잎들 사이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하얀 꽃이 만발하고 있는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인 작은 꽃들이 부끄럼 타는 어린아이 같았다. 일 년 내내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을 은은하고 싱그러운 향기에 저절로 눈이 감기고 코가 벌렁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자 나무가 낯이 익었다. 아니 이럴수가! 이른 봄날, 산을 오르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싹을 틔우면 그 나무가 아닌가.

초록빛 잎사귀 사이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꽃이 올망졸망 달려 방긋방긋 하얀 웃음을 피워내고 자분자분 향기를 맡고 온 벌들이 윙윙거린다. 꽃향기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눈을 감고 한참을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언제 왔는지 그가 돗자리를 펴면서 중얼거렸다.

“나 이 꽃 해마다 봤었는데…….”

남편은 무심한 사람이다. 해마다 귀룽나무에 핀 꽃을 보고도 무슨 꽃인지 알려고 하지 않은 남편의 무심함이라니.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이럴 때는 그가 낯설게 느껴진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내게 귀룽나무에 핀 꽃을 보여줄 생각조차 못 한 남편의 더딘 감각에 눈을 흘겼다.

“가까이 보니까 꽃이 예쁘네. 향기도 좋고…”

남편은 말끝을 흐리며 저만치 가서 맥없이 쑥만 뜯었다.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이상하게도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게 흘러나왔다. 아마도 말도 꽃향기에 빠진 모양이었다. 돗자리 위에 있던 간식을 남편에게 건넸다. 사과에서도 떡에서도 귀룽나무 꽃향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내 맘도 뭉근하게 풀어져 버렸다.

돌아오는 길, 그가 슬그머니 내 손에 귀룽나무 꽃가지를 쥐여 주고 도망치듯 앞서 걸어갔다. 꽃가지에서 하롱하롱 웃고 있는 꽃들이 그가 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뛰어가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참으로 부드러운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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