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필, 못다 쓴 편지 / 김주선

 

 

이보게 용식이.

한문 서체보다 한글이 서툴렀음에도 아버지는 매번 이름만 반복해서 써보고는 종이를 접곤 했다. 글씨 연습하는지 붓의 결을 테스트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모필에 먹물을 흥건하게 묻혀 쓰는 매끈한 글씨체도 아니고 뻣뻣한 갈필로 쓰는 비뚤비뚤한 글씨였다. 게다가 먹물도 잘 먹지 않는 붓인지라 글씨의 획은 각질이 생긴 발뒤꿈치처럼 트고 거칠었다.

 

삼십여 년 전 엄마의 거울처럼 맑은 달이 뜬 밤이었다. 제삿날에 지방紙榜을 쓰는 정갈한 자세로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먹을 갈았다. 지금으로 치면 캘리그라피였을까. 아니면 편지였을까. 윗목에 한지를 펼쳐놓고 ‘용식이’라 불리는 사내 이름을 큰 글씨로 흘려 써 놓고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또다시 불면이 찾아온 듯 여백에 댓잎을 치던 아버지는 음력 시월의 스산한 뒷마당으로 나가 둥근달을 올려다 보았다.

 

나이가 들자 아버지는 자식들 성화에 못 이겨 농사를 접고 붓을 잡고 살았다. 취미 삼아 쓰는 서예는 주로 획이 적은 초서체를 많이 썼지만, 그것도 고되고 재미가 없는 지 오래 못 가 관두었다. 유난히 칡넝쿨이 많아 ‘갈산말’이라 불리는 동네를 드나든 건 그 무렵이지 싶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지도에서도 지워진 지명이지만, 반듯하게 자란 칡뿌리와 줄기를 잘라 와 붓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생활용품인 갈목비, 싸리비, 수수비 같은 빗자루도 아니고 약용으로 쓰는 칡으로 붓을 만들다니, 그 깊은 속을 읽어낼 길이 없었다.

 

갈필葛筆은 칡뿌리나 줄기로 만든 붓이었다. 굵기에 따라 용도가 달랐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 망치로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을 달래듯 두드려 한 올 한 올 가닥이 곱게 찢어지도록 하는 제법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듣기로는 붓을 만드는 데 삼사 년생 어린 칡 줄기나 뿌리를 사용한다고 했다. 식물성 기름과 녹말을 뽑아내려면 소금물에 쪄 건조하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석 달 동안 이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진흙색의 칡 가닥이 잔털처럼 연해졌다. 그렇게 반 건조된 칡 줄기를 살살 달래듯 토닥여야 그나마 그림이건 글씨건 쓸 수 있는 붓이 되었다.

 

예전에는 비싼 모필 대용으로 칡을 끊어다 돌로 짓이겨 만들어 썼다고는 하나 지금이야 어디 그런가. 악필가도 명필이 되게 한다는 좋은 붓이 얼마나 많은데. 화방에는 매끄럽게 써지는 곱고 부드러운 털도 흔했지만, 굳이 거칠고 억센 식물 뿌리로 붓을 만드는 것일까. 내심 궁금했다. 시집간 막내 딸년이 ‘사네, 못 사네’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이 속상해 저러나 싶어 나는 눈치가 보였다. 마치 숫돌에 칼을 갈 듯 먹을 가는 아버지의 속이 벼루에 까맣게 녹아내렸다.

 

용식이란 분은 아버지의 오랜 벗이었다. 외할머니에게 듣기로는 자식놈 때문에 야반도주했다던가. 오죽하면 밤도망을 했겠냐고 갈고개의 칡넝쿨을 낫으로 걷어내던 일꾼들이 수군거렸다. 그 집에 장가 못 간 노총각 아들이 있었다. 아랫말에 공장이 들어서고 외지인들이 몰려와 마을의 빈집에 세를 얻곤 했다. 그때 이웃에 이사 온 아이 딸린 유부녀와 정분이 난 그 집 아들이 목을 매는 사건이 생겼다. 하필이면 억센 가시나무에 질기고 질긴 칡넝쿨로 올가미를 만들었냐며 자식을 잃은 그이의 아내마저 실성하자 그는 아내를 데리고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 소문은 또 얼마나 질기고 무성하게 자랐던지 강원도 원주의 어느 산자락에서 줄기차게 뻗어난 칡넝쿨이 병든 아내의 숨마저 조였다고 했다. 닥나무로 만든 한지 생산지로 유명한 고장이어서 닥나무 껍질을 벗겨 생계를 잇다가 그렇게 허망하게 아내를 보냈다고.

 

칡꽃을 ‘갈화’라고도 한다. 내가 칡꽃을 처음 본 것은 불혹이 넘어서였다. 등나무꽃처럼 보랏빛이 도는 자주색 꽃망울이 자수정처럼 알알이 박힌 참 곱고 예쁜 꽃이었다. 이리 향기로웠나 싶을 만치 그윽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텐데 한 번도 보질 못했다니 새삼 꽃말이 생경하게 가슴에 닿았다. 아버지의 막역지우莫逆之友였던 용식 씨, 꽃말처럼 그의 아들이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 짓는 ‘사랑의 한숨’ 때문이었나.

 

꽃을 찬란히 피우는 8월까지 사람들이 참고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한여름이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성하고 생장이 빨라 아무 나무나 기어 올라가 기어이 말려 죽이는 골칫덩이였기 때문이었다. 주변 나무를 죄다 감아버리고 숨통을 조였기에 서둘러 낫으로 제거해야 했으며 심하면 제초제까지 뿌려야 했다. 단단했던 소나무가 고주박이 될 정도로 넝쿨에 감겨 고사枯死하는 일이 잦았기에 그들의 무모한 사랑 또한 훼방하듯 사람들이 가만두질 않았던 거다.

원래 칡 줄기는 새끼 대용이었다. 질겨서 농가에서는 바구니나 광주리를 만들어 썼다. 묶는 끈으로 쓸 만큼 한 뿌리에서 나온 줄기는 10여m가 넘어 한 아름이나 되었다.

 

지난 7월에 부산에서 열리는 <꿈의 서화>라는 전시회에 다녀온 이가 사진을 보내왔다. 건설업을 하다가 서예에 매료된, 그것도 갈필만 고집하는 청암 이상록 선생의 작품이었다. 두 해 전에 열린 그의 개인전은 전무후무한 갈필전葛筆展이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한걸음에 달려가셨을 일이다. 이번 초대작은 나태주 시인의 <바로 말해요>란 시를 갈필로 써 내려간 한 폭의 한글 족자였다. ‘망설이지 말아요, 시간이 없어요, 사랑한다고 말해요, 보고 싶었다고 말해요, 그리웠다고 말해요.’ 시詩는 바로 말하라고 사랑 고백을 재촉했다.

 

모르는 사람은 글씨가 거칠고 유연하지 못해 매력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다. 갈필의 매력은 획이 거칠고 튼살처럼 갈라지고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먹물의 응집력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게 제대로 된 완성작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보게 용식이.

오래전 그날은 그의 넋을 기리는 기일이었다. 사무치게 그리운 이름을 종이 위에 나직이 불러놓고는 숨을 고르던 아버지의 붓끝이 가늘게 떨렸다. 흠뻑 제초제를 뿌려도 이듬해 다시 꽃을 피우는 칡을 잘라다가 소금물에 찌고 말리고 두드리고 다져서 쓰고자 했던 아버지의 편지는 무엇일까. 비록 여백일지라도 나는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친구의 마음을 칭칭 옭아맨 덩굴을 돌로 짓이겨서라도 풀어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손바닥에서 빨갛게 칡즙이 흘러내렸다. 문밖에서 바람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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