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작() (원고지 40)

 

 

        달무리 뜨는 바다 / 서운정 - 2024년 제17회 바다문학상 본상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마치 파도타기라도 하는 양 우리는 함께 출렁거렸다. 야트막한 산 밑,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앉은 마을을 지나자 어둠에 덮인 바다가 보였다. 끼룩대는 갈매기 울음이 철썩대는 파도 소리에 섞여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왔다. 창밖으로 커다란 달이 따라왔다. 산 너머로 숨었다 나타나는 달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야만 낯설고 불안해서 두렵기만 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를 따라 내린 곳은 조그마한 어촌이었다. 좁은 골목길 가로등 불빛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를 보고 개가 컹컹 짖었다. 양쪽으로 돌담이 이어진 곳에서 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숨을 몰아쉬었다가 다시 잡았다. 그리고는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성큼성큼 걸었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나보다 먼저 도착한 둥근달이 마당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 집에는 남자의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 남동생 둘이 있었다. 체구가 작고 숱 없는 머리를 쪽진 할머니는 은비녀를 꽂고 있었다. 웃을 때 하회탈처럼 자상해 보이는 할머니가 그의 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호되게 시켰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주름 없는 모시 적삼, 어깨를 타고 흐르는 선에서 꼿꼿했다던 성정을 짐작해 볼 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키가 크고 강인해 보였다. 꽃무늬 몸빼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강인한 얼굴이 꽃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몸빼바지처럼 어색했던 내가 그 집의 가족이 되었을 때, 내 나이 스물둘이었다. 코딱지만한 창문에 아직 어둠이 머물러 있는데 부억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항우장사도 못 이긴다는 눈꺼풀을 치켜뜨고 간신히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방으로 나가시면 자연스럽게 식구들 밥을 챙기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어머니는 방에서 일을 하다 썰물 때면 집으로 와 대충 밥을 드시고 쉴 새도 없이 다라이와 망, 바지락 잡는 호미를 챙겨 바다로 가셨다. 노을이 지면 물비린내 풍기는 바다를 한가득 머리에 이고 집에 오셨다.

어느 날은 갯벌에서 바지락을 잡고 또 어떤 날에는 바위에 붙은 굴을 따오셨다. 지충과 롯도 뜯어 와, 그 해초들을 처마 밑 콘크리트 바닥에 펴 널었다. 꾸들꾸들 잘 말리려고 이리저리 뒤집어 바람을 칠 때마다 물살에 너울대는 꿈을 꾸었던 해초들은 마당 가득 짭조름한 갯냄새를 불러왔다. 저녁에는 밤이 깊도록 바지락과 굴을 까셨다. 바람 부는 봄밤, 벚꽃이 다 떨어지지 않을까 뒤척일 때면 어머니가 계신 방에서는 쉼 없이 빈 껍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둠 속에서 천장을 응시하며 내일을 생각하는 내 머릿속으로, 한때는 단단하게 여물었던 나의 꿈도 맥없이 딸각딸각 떨어지는 것 같아 서글퍼졌다.

새벽에 일어나 식구들 밥 챙기고 설거지하고 돌아서면 또 점심때가 되고 저녁이 왔다. 그뿐인가, 신발 벗을 시간도 아깝다며 흙 묻은 장화를 신고 온 집안에 찍어 놓은 발자국을 닦는 일, 여기저기 묻어 있는 갯벌, 방안에 떠돌던 비리고 짠 냄새, 아무리 쓸고 닦아도 다음 날이면 또.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있는 해초처럼 나도 시들시들 물기 없이 말라갔다. 우울의 농도가 짙던 어느 날이었다. 뒷문으로 집을 빠져나와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었다. 식구 많은 집에서 북적대며 행복하게 살아갈 날을 꿈꿨던 상상은 두 손 가득 퍼 올린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듯 빠져나갔다. 검푸른 하늘을 나는 갈매기의 잿빛 울음이 가슴속의 슬픔을 콕콕 들쑤시며 서럽게 했다. 밀려드는 파도를 밀어내며 앉아있던 자리에서 막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려 할 때였다.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수평선 너머에서 붉은 달무리가 둥글게 퍼져 올라오고 있었다. 달무리 안에서 빠져나오려던 달의 몸부림은 붉은색인가 하면 분홍색으로 그러다 노란색과 어우러져 바다를 물들였다.

불현듯 현실 같지 않은 신비로움 앞에서 마법에 걸린 것처럼, 희망도 없고 허무 한 일이라 여겼던 일상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다가왔다. 거짓말처럼 가슴속에 훈훈한 온기가 차올랐다. 문득, 시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된 시집살이에 젖먹이를 업고 바다로 뛰어들려했다던 어머니는 이 바다를 얼마나 자주 찾으셨을까. 아들이 낯선 여자를 불쑥 데리고 와 같이 살겠다고 했을 때는 어땠을까. 풀인지 부추인지, 냉이인지 지칭개인지도 구별 못 하는, 희멀건 얼굴에 수숫대처럼 가느다란 몸집,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을 것이다.

무리를 벗어난 달이 조금 빠져나오더니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높이 솟아 오른 달의 빛이 바다로 내려와 헤엄쳐왔다. 앉아있던 모래언덕까지. 내 가슴까지 노랗게 차올랐다. 그때 "야야, 아가"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였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않으며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잔잔한 바다처럼 순탄한 날들이 있었는가 하면 거칠게 치솟는 파도로 삶이 흔들릴 때도 있었다. 그 물살의 흐름을 타고 나는 지금 이 집에 처음 올 때 보았던 시어머니 또래의 중년이 되었다. 하회탈처럼 웃던 할머니는 달나라에 계실까. 억세고 강인해 보이던 시어머니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오늘도 나는 식구들 밥을 챙기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다. 똑같은 날의 반복이지만 그게 인생이라는 것을,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닌, 주어진 오늘이란 길을 담담히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이 곧 인생이고 삶이라는 것을 할머니와 어머니의 바다 같은 삶에서 보았다. 저 멀리 주홍빛 노을에 물드는 바다를 바라보며 물결에 그려지는 달큰쌉쓰레한 내 인생의 경전을 읽는다. 지난날들이 그리워지는 이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보았던 그날처럼 달이 참 밝다.

 

심사평: 소재호 바다문학상운영위원장은 심사평에서 본상을 수상한 달무리 뜨는 바다는 근래 보기 드문 작품이다. ;로애락이 담긴 일상을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희뿌연 달무리 같은 모습으로 형상화한 점을 높이 평가 했다. 시적 발상과 소설적 픽션의 탁월함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수상 소감: 서운정 수필가는 많이 부족한 저에게는 풀 한 포기, 길가에 돌멩이 하나, 들판에 바람까지도 마음의 양분이었다제 글의 씨앗이 자라고 자라서 햇빛이 되고 비가 되어 가슴시린 사람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보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수상 소감을 말했다.

 

 

 이번 달 합평작으로 달무리 뜨는 바다가 올라왔다.

 잘 쓴 글을 보면 사실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이 글은 그러한 글이다.

 문학으로서의 수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미학성과 철학성이 담보되었을 때다. 그런 면에서 달무리 뜨는 바다는 문학성이 뛰어나다.

 대상을 형상화하는 데는 묘사와 설명으로 이루어지는데, 특히 묘사가 중요하다. 이 작품의 탁월한 묘사력은 감각적인 회화성과 시적인 서정성으로 인하여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조정래의 아리랑”, 최명희의 혼불이 떠올랐다.

 근래에 보았던 좋은 글 중의 하나다. 이와는 성격이나 분위기가 반대지만 재작년에 읽었던 좋은 글 한 편을 소개하겠다. 우리 싸이트에 있는 글이다.

 

 

                       [2021 한국경제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인테그랄'/ 유성은

 

남편과 나는 고집이 세고 까다롭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세 가지 공통점이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운명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만남을 더 그럴싸한 의미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편의점 가판대에서 색다른 과자봉지를 한 번쯤 집어 보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이었다.

그의 썰렁한 농담에 내가 박수를 치며 웃게 되었을 때, 차비를 아끼려고 늘 걸어서 다니던 그가 불현듯 저녁을 사겠노라 했을 때 우리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뜨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재채기만큼이나 숨겨지지 않았던 설렘, 상대의 의미 없는 행동에도 심장을 쓸어내렸던 떨림. 우리는 그것을 섣불리 사랑이라고 믿었다.

햄버거보다 찌개가 더 잘 어울리는 남자. 실은 햄버거를 더 좋아하는 남자. 가난이 자랑인 수학을 사랑하는 남자. 선지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난생처음 해장국의 물컹한 선지를 삼켰다. 그가 푸는 수학 문제의 증명이 어디서 틀렸는지를 몰라 괴로워할 때 내가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그의 계산을 처음부터 가만히 들어주었던 것처럼. 서로를 잃어버린 세상의 반쪽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고충도 숙명이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하얀 꽃길을 성큼성큼 걸어 나는 학생이었던 그에게 시집을 갔다. 스와로브스키 큐빅으로 장식된 은박 양가죽 구두를 신고서.

우리는 결혼이 서로를 위해 평생 싫어하는 음식을 먹어 치우는 것쯤이라 생각했다. 결혼 후, 우리는 위 세 가지 공통점 외에 미처 몰랐던 수천 가지의 다른 점을 발견했다. 서로 동전의 다른 면을 앞면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다른 답안을 끌어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2만 원 이하의 옷은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는 2만 원 이상의 옷을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가 해석기하학의 아버지인지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지를 두고도 치열하게 싸웠다. 그가 수식이 가득 적힌 두꺼운 책을 매일 읽으면서도 문학작품이라고는 종잇장처럼 얇은 시집조차 읽어본 적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당혹스러움. 사소하지만 지키고 싶었던 일상들이 무심하게 하고 짜버린 치약의 중간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화장실이 따로 떨어진 작은 방 하나. 그곳에서 우리는 신혼을 시작했다. 숨을 곳이 없는 작고 작은 공간. 짧은 시간에 서로의 너무 많은 것이 간파되었다. 작은 습관의 차이가 만드는 불편함에 대해 최대한 잔인하게, 가족까지 들먹거리며 서로를 괴롭혔다. 밤이 되어도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애인의 계몽을 위하여.

결혼 생활에 대해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서평과 비슷한 대답을 했다. 아주 많이 아프거나 믿는 도끼에 다리가 부러져도 괜찮을 정도의 결심이 아니라면 하지 말 것. 신혼은 남편과 나의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끝까지 읽겠노라 결심했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 덮어버리고 싶었던 책. 길고 난해한 프루스트의 문장처럼 어려운 글. 아마 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풀려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풀릴 수 없는 문제, 난제.

 

우리는 어느덧 결혼 십 년 차 부부가 되었다. 우리는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도는 동안 아홉 번의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또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학자인 남편은 저녁이면 낮 동안 풀리지 않았던 계산 때문에 울상을 짓는다. 내 책장에는 아직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편, ‘스완네 집 쪽으로가 숙제처럼 꽂혀 있다. 책등의 자국이 반도 접히지 않은 채. 삶의 작고 큰 문제와 갈등도 늘 우리 삶에 머물러 있다. 분명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달라진 것은 남편에게는 수식보다 더 사랑하는, 나에게는 어느 글보다 흥미진진한 두 딸이 생긴 것이다. 우리 둘 사이에 생긴 공통분모는 주기능이 아닌 기능들을 과감히 삭제하게 만들었다. 서로의 음식 취향은 사라졌고 식단은 아이들에게 맞추어져 버렸다. 새로 생긴 부모에 대한 반감은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무뎌져 버렸다. 아이가 태어나고 장만한 중고차는 점점 엔진의 힘이 약해져서 이제는 에어컨을 꺼야 언덕을 올라갈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조금 덜 열정적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화기에 대고 가볍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속삭이지 않을 진중함.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한 적당한 무관심. 어떤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무 눈을 오래 두지 말 것. 오래 씹을수록 좋은 문장은 부산하게 옮겨 적기보다는 마음속에서 깊이 우릴 것. 읽기 괴로울 때는 잠시 덮었다가 읽을 것. 그렇게 나는 프루스트의 책 대신 남편이라는 긴 책을 읽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인정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도 참기 힘든 나와 함께해주는 상대가 존경스럽다는 것을.

존경으로 바라보면 안 보이는 것들도 보인다. 갑갑하게만 보였던 그에게서 꼼꼼함이 보이고 느리게만 느껴졌던 그의 일처리에서 깔끔한 마무리를 느낀다. 시작은 잘하지만 마무리가 늘 흐지부지되는 나. 시작은 어렵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는 남편. 우리는 서로 내가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고 거들먹거리면서 서로의 불씨와 기름이 된다. 서로 기능은 달라도 힘을 모아 피운 불로 손을 녹이며 같은 집을 짓는 우리. 서로에게 영어사전 속의 인테그랄(integral)의 뜻처럼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사람은 모두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유의미한 것을 찾기 위해 살아간다. 처음 우리가 만나 함께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서로를 운명이라 믿었던 순간, 쉬이 진정되지 않았던 두근거림.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던 약속. 졸업과 동시에 고학력 실업자가 되어버린 한 수학자의 텅 빈 통장. ‘고동고동처음 들은 뱃속 아기의 심장소리. 낯선 도시, 낯선 사람, 낯선 상황. 지독했던 산후 우울증. 기다림 끝에 얻은 직장. 작지만 함께 이뤄낸 안락한 공간, 가족이라는 울타리. 많은 지표들은 삶 속에 다르게 적혀 각자의 그래프를 만든다.

수학에서 두 함수의 그래프가 둘러싼 영역의 면적을 구하는 법, 인테그랄 또는 적분. 인생이라는 한정된 구간에서 의 그래프가 만들어 낸 영역의 면적이 우리라는 인테그랄이다. 서로 다름이 의미 있는 면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태초에 창조주는 우리를 다른 한쪽의 기능은 아예 없는 부품으로 만들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액셀이라면 그는 브레이크 같아서 같이 밟으면 우리의 스텝은 엉킨다. 운전에도 조화가 필요해서 액셀만 밟고는 코너를 돌 수 없고 브레이크만 밟고는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기대했던 꽃길도 아니고 우리가 챔피언도 아니지만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가다보면 함께 세상이라는 트랙도 노련하게 달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오랜 후, 트랙의 마지막 코너를 돌고 나면 언젠가 맞이할 한 사람의 종착점. 순리의 시간. 먼저 떠날 상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면.

당신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어.”

잘 가.”

또 만나.”

어느 시구처럼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할 수 있다면. 그때는 지금은 감히 부르지 못하는 그 단어, 그 유의미한 값, 사랑으로 서로를 불러보기를 기대해 본다.()

 

 

 “달무리 뜨는 바다가 목가적이고 감성적이라면, “인테그랄은 도시적이고 지적이다. 전자가 클래식하다면 후자는 모던하다. 다른 말로 전자가 고풍스럽다면 후자는 현대적이다.

 두 작품을 보면서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취향)를 보았다. 내 글의 삼 할은 목가적이고 감성적이라면, 칠 할은 도시적이고 지적인 것 같다.

 “달무리 뜨는 바다가 문학의 본령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이 가지만, “인테그랄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나는 후자가 좋다. 그 새로운 아름다움이란 적분이란 수학 개념으로 인생을, 실존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면이다.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지만 내 취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편, 달무리 뜨는 바다를 읽고 의문이 생겼다. 이 작품은 소설의 일부분을 떼다 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필만의 특성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깊이 고민해야 할 숙제 같다.

 

 “제 글의 씨앗이 자라고 자라서 햇빛이 되고 비가 되어 가슴 시린 사람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보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서운정의 수상 소감으로 글을 마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