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따먹기 / 조이섭

 

 

한 끼 식사에 등장하는 그릇이 지나치게 단출하다. 단순한 것을 좋아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아내의 성격은 식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밥그릇, 국그릇에 반찬 두세 가지가 전부다. 혹 찜닭이 오르면 특식이고, 돼지고기 목살 한 근 끊어다 구워 올리면 그야말로 잔칫날이다. 아들 둘 다 솔가하여 떠난 후의 일상이다.

이렇게 소박한 밥상을 차리는 데도 언젠가부터 의자 네 개 딸린 낡은 엔틱 식탁이 꽉 찬 느낌이다. 벽에 붙여놓은 식탁 가장자리에서부터 반갑잖은 침입군이 가운데를 향해 야금야금 진격하고 있어서다. 침입군의 정체는 바로 갖가지 약통과 약봉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올망졸망 달리고 덩치가 산 만큼 커질 때까지는 끼니때마다 식탁이 가득했다. 동그랗고 네모난 그릇, 나뭇잎 꽃잎 모양의 그릇에 아이들 좋아하는 음식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이 떠나고부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점점 줄어드는 반찬과 반비례해서 약통의 가짓수가 시나브로 늘어나더니 식탁의 오 분의 일 가까이 차지한 지 오래다. 종이통, 플라스틱 통을 비롯하여 약국에서 줄줄이 엮은 비닐봉지가 즐비하다.

영양제 몇 개로 상륙한 침입군은 마침내 2개 중대를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1중대는 아내 약, 2중대는 내 약이다. 아내의 중대는 골다공증 치료제, 칼슘 보충제, 위장약, 관절염약, 진해거담제 소대로 편성되어 있고, 2중대는 고지혈증, 콜레스테롤, 고혈압, 당뇨를 방어하기 위한 소대이다.

침입군은 식탁 위에서 전투를 벌이는 한편으로, 후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미사일을 발사한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감기, 독감, 몸살 등 다양한 공격을 퍼붓는다. 가엾은 노병은 자체 면역력으로 물리치지 못하고 주사나 링거의 도움을 받기 일쑤다. 그때마다 병원 처방전에 적힌 약을 전진 배치하는 바람에 또다시 영토를 내어주고 만다. 근년에는 난생처음 보는 코로나라는 특수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했다.

식탁 위에 한번 자리 잡은 침입군은 좀처럼 물러나는 법이 없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감춰둔 가정상비군이 따로 있다. 거실 장식장 밑 서랍에 포진한 비밀 무기고에는 파스, 범용 감기약, 지사제, 안약, 상처 난 데 바르는 연고를 비롯한 반창고와 붕대가 몸을 감추고 있다. 체온계, 체중계, 혈압계, 혈당측정기, 산소포화도 측정기로 편성된 평화유지군 기계화 부대는 전황을 기록하고 중재한다.

녀석들을 물리치려고 아침저녁으로 한 번에 먹는 약이 한 주먹이다. 영양제와 비타민제에다 보양식까지 상륙시켜 고토 회복을 꾀하지만, 그 또한 언 발에 오줌을 누기인지라 하는 수 없이 적과 불편한 동거 중이다. 하지만 침입군은 언제 휴전을 파기하고,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창칼을 불쑥 내밀지 알 수 없다.

그나마 침입군의 공격에 엄정하게 대치한 덕분에 우리 부부는 곳곳에 상처와 흉터투성이이다. 앞으로도 이기는 전투보다 지는 싸움이 잦겠지만, 슬퍼하거나 애달파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아직 백기 투항할 때는 아니라고 도리질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식탁 위에서 벌어지는 약과의 전투는 어릴 적 배꼽마당에서 동무들과 놀았던 땅따먹기 놀이와 다를 바 없다. 땅따먹기는 평평한 땅에 각자의 말(손톱만 한 납작한 돌)을 정한 횟수만큼 튕겨, 돌이 지나간 자리를 금으로 그어 자기 영역으로 돌아오면 땅을 확보한다. 한 번에 제 뼘보다 짧게 튕겨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수많은 땅따먹기 놀이로 이어진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땅따먹기 놀이는 한 번에 튕기는 거리를 한 뼘으로 제한하는 간단한 규칙을 두어 아이들의 지나친 욕심을 경계했다. 놀이가 끝나면 승패는 차치하고, 동무들과 두 손을 맞잡고 깔깔거렸다.

세상의 땅따먹기는 그런 규칙이 없다. 제각각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상대방의 땅을 빼앗으려는 아수라의 장이었다. 나도 거기에 휩쓸려 따먹기도 하고 때로 따먹힌 적도 있었다. 상대와 크고 작은 다툼을 벌였지만, 그게 내 안의 나였던 적도 많았다. 내가 세운 목표가 오히려 나를 향해 달려들기도 했다. 배꼽마당의 재미난 놀이로 출발한 땅따먹기가 일상의 피 튀기는 전투를 거쳐, 결국 반의반 평도 안 되는 식탁 위에서 마무리되는가 싶어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작전상 후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식탁 위의 전장을 언제 침략군에게 내주고 병원이나 요양원으로 싸움터를 옮길지 모른다. 적군의 규모가 중대에서 대대, 연대에서 사단으로 늘어나고 마약성 진통제라는 최후의 무기까지 들이대면 이번 생에 허락된 나의 땅따먹기 놀이가 모두 끝날 것이다. 그 옛날 엄마가 배꼽마당을 향해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치면, 두말없이 손을 털고 후다닥 뛰어갔던 것처럼.

오전에 정기 검진을 다녀왔다. 처방받은 우북수북한 약봉지를 정리한다. 새로운 침입군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밥이 곧 몸을 보하는 약이라 했으니, 식탁 위에서 밥이나 약을 구차하게 나누는 짓도 딴은 헛일일 테다. 애당초 땅따먹기는 싸움이 아니라 놀이였으니 삶의 여적餘滴을 약봉지 따위와 아웅다웅하는 데 모두 소진해서야 되겠는가.

내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나는 것이 어디 식탁뿐이랴. 누가 한 뼘 달라면 한 뼘 내어주고, 두 발 다가오면 그만큼 물러서면 그만이다. 오다가다 치매란 녀석을 만나, 때맞춰 밥 먹고 약 먹는 것만큼은 까먹지 말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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