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과 거울 / 박숙자

그동안 몇 번을 스쳤다. 처음에는 눈인사조차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모른 척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산다는 말을 실감한다. 마주치는 눈길에서 정이 묻어난다. 그들이 ‘때와 약’이란 단어로 말문을 연다. 때를 벗기는 약인가?

​

상상을 깨고 ‘때와 약’은 두 남자의 이름이었다. ‘때 벗기는 약’이라 유머를 얹어 입력했다. ‘때와 약’은 태국의 어느 골프장에서 잔디를 관리하는 노동자다. 대형 기계가 깎지 못하는 구석진 곳이나 비탈진 곳에 일손을 보탠다. 2인 1조로 부부처럼 일하다 보니 깡마른 ‘때’와, 살집이 좋은 ‘약’은 남인데도 닮아 보인다.

​

3모작이 가능하고, 먹거리가 나름 해결되는 나라다. 게으름을 부려도 굳이 탓하지 않는데, 그들은 부지런하다. 아버지요 가장인 ‘때와 약’은 이글거리는 땡볕에서 좀 더 나은 생활과 자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땀을 흘린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남의 호주머니 돈을 내 호주머니에 바꿔 넣는 것은 고도의 생존경쟁이자 고난도 작업이다. 보상을 받기 위해 액면가 이상의 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은 근로자의 수칙이다. 직업에 호, 불호 감정이 개입될 수 없다. 취미에 맞는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삶의 무게는 만만치 않고, 누구에게나 무겁고 버겁다. 세상에는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

그런데도 ‘때와 약’의 모습이 인상적인 것은 현실에 순응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일하는 자세였다.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단순 행위임에도 그들은 거르거나 조급해하거나 미루지 않는다. 내일이라고 달라질 리 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다. 바람만 불어도 눕는다는 풀이 사람의 진을 뺀다. 일을 멍에라기보다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일터를 지킨다는 느낌을 받았다. 맡은 일을 성실히, 묵묵히 임하는 태도는 배움의 유무를 떠나 신뢰감을 준다.

​

아기를 안은 ‘때’의 딸이 나타나면 점심시간이다. ‘때와 약’이 예초기를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 두어 평의 원두막이다. 한 치 넓이로 쪼갠 대나무를 바닥에 깔아 그 냉감으로 더위를 식히는 곳, 숨결이 코끝에 닿을 것 같은 원두막의 런치타임은 즐겁다. ‘때와 약’은 약속이나 한 듯 다리를 뻗으며 홀가분함을 만끽한다. 울퉁불퉁한 ‘때’의 손이 아기의 입을 더듬으면 먹겠다고 어린 것이 입을 쩍 벌린다. 이런 손자를 보며 ‘때와 약’은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

굵은 나무의 가지 사이를 뚫은 바람은 커다란 부채가 되어 피로를 풀어준다. 살랑대는 바람의 꼬리에 ‘약’의 파이프 담배 연기가 실린다. ‘때’는 얽어맨 해먹에서 단잠에 빠진다. 평화롭다. 원두막은 그들의 천국이다.

​

‘때와 약’을 알게 된 시간은 길지 않다. 잠시 머물다 가는 외국인에게 그들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심한 치통으로 고생하는 ‘때’에게 진통제를 나누어 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손짓으로 이야기하다 보니 사람의 마음은 같았다. 그러면서 허물을 덮고, 배려하며 동행하는 그들의 동지애를 보았다. 마치 한 쌍의 젓가락처럼.

​

‘때와 약’을 보며 여유와 멈춤을 떠 올렸다. 그들은 나를 비춘 거울이었다. 거울 속에는 욕심 가득한 노파가 찡그리고 있다. 예쁘지 않다. 허기를 채운다고 잔뜩 움켜쥔 주먹이 아프다. 그림자로 붙어서 털어내지 못한 부끄러움이 많다. 불만의 시간과 부족함의 연속이었다. 안주安住를 거부하고 발전을 꾀한다고 자위하지만, 그건 위선이고 과도한 욕심이었다. 주위를 불편하게 하고, 금방 터질 풍선처럼 팽창된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분수分數를 알고, 족足할 줄 알고, 그만하면 됐는데, 늘 허덕였다. 채워지지 않는 정서적 궁핍은 수시로 나를 괴롭혔다. 이제 털어내고 새로운 시작이다.

​

여름이 시작되면 나는 이곳을 떠난다. 내게 거울로 자리매김한 친구, 그들과 헤어진다. 젓가락은 두 짝일 때, 거울은 누군가를 비춰 줄 때가 가장 멋지고 생명력이 있다. 부디 지금처럼 두 사람, 잘 지내라고 응원한다.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때’의 건강이 조심스럽지만 인명은 재천이니 걱정은 뚝이다. 건강하자. 어디에 있든 우린 친구니까. 모두의 행운을 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