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의 밤이 깊어간다. 실루엣만 남은 팽나무를 바람이 흔들고 지날 때마다 혹여 어느 영혼이 그 바람에 동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기일도 이쯤이었을까.
조상 기일을 맞아 시댁 일가가 있는 그 마을에 처엄 간 것도 섣달그믐 무렵이었다. 커다란 팽나무가 손님을 맞는 아담한 집이었다. 새댁에겐 제사상 차림이 궁금했다. 친정과 크게 다를 것 없었으나, 상 밑 구석진 자리에 놓인 또 하나의 잿밥이 낯설었다. 소쿠리에 담긴 그것은 한눈에도 초라하고 떳떳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영을 위한 것인지 왜 거기에 놓여 있는지 궁금했으나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그 동네에 제사가 한두 집이 아니라는 말만 들었다. 오랜 훗날에야 사건이 있을 때 생을 다한 열여섯 살 고모, 그분의 몫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도 덜도 아닌 한마디로 진실을 덮었다.
"속솜허라. 알아도 속솜! 몰라도 속솜!(쉿. 알아도 입조심! 몰라도 입조심!)."
억울함이 목 끝까지 차오른 이들에게 그것은 주문이자 형벌이었다! 열댓 집에서 동시에 소리 없는 곡소리가 가슴을 치고 올라와도 '속솜'이라는 형틀에 갇혀 그 무엇도 말하지 못했다.
아무 죄 없는 열여섯 당신이 검속을 피해 어린 조카를 안고 컴컴한 헛간으로 숨어들 때, 당신이 간절히 바라던 기도 역시 '속솜'이었을 것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새어나가는 순간, 아기의 생명도 열여섯 당신의 세계도 멈출 거라는 걸 예감했기에. 결국 예감은 비정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헛나간 말이 죽음을 부르는 섬. 물어보는 것조차 불경이던 시절은 길었다.
"어디 강 아는 척 입 촉도 하지 말라. 속솜 하는 것이 제일이여(어디 가서 아는 척 입도 달싹 하지 마라.조용히 있는 게 제일이여)."
옳든 그르든 나서서 따지지 말라는, 이해가 닿지 않는 말을 어머니에게서 지겹게 들었다. 그건 침묵의 대물림이었다.
말을 아끼던 어머니가 아흔이 넘어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해안가 유복한 집 4남 1녀 고명딸로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 빼고는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일본에서 자리를 잡은 세 오라비가 올 때마다 누이 옷감으로 귀한 비단을 챙겨왔다. 그 따뜻한 기억 속에 차마 말할 수 없던 죄의식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밤 중에 폭도들이 내려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우면 그들을 쫓는 총소리가 탕! 탕! 마을을 울렸저. 평생 턱에 수건을 두르고 살았던 '무명천 할머니'* 늬도 알주? 경찰 총에 맞아 그렇게 된 거 아니가. 서북 청년단도 마을에 왔는데 하이고 그들은 울담도 지붕도 휙! 휙! 날 듯 넘어 댕겨라. 선선하기가*... 마을에 청년회가 생기고 청년들은 다 거기에 이름을 올렸저. 허켜 말켜가 어디시니? 허랜 허면 해야 되는 세상이었주. 낮엔 대나무를 베어다 죽창을 만들고 밤엔 번을 정해 담 밑에 숨어 보초를 서고.
하루는 경찰과 협동하여 중산간 마을에 검속을 나가지 안 해시냐. 짝을 이루어 초가를 수색하고 돌아서는데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라. 뒤뜰 대숲에서 나는 것 같아 들어가 보니 내 또래 여작 갓난쟁이를 안고 겁에 질린 눈으로 벌벌 떨고 이서라. 경찰차가 그들을 태워 갔는데 그 후 소식은 듣지 못했저. 그 여자는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왔을 테주마는 아긴 어떵해사 신디... 아기 낳고 키워 보난 그 일로 가슴이 울큰하여질*때가 이신다. 시절이 시킨 일이라 아무 말도 못 허고 살았주마는.
그 얘기를 듣던 날, 어머니가 몹시 낯설었다.
내가 청춘 소설을 읽으며 분홍빛 미래를 꿈꾸던 평온한 열여섯이 누군가에게는 숨죽여 아기의 입을 막아야 했던 열여섯이고, 나의 어머니에겐 죽창을 만들어 보초를 서고 또 누군가의 어머니를, 누군가의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던 열여섯이다. 죄를 묻는다면 죄인이 아닐 사람이 없던, 너도나도 '속솜'할 수밖에 없던, 그 세월이 흐르고 흘러 지금에 이른 것을.
열여섯 고모의 목숨값이 통장에 찍힌 건 최근의 일이다. 남편이 혈족이라는 이유였다. 가족의 수대로 조각조각 나뉜 목숨의 무게. 그 메마른 금액이 가슴을 서늘케 했다.
4.3 평화공원으로 향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과 낮게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인적 없는 공허를 채우고 있었다. 수만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으며, 그리고 내 어머니를 기억하는 그 누군가를 기억하며, 그 시절 억울하게 스러져간 목숨을 헤아리며, 내가 누려온 모든 평화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섬은 '속솜'하지 않는다. 해묵은 침묵을 깨고 해원을 기원한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당신의 멈취버린 열여섯을 나의 살아있는 오늘에 불러들여 기억하느 것, 이제 당신의 이름을 주저함 없이 불러보는 것. 다만, 그뿐.
*무명천 할머니: 4.3 사건 당시 총상으로 인해 턱이 사라진 채로 평생을 살았다.
*선선허다: 간담이 서늘하다.
*을큰허다: 가슴이 크게 아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