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이와 밀당 / 송유창
아침이면 산행 가는 윗동네에 우측 앞발이 장애인 흰 진돗개와 아키타견이 있다. 아키타견의 이름을 몰라 나는 그를 ‘딸랑이’라 부른다. 동네 온갖 쓰레기를 천방지축으로 물고 오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매를 맞고부터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신의도 우정도 다 닳아 없어진 세상에서 그래도 나를 따르는 그를 생각을 하면 아침이 기다려진다.
지난해 봄 아침, 산길을 오르는데 주먹만 한 갈색 강아지가 방울 굴러오듯 달려왔다. 어릴 때 집에 키우던 백구 생각이 나서 귀엽기가 더했다. 장애 진돗개가 덜 외롭도록 아키타견을 입양한 것 같았다. 그날부터 겨우 걷는 걸음으로 이상하게 산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어미가 그리워서 나를 따랐을까. 그저 남의 집 강아지라는 생각에 나는 관심이 없었다. 지나는 사람에게 달려들어 놀라게 할 때마다 주인처럼 옆에 서 있던 나는 난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만 따르기를 바랬던 속 좁은 인간같이 아무나 좋아하는 딸랑이가 미울 때도 있었다.
진도는 어릴 때 세 발로 잘 걸었지만, 몸무게가 늘어 걷기 힘들자 지나는 사람이나 딸랑이만 보고만 있다. 순간도 쉬지 않고 딸랑이가 치대어도 진도는 어미처럼 딸랑이를 받아주기만 한다. 그러나 내가 진도를 조금 쓰다듬기라도 하면 딸랑이는 영락없이 틈새를 갈라친다. 사랑을 나누어 갖지 않으려는 동물적 본능 때문인가 보다.
아침마다 딸랑이는 산행길 전·후와 좌·우를 오가며 보디가드 역할을 잘도 한다. 50∼100m를 앞질러 가다가, 모퉁이를 지날 때만은 고개를 빼꼼히 돌려 살펴보다 내 눈이 마주쳐야 앞으로 간다. 길옆의 궁금한 곳은 탐색하지 않고는 그냥 가는 일이 없다. 좌·우측 풀섶을 뒤져 범 메뚜기와 개구리를 껑충 뛰어 앞발로 눌러 잡거나, 먹이가 부족해 내려온 꿩이 숨은 풀더미를 날렵하게 덮치기도 한다.
동네 앞 겨울 논에 벼 이삭을 주워 먹으러 온 들쥐를 수시로 잡는다. 진달래 피고, 산 비둘기 울고, 도토리 떨어지는 길을 뒤처져 오다가도, 어느새 앞으로 내달리는 모습은 나를 보호하는 경호원 같다. 그러다 지나는 길손이 위협이라도 하면 발밑에서 꼬리를 감추고 내 얼굴만 쳐다보는 순한 놈이다.
처음 내 집에 왔을 때는 자기 집을 못 찾을 것 같아 차로 태워 집까지 데려주기도 했다. 주인집 앞에서 그만 따라오게 하려고 몇 번이나 집 쪽으로 쫓았다. 그 후로 주인집 앞을 지날 때는 뛰어서 달아난다. 이젠 내 집에 와서 세컨하우스가 아닌 자신의 집처럼 베란다에 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산행을 같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주인 아주머니가 딸랑이뿐만 아니라 나까지 미워할 것 같아 하루는 찾아갔다. 안 보이면 우리 집에 와있다는 말을 전하고, 어떤 사료를 좋아하나 묻자 절대 먹이를 주면 안 된다고 했다. 아예 내 집에 머물까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나를 따르는 딸랑이를 시샘해서인지.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딸랑이는 더 혼이 나는 듯했다.
그럴수록 나를 더 따르게 하는 일인 줄 모르고, 아주머니는 눈에 나는 딸랑이를 수시로 구박하곤 했다. 사랑을 인식하는 후각이 따로 있는지 그래서 나를 더 따르고 있다. 이제 축담 밑에 누워 내가 어딜 가나, 무엇을 하려는지 감시 아닌 감시를 하고 있다. 그래도 사람보다 더 신뢰를 주고, 정을 주는 그를 보는 일이 이제 싫지 않다.
외출하려 차를 타려면 먼저 차 옆에 서 있다. 창문을 내리고 “집으로 들어가” 몇 번 소리치고는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속도가 늦으면 신작로를 거쳐 면사무소까지 죽자 살자 따라온다. 매번 그를 두고 가는 일이 집에 아기 두고 나서는 엄마 같다. 인생이란 이별을 연습하며 산다지만, 기대하지 않은 인연으로 시작된 딸랑이와 순간의 헤어짐도 이렇게 가슴 아플 줄이야.
돌아와 와 보면 기다리지 않고 주인집에 갔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큰 소리로 “딸랑아” 하고 불러본다. 가도 그렇고, 있어도 그렇고 헤어짐의 아픔은 면역이 없다. 동네 주변에 식사하러 갈 때는 차(RV) 뒤 트렁크에 태워 가기도 한다. 뚫린 공간으로 눈을 맞추며 가지만, 음식점에 가서도 풀어줄 수 없어 가능한 두고 갈 수밖에 없다.
며칠 전 딸랑이가 왼쪽 뒷발을 절며 풀이 죽어 집에 왔다. 혹시 가시가 박혔나 하고 발목을 잡고 몇 번 살펴봐도 내 눈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아픔을 치료해 주어야 하나 하고 휴일 밤을 걱정하며 보냈다. 일어나 보니 밤에 주인집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그 집 앞을 걷는 데 나를 보고 절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대로 집에 있으라 야단을 쳐도, 눈치를 보며 꾸역꾸역 뒤를 따라나섰다.
인생의 내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던가. 아침마다 앞쪽에서 무지향성으로 뛰며 설치던 놈이, 그날은 내가 앞서고 그가 뒤에서 절뚝이며 따라왔다. 성하지 않은 발로 걷는 저놈과 내가 왜 이 시간에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앞섬이 영원히 앞섬이 아니고, 어제가 오늘과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는가 보다. 언제까지 이 동행도 가능할지 걸으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아침이다.
딸랑이와 처음 만날 때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나의 상처가 민감한 때여서 둘 사이 벽이 빨리 허물어진 것 같다. 얼마 전 고향에서 제법 출세했다는 친구가 서울 사무실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왔다. 명문대학을 나오고 L그룹의 주요 업무 책임이사를 두루 거친 친구였다. 퇴사 후에 리사이클링 사업을 하다, 좀 큰 사업을 한다며 경기도 화성에 쓰레기 매립단지 조성 사업권을 따냈다며 자랑했다. 확실한 사업이라며 공직을 마감했지만 서울에 집도 없이 전세로 사는 내 모습이 안쓰럽다며, 사업 단지가 정리되면 바로 매각해서 집사는 자금을 마련하라며 투자를 권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친구의 말을 믿고 시골 논밭을 담보로 큰돈을 마련해 보냈다. 3년이 지나도 사업의 진전이 없고, 이자 내기 버거워 소식을 물을 때마다 민원만 해결되면 곧 추진된다는 이야기로 일관했다. 알고 보니 3년 뒤에 민원 문제로 취소된 사업인데, 7년을 넘게 거짓말을 하다 가족과 친구를 배신하는 행동을 했다. 장례를 치룬 몇 개월 후 동업한 친구에게 돈을 보낸 ‘거래내역 확인증’과 ‘사업 용역계약서’ 등을 복사하여, 부인과 딸을 만나 설득 한번 해보라 부탁했다.
집이 두 채나 있다는 소문과 달리 남편과 아버지의 상속을 모두 포기했다며 법적 해결 절차를 밟겠다고 했다. 아버지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호소했는데, 딸이 ‘앞으로 메시지에 응답조차 할 의무조차 없다’는 마지막 문자를 보내왔다. 아버지의 일이지만 최소한 무슨 노력이라도 해보겠다는 그 말 한마디 듣고 싶었던 나는, 또 한 번의 배신을 감당해야 했다.
사람을 믿는 일이 이렇게 큰 상처가 될 줄 몰랐다. 어떤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족에게조차 말 못 하는 나는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죽음을 선택한 친구에게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산 사람이 받는 경제적 고통은 기본 인간 노릇조차 하기 힘들게 한다.
연금 받으며 편안하게 산다는 사람들의 말과 다르게, 매월 갚는 담보 이자가 연금액을 넘으니 할 말 잃을 때가 자주다. 돈을 빌려주는 일이 ‘사람 잃고 재물도 잃는다’는 옛말이 조금도 틀림없다. 많이 배워서 교묘하게 머리 돌리는 사람보다,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맴도는 딸랑이 없었다면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쓰레기를 마당에 물어놓는 딸랑이는 내가 하는 일마다 코밑에서 앞발과 입으로 나와 밀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린 서로 절제되고 제한된 공간에 머물고 있다. 집 안에 들이지 않으니 내 사생활이 침해받지 않고, 내가 주는 먹이보다 주인집 사료를 좋아하니 내게 소속되지 않는 삶을 누리고 있다.
도회지 같으면 묶여 지낼 크기인데도 어떤 구속도 없이 위·아랫동네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서로 무소유의 벗이 되어 상처받은 나와 현재와 미래를 공유해 가고 있다. 유기견이 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나를 따르고, 사람을 믿지 않으려는 나 또한 그에게만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