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들의 시간 / 이복희
하루의 발들이 엉성하게 앉아 있다. 갈 곳보다 가야 할 곳이 많은 발이다. 어제를 딛고 오늘을 살아가는 발걸음들, 신발은 벗겨지고 새끼발톱이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 신발로 갈아타도 도착지는 온 것보다 더 멀어진다.
마천행 5호선, 오가는 발들이 분주하다. 섰거나 앉거나 눈 맞춤은 금기사항, 마주 보고 앉아도 시선은 휴대폰 속으로 밀어 넣는다. 발부터 먼저 올라타는 무리 속에서 나팔 청바지 여자가 두 남자 사이 좁은 자리를 잽싸게 낚아챈다. 달달 떨고 있는 다리와 쩍 벌린 다리 틈에서 꽈 올린 나팔바지 다리가 중립을 지키느라 안절부절못한다. 발 디딜 곳은 점점 좁아지고, 나팔바지는 까치발로 다시 고쳐 앉는다.
수십 년 전 일이 되새김된다. 더는 들어설 곳도 없는데, 만원 버스 안내양은 양손으로 문짝을 잡고 온몸으로 발들을 밀어 넣었다. 치약까지 써가면서 빨았던 하얀 운동화에 여러 개의 발 도장이 찍혀버렸다. 뒤에 선 프로스펙스 남학생이 버스가 흔들리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몸을 밀착해왔다. 몸 돌릴 틈도 없는 공간에서 가방을 사이에 끼워도 프로스펙스는 끈질기게 비벼댔다. 학교 두 정거장 앞두고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교복에 번진 허연 자국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계속 따라다녔다. 그 뒤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 서면 주변을 먼저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정차역마다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많아졌다. 발과 발이 엉킨 사이로 검은 구두 한 켤레가 유난히 단정하다. 광이 나는 앞코가 오늘의 비즈니스를 말해준다. 그 옆 운동화는 마치 오늘 하루쯤은 대충 흘려보내겠다는 듯 끈이 느슨하게 풀려 있다. 슬리퍼를 끄는 발은 어딘가로 급히 달려갈 것처럼 숨이 가쁘다. 굽 높은 뾰족구두는 발등을 세우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고, 낡은 안전화는 바닥의 무게를 그대로 끌어안고 있다. 서로의 사정을 묻지 않는 발들이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다.
지하철이 급정거하자, 발들이 일제히 긴장한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던 뾰족구두가 안전화의 발등을 스친다. 사과도 변명도 없는 짧은 접촉이 안내 방송에 묻힌다. 한 무리의 발들이 출입문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 사이를 헤치며 절뚝거리는 발이 전단을 돌리며 비집고 들어온다. 바닥에 붙어 있던 발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옆자리를 건너뛴 전단이 내 무릎 위에 손수건처럼 내려앉는다. 여러 번 접힌 자국이 눈앞에서 한 번 더 접힌다.
눈을 감고 자는 척하는 사람, 휴대폰 속으로 파고드는 사람, 전단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몸들이 발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나는 들썩이는 몸을 겨우 눌러앉히고 출입문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발걸음이 주춤거린다. 앞사람의 운동화 뒤축이 뒷사람의 구두에 밟힌다. 아직 내릴 역도 아닌데, 운동화 한 짝이 출입문 앞에 먼저 나가 있다. 죄송하다는 말만 공중을 떠돈다. 맞은편 의자 위 전단이 또 한 번 접힌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발들이 터진 콩자루처럼 쏟아진다.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발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구두는 발뒤꿈치를 밀어 올려 걸음을 재촉하고, 운동화는 사람들 틈에서 방향을 바꾼다. 횡단보도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누군가는 더 빨라지고 누군가는 더 느려진다. 같은 신호를 건너면서도 서로 다른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신호등 앞에서 발을 내려다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망설일 때는 발이 먼저 앞서야 했다.
접히고 펴지기를 반복한 하루의 발들이 잠시 멈춰 서 있다. 신호등 불빛이 발등 위로 번진다. 아직 건너지 않았는데, 몇 개의 발은 이미 앞으로 나가 있다. 그 발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나는 끝내 알지 못한 채 한 걸음을 늦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