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下手) / 강여울
"집에도 엄마 안 있나? 차 좀 태워 줘. 동사무소까지 나 좀 태워줘."할머니는 이래도 안 태워주나 보자는 듯이 내 차에 한 손을 짚고 서서 차를 태워 달라고 졸랐다. 곧장 가도 봉사가 약속된 장소까지 갈 시간이 빠듯하다. 그래도 물러설 기미가 전혀 없는 할머니의 기세에 하는 수 없이 차 문을 열었다. 빨리 모셔다 드리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참으로 느리게 천천히 겨우 차에 올랐다. 애가 탔다. 할머니의 노모차를 접어서 차 트렁크를 열었다. 실으려고 보니 짐이 많아 들어가지 않았다. 입에서 “늦어서 큰일이네.”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뒷좌석 할머니가 앉은 반대쪽 차문을 열어 노모차를 실었다.
동사무소까지 가는 동안 할머니께 말 한마디 붙일 여유가 없었다. 네비게이션 액정 화면의 시간만 몇 번이나 확인하는 사이 행정복지센터에 도착했다. 곧장 내려 노모차를 펴 할머니 앞에 잡을 수 있게 놨다. 뒤따라 온 택시에서 내린 승객이 앞질러 동사무소로 들어갔다. 출발해야 할 택시가 내 차 때문에 못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나 내 맘은 알 바 아니라는 듯 할머니는 참으로 느리게 아주 천천히 힘겹게 겨우 차에서 내렸다. 속이 탔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약속한 시간에 봉사를 했다. 그제야 할머니께 좀 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 후회가 밀려왔다. 기왕 태워줄 거면 말이라도 상냥하게 할 걸 싶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네비게이션이 보편화되기 전의 일이다. 청도에 유명하다는 추어탕 맛집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터널도 생기기 전이라 팔조령을 넘어 인적 드문 도로에서였다. 갈림길을 앞에 두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몰라 살피고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길을 묻기 위해 차창을 내렸다.
할머니는 먼저 당신이 가는 방향이니 일단 차부터 태워달라고 했다. 뒷좌석에 보따리를 옆에 놓고 앉은 할머니는 팔로 이쪽저쪽을 가리키며 한참을 달리게 했다. 그러다 작은 마을 입구에서 내려달라며 차를 세우게 했다. 남편이 짐을 내려주며 다시 우리의 목적지로 가는 길을 물었다. "길 따라 앞으로 쭉 가다가 사람 보이면 물어보소. 입이 서울 아닌가?" 할머니의 대답에 우리 부부는 박장대소했다. 우리는 꼼짝없이 할머니의 개인 기사가 된 꼴이었지만 한참 그것도 두고두고 “입이 서울 아닌가?” 하며 웃었으니 차비는 충분히 받은 셈이다.
"집에도 엄마 안 있나?"며 바로 양심을 쿡 찔렀던 오늘의 할머니도 그랬다. 내 차를 타겠다고 맘먹은 할머니는 차를 잡고 서서 '이래도 그냥 갈래?'하는 무언의 압박으로 내가 거부할 수 없게 했다. 조금만 여유 있게 집에서 나왔다면 난 분명 친절하고 기분 좋게 할머니의 청을 들어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빴기에 솔직히 거절하고 싶었다. 할머니의 목적은 나의 친절이 아니라 동사무소까지 편하게 빨리 가는 거였을 거다. 한참을 기듯이 걸어올 동안 내 차만 마주한 것은 아닐 텐데 왜 나였을까?
"떨이라 싸게 줄 테니, 사 가소. 한 소쿠리 3천원 받던 건데 두 소쿠리 5천원에 가져 가. 퍼뜩 팔고 들어갈라 칸다" 나를 보고 손짓을 하는 노점 할머니의 거칠고 휘어진 손가락에 내 맘이 붙잡혔다. 좋아하지도 않고, 살 생각도 없던 월동초를 두 소쿠리나 샀다.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서다. 어머님도 계절마다 밭에서 나는 채소를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도 팔고, 시장 바닥에 앉아서도 팔았다.
느닷없이 생각지도 않은 월동초부터 사고, 시장 안으로 들어가 필요한 장을 봤다. 장바구니를 끌고 되돌아오며 보니 할머니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다. 어디서 나온 것일까 소쿠리에 월동초도 수북했다.
할머니들 중에 삶의 고수가 많은 듯하다. 아무래도 삶의 연륜이 낳은 지혜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도 이제 할머니다. 그러나 고수인 할머니들 앞에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애송이, 하수인생이다.
"내일은 뭐 해줄라 카노?" 무겁게 장을 봐 오는 내게 남편이 묻는다. 집만 지켜도 하루 세 끼는 기똥차게 잘 찾아 먹는 남편의 아침밥 시간은 늘 새벽 5시다. 올빼미형인 내게는 한밤중일 때라 항상 전날 저녁에 반찬준비를 미리 해놔야 한다. 일찍이 가장(家長)의 권리만 남기고 모든 책임과 의무는 내게 떠넘긴 남편은 참 편하게 산다. 놀고먹는 것이 숨 쉬 듯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갑자기 남편이야말로 타고난 인생 고수라는 생각이 엄습한다. 남편은 지독히도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사람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본다. 반면 나는 눈썰미가 좋아도 자주 만나는 사람이 아니면 사람은 잘 모른다. 상대가 설명을 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남편은 한두 번 본 사람도 언제 어디서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알뿐 아니라 헤어스타일까지도 기억을 한다. 길눈은 밝아도 사람은 못 알아봐 평생 힘들게 사는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진짜 고수(高手)와 사느라 고달픈 나는 하수(下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