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진 자리의 명상 / 이정경
배롱꽃이 막 피기 시작할 즈음, 낯선 소도시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가게를 처음 본 순간 햇살 가득한 정원이 한눈에 들었다. 나지막이 서 있는 정원수에 약간의 설렘마저 일었다. 마침, 여름이 시작하는 시점이라 배롱꽃은 활짝 핀 미소로 새 주인을 반겨주었다.
많은 꽃 중에 하필이면 배롱꽃으로 태어났을까. 피다 지치면 담벼락에 기대는 덩굴장미도 있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꽃 문을 닫는 포시라운 나팔꽃도 있건만, 오롯이 자기 몸 하나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받아 내는 붉은 꽃에 측은지심이 들었다.
뜨거운 순간에 가장 화려하게 피는 꽃이다. 꽃으로부터 치열한 삶을 읽는다. 한껏 교태를 부리던 꽃들은 태양의 닦달에 일찌감치 물러서고 배롱꽃만 홀로 남아 긴 여름을 지킨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요란한 향기를 품지 않았지만, 어떤 꽃도 흉내 낼 수 없는 기품으로 세상과 눈을 맞춘다.
피고 지며 자기 의무를 다하고 있는 꽃은 나를 닮은 것 같아 애착이 더했다. 새로 시작한 일이 서툴러 힘들거나, 앞만 보며 살았던 지난 시간이 떠오르면 배롱나무 아래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나무와 나는 무언의 소통으로 서로를 격려했다. 꽃에 대한 나의 사랑은 점점 깊어졌다.
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 끝자락에 배롱나무 아래에 뜬금없이 붉은색 꽃무릇이 쑥 올라왔다. 붉은 숨결을 온몸에 품고, 마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가녀린 줄기 위에 조심스레 몸을 얹은 꽃의 자태가 요염하기까지 했다. 기척도 없이 있다가 불쑥 올라온 꽃무릇 때문인지 배롱꽃은 점점 생기를 잃었다. 하지만, 난 꽃무릇에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여름내 정원을 지키던 배롱꽃을 밀어낸 것 같아서 공연히 미웠다.
꽃무릇의 출현으로 먼 기억이 소환되어 온다. 벚꽃이 하르르 떨어지던 어느 날, 도시에서 전학 해온 아이가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온 아이는 단번에 친구들 마음을 흔들었다. 그 아이의 등장으로 가뜩이나 존재감 없던 나는 괜스레 마음이 움츠러들어, 뒤로 물러서며 쭈뼛거렸다. 공부는 물론,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친구를 동경하던 마음이 슬그머니 질투로 이어졌다.
겨울을 맞은 정원은 긴 휴식에 들어갔다. 가끔 지나가는 길고양이들만 잔디밭에서 뒹굴며 마당의 고요를 깨웠다. 밤새 눈이 내린 아침, 눈 발자국이라도 내 볼 요량으로 마당으로 내려갔다가 배롱나무 아래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한 무더기 초록을 발견했다.
꽃무릇이 피던 장소였다. 기척도 없이 올라와서 남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내 생각은 빗나갔다. 지겹게 올라오던 잡초마저 숨어버린 엄동설한에 홀로 잎을 피우며 다음 해 꽃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로가 만나지 못한 안타까움에 애간장이 녹아내려서일까. 잎의 색이 유난히도 짙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친구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아버지 사업 실패로 할머니 집으로 내려온 그녀는 가족이 함께 사는 내가 부러웠노라고. 푸른 어둠이 서성이는 저녁 무렵에 혼자 감당한 외로움을 떠올리며 촉촉하게 눈빛이 젖어 들었다. 나는 친구의 꽃무늬 원피스만 보고 속에 든 슬픔은 읽지 못했다.
우리는 타인이 감내했던 과정을 읽지 못하고 눈부신 결과만 본다. 깊은 속내까지 들여 보라고 신이 우리에게 두 눈을 주셨거늘, 보고 싶은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버린다. 눈앞에 현상을 쫓아가느라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제, 꽃의 아름다움에만 취할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뿌리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지. 베롱꽃이 백 일 동안 꽃을 피우는 계절이다. 꽃무릇은 어두운 땅속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무심한 듯 있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식물들은 자연의 순리를 따라간다.
소박한 정원에는 일찌감치 자리 잡은 참새들이 노래 부르고 배롱꽃 터지는 소리가 투두둑 들린다. 여름이 성큼 다가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