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간장 / 김애자

오늘 수레형 카트를 끌고 로컬푸드에 다녀오셨단 당신 편지를 읽고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오이 24개, 고갱이 배추 3포기, 무까지 사서 끌고 집으로 돌아오신 당신의 건강이 장하시다 싶어서였습니다. 게다가 마트에서 생선 덮밥 1인분과 맥도날드에서 더블 불고기 햄버거 한 세트도 사다 두 분이 점심으로 드셨다는 말씀이 그럴 수 없이 고마웠습니다. 아무렴요. 늙으면 밥심으로 산다는 옛말을 때때로 몸이 일러줘 잘 아시잖습니까.

저는 간장을 떠 달였습니다. 류머티즘으로 손가락 관절이 안으로 굽어들고부터 더는 간장을 담그지 않을 거라고 다짐해 놓고, 항아리에 간장이 반 이상 줄어들면 조바심이 입니다. 씨간장 떨어지면 안 된다 싶어 정월 두 번째 말날이 가까워지면 그예 차를 끌고 농협마트로 달려가 한 말짜리 메주 박스를 싣고 돌아옵니다.

사람이 몸에 밴 인습을 깬다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당신이 매달 아들네 집으로 김치를 담아 택배로 보내는 것과, 조선간장 떨어지면 안 되는 줄 아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바윗돌처럼 단단히 박혔으니 말입니다.

제 간장 담기는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친정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설을 쇠고 며칠 후 메주 네 장과 3년 묵힌 소금 반포를 택시에 싣고 오셨습니다. 그리곤 저를 데리고 옹기점으로 가셨지요. 장항리와 된장 항아리, 고추장 단지까지 크기에 맞춰 사주었습니다.

배달은 옹기점 주인에게 맡겼고요. 그날 항아리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싸리나무 채반 두 개를 더 사주었습니다. 싸리나무 채반은 메주를 씻어 말리는 데 쓰였고, 작은 건 명절 때 한지를 깔고 전을 부쳐 담는 용기로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간장 담기와 고추장 담기는 반세기를 넘겼습니다. 1970년 3월에 시작한 일이니까요. 이사를 열다섯 번이나 다녔어도 항아리를 신주처럼 모시고 다녔답니다. 조선간장과 찹쌀고추장은 모든 음식 맛을 내는 데 기본으로 쓰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미역국과 떡국엔 조선간장이 들어가야 제맛을 낼 수 있습니다. 나물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렛골에서 살 땐 콩 농사를 지어 가마솥에 세 말을 일어 쑤었답니다. 장항아리도 큰 것으로 장만했지요. 콩을 갈색이 나도록 뜸을 들인 다음 적당하게 찧어 메주를 만드는 일은 여간 번거롭지 않습니다.

그래도 넉넉하게 담아 두 아들은 물론 친지들에게도 인심을 썼지만, 아파트로 이사 온 후론 한 말 이상은 장을 담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메주 한 말 장을 담아 건져 된장에 넣을 것을 덜어내고 나머지를 달이면 2리터짜리 병으로 여덟 개 정도 나옵니다. 그걸 2년 동안 먹으려니 간장 인심을 베풀 수 없게 되어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신형 아파트는 베란다가 좁습니다. 한 평정도 될까 싶은 비좁은 베란다에 항아리 세 개를 들여놓고 2년마다 장을 담고 고추장도 담습니다. 매번 장항아리는 남편이 씻어줍니다. 소금 포대 들어다 옆에 놓아주는 것도 그의 몫이지요. 이럴 때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척 들어맞아 얼쑤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침내 두 번째 말날이 돌아오면 전날 미리 풀어 침전시킨 소금물을 항아리에 붓고 말린 메주를 조심스럽게 넣습니다. 그리곤 대추, 숯, 고추와 볶은 참깨를 고명처럼 첨가하지요. 소금의 농도는 계란을 띄워 맞춥니다. 소금물 비율은 계란을 띄워 오백 원 동전만큼 떠오르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답니다. 이렇게 바닷물과 메주를 합방시켜 놓으면, 중중모리 가락으로 물푸레꽃을 피우기도 하고, 어떤 땐 진양조 가락으로 찔레꽃을 항아리 가득 피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항아리 안에 꽃이 무르익었다 싶으면 메주와 간장 가르기를 합니다. 간장은 체로 걸러 달이고, 된장은 덩어리진 것 없이 곱게 치대어 항아리에 담습니다. 그리고 다시마나 비닐을 덮고 소금을 듬뿍 얹어 놓으면 기분 짱~ 입니다. 오늘은 년 중 행사 중에서 가장 번잡한 일을 마치고 나니 흐뭇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 마음 알아주는 이는 당신뿐이라서요. 신록이 실실이 푸른 계절입니다. 두 분 손잡고 자주 산책하시란 당부 드리고 물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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